1. 얼마 전 용인에 있는 성원건설에 다녀왔다. 아파트 건설경기가 급속히 추락하면서 중견건설업체인 이 회사도 최근 법원에 회생절차 개시신청을 했다. 회생절차에 관한 법률 문제와 노동자, 노조의 대응방안에 관해 설명했다. 임금채권은 어떻게 보장받는가, 보전명령이 떨어졌는데 임금채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 신규채용은 제한되는가, 관리인은 어떻게 선임되는가, 기존 대표이사 등 경영진은 관리인이 될 수 있는가, 관리인이 선임되기 전에 대표이사와 체결한 합의의 효력은 어떻게 되는가. 회생절차가 개시되고 관리인이 선임된 이후 회생절차는 어떻게 되는가, 회생계획안은 누가 어떻게 작성하는가, 노동자와 노조는 회생계획안의 작성에 관여할 수 있는가, 회생계획안에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의견이 관철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회생계획안이 인가되면 이후 절차는 어떻게 되는가 등 성원건설 노동자들은 많은 질문을 했다.

2. 그들은 법원이 관리한다는 회생절차를 모른다. 이 나라 노동자들은 모른다. 자신의 회사가 회생절차 개시신청을 하기 전에도 회사의 경영을 모른다. 회생절차 개시신청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회사의 운명을 모른다. 노동자들은 회사의 운영을 결정하는 경영에 관하여는 모른다. 이것이 이 나라에서 노동자다. 모른다는 것. 몰라도 된다는 것. 알 필요도 없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노동자의 지위를 말한다. 태어나서 열심히 학교와 학원을 다니고 그렇게 배워서 노동자가 됐다. 그리고 사업장에서 몰라도 되는, 알 필요도 없는 노동자로 살았다. 선거 때마다 주권자인 국민으로 떠받들어지지만 사업장에선 몰라도 되는 노동자였다. 이 세계에서 노동자는 사업장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그것을 위해 배우고 쉬었다. 연애도, 결혼도 노동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혼하고 노동자로서 아이를 낳았다. 경쟁에서 승리했다면 대기업에서, 그렇지 못했다면 중소기업에서, 그것도 되지 못했다면 보다 열악한 사업장에서 일할 뿐 다 같이 몰라도 되는 노동자로서 살았다.
자, 이 노동자들이 회생절차 개시신청된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자로서 삶을 위해 회생절차를 궁금해 한다. 체불임금과 퇴직금은 보장받을 수 있을까. 장차 회생절차와 그 뒤 회생계획이 수행될 때 고용은 보장될 것인가. 이들에게는 이것이 가장 궁금하다. 그저 노동자로서 당장 자신의 임금과 고용이 궁금하다. 그래서 성원건설 노동자들은 변호사를 불러 질문했다. 필자는 대답했다. 그리고 필자는 그들이 노동자로서 궁금해 하는 것만 대답했다. 이것이 이 세계에서 노동변호사라는 필자에게 궁금해 하는 것이므로. 회생절차가 개시되면 임금채권은 공익채권으로 보장된다. 따라서 회생채권과 달리 행사할 수 있다. 관리인이 선임되면 노조는 향후 관리인과 교섭해야 한다. 회생절차가 개시돼 회생계획안이 인가되면 그에 따라 회사의 모든 것은 결정되고 관리인은 그대로 수행한다. 그러나 회생계획안의 작성과 그 수행은 노동자의 관여가 보장되지 않는다. 노조가 회생계획안에 관해 의견을 제출할 수 있을 뿐이다. 노조가 의견은 반드시 회생계획안의 내용에 반영할 법적 의무가 없다. 이렇게 그들에게 대답했다.

3. 그들은 묻지 않았다. 자신들의 노동과 삶이 키운 회사를 법원이 관리한다는 회생절차에서 왜 자신들은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인지. 왜 관리인은 자신들의 추천을 받아 법원이 선임해줄 수는 없는 것인지. 회생계획안은 자신들이 작성할 수 없는 것인지 또는 자신들과의 협의를 통해 작성할 수는 없는 것인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성원건설 노동자들만이 아니다. 그 동안 도산법과 근로관계에 관한 수많은 교육과 상담을 하면서 필자는 어떠한 노동자로부터도 이에 관한 질문을 받지 못했다. 이 나라에서 이 세계에서 노동자는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왜? 이 세계에서 노동자는 질문하지 않는 것일까. 그들은 그렇게 태어나서 배우고 살아왔다. 그렇게 TV를 보고 영화를 보고 김연아의 금메달을 보고 이건희의 경영 복귀를 보았다. 이 세상에서 노동자로 살아가지만 세상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그렇게 배우고 보았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의회 의원이 선거운동을 하면서 떠받들어대는 국민이지만 그들의 삶의 모든 것인 사업장에서는 노동자로서 사업장의 운영은 몰라도 되는 그런 사람으로 세상을 배우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고 궁금해 하지 않았다.

4. 사업장의 운명은 주주, 사용자의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법원에서 판사들은 사용자의 것이라고 판결한다. 수많은 강의실에서 교사와 교수는 사용자의 것이라고 말한다. 경영권은 침해할 수 없다. 단체교섭의 대상이 아니다. 헌법은 그렇게 규정했고 그러니 노조는 이에 관한 교섭을 요구하고 파업 등 단체행동은 할 수 없다. 이렇게 날마다 판결하고 말한다. 교과서와 논문, 그리고 온갖 기고를 통해 교수들은 한결 같이 서로 인용하며 써대고 있다. 아무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의 유명한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그래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이고 모든 것인 사업장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는 것인가. 자신의 ‘선생님’ 교수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존경에 마지않는 외국 유명 교수가 그렇게 말해서? 노동자들은 권한이 없고 감히 침해해서도 안 된다는 것인가. 바로 이것이 오늘 세계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 노동자를 만들었다. 그들이 당연한 것으로 어쭙잖게 인용하고 떠벌인 것이 오늘 세상을 만들었다. 그들은 당연하게 말한다. 사용자의 것은 사용자의 것이고 노동자의 것은 노동자의 것이다. 그런데 사업장은 사용자의 것이고 사용자가 준 임금은 노동자의 것이다. 그러니 사업장의 운영은 사용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가 노조를 만들어 교섭을 요구해도 교섭 대상이 아니고 파업을 하면 헌법이 보장한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넘어서는 위법한 것이다. 오늘 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 이것이 당연하니 노동자를 위한다는 아무개 변호사와 교수도 당연하게 이것을 말하고 돌아다닌다. 이들에게는 한국펠저 노동자들이 공장통합에 반대하고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이 해외공장 증설에 반대하며 무슨 사업장 노동자들이 회사의 합병과 분할에 반대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단체교섭권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무슨 노사자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노동기본권의 보장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온통 이 나라는 특히 금속노조 사업장에서는 사용자의 경영권을 침해하는 불법이 난무하고 적법한 질서를 회복해야 할 상황이다.

5.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들이 당연하게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 사업장은 사용자의 것일까. 그렇게 이 세상은 창조됐을까. 과연 그들이 금과옥조로 받드는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헌법상 노동기본권에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경영권은 교섭 대상이 아니고 이에 대한 파업 등 단체행동은 보장되지 않는다고 당연하게 해석되도록 제정된 것일까. 그렇다면 사업장은 당연히 사용자의 것일 뿐이고 이 세상은 사용자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세상은 그렇게 창조되지 않았다. 헌법 제33조는 경영권을 원칙적으로 교섭 대상이 아니라고 규정하지도 않았다. 헌법이 만든 세상을 법률이 다른 세상을 창조할 수 없다. 많은 판사와 교수가 법률로써 헌법을 해석한다. 노동기본권이 그렇다.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을 제한하고 금지하고 있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을 가지고 헌법상 노동기본권을 해석해 재단한다. 이러한 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법률이 만든 세상이 헌법이 만든 세상이 된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개별적이고 세부적인 법률조항이 법률의 기본적인 이념 내지 원칙 조항과 반하는 경우에 노동기본권에 관한 헌법위반에 해당할 수 있어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자체가 위헌일 수는 없다. 이러한 자들은 이렇게 세상을 해석하고 재단한다. 그래서 세상은 당연하게 사용자의 것이 된다. 그러나 노동자가 이러한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래서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고 궁금해 하지 않는다면 내일도 세상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오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궁금해 하지 않는다면 내일도 여전히 오늘일 뿐이다. 오늘 세상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노동자는 당연하게 인식해 온 것들을 뒤집어야 한다. 성원건설 노동자들이 질문할 수 없었던 것은 성원건설 노동자들의 탓이 아니다. 그들은 그렇게 배우고 보고 살았을 뿐이다. 세상은 그들이 해석하고 재단하지 않았다. 세상을 해석하고 재단한 자들은 오늘도 세상은 사용자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개 ‘선생님’ 교수와 외국 유명 교수, 그리고 서로를 인용해 떠받들며 격을 높이면서 세상은 사용자의 것이라는 글을 써대고 있다. 이러한 그들의 말과 글을 노동자가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때 그래서 그들의 말과 글이 세상을 사용자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때 그때 세상은 더 이상 사용자의 것이 아니게 된다. 그때 성원건설 노동자들은 회생절차에서 자신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회사가 더 이상 주주, 사용자의 것만이 아니고 자신의 것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는 세상은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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