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화점에서 화장품을 판매하는 이아무개(33)씨는 최근 불면증과 잦은 구토로 정상적인 생활에 어려움을 느껴 사표를 제출했다. 10년차 베터랑 판매사원이지만 자신의 감정과 상관없이 항상 미소를 짓고 있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지난해 8월 ‘돼지처럼 살이 쪘다’, ‘자기관리가 엉망인데 고객 앞에 부끄럽지도 않느냐’는 백화점측 관리자의 핀잔을 들은 후, 소화가 잘 안되고 체한 듯 명치 부근이 답답한 증상이 심각해지면서 건강도 급격히 나빠졌다.

#2. 식품제조업체에 고용된 전아무개(45)씨는 대형마트 파견사원으로 일한다. 전씨는 시식코너를 운영하면서 상품 판촉활동을 하는데 하루 어림잡아 5천명 이상의 고객을 상대한다. 회사에서 제시한 매출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자칫 해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고객들에게 굽신굽신 해야 한다.
“처음에는 목이 붓고 쉬거나 손목이 시큰시큰 했는데 1년 정도 지나니까 머리가 아프고 사람들 발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요.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것 같고요. 비닐장갑을 끼고 일하는데 손에 땀이 많이 나서 짓무를 때도 있어요.”

4일 민간서비스연맹에 따르면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지난해 국내 한 서비스사업장 노동자 2천902명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8명은 일할 때 자신의 기분과 관계없이 항상 웃거나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고 응답했다. 이들 가운데 절반(49.7%)가 우울증상을 앓았다. 심리상담이 필요한 중증 우울증상은 11.9%,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한 고도 우울증상은 8.1%로 조사됐다. 우울증상의 정도는 일반 국민들에 비해 5배 가까이 높았다. 특히 고도 우울증상은 심각했다. 노조 상근자나 공무원 해직자에 비해서도 월등히 높았다.<표 참조>

 



강요된 ‘친절’을 소모하는 노동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처럼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억지 웃음과 강요된 친절로 극심한 직무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를 ‘감정노동’이라고 하는데, 마치 연기를 하듯 고객의 심정적 만족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맞추는 일을 뜻한다. 판매직뿐만 아니라 병원·은행·대중교통·공공기관·전자제품 수리업 등 고객을 응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노동이다.

기업들의 감정노동의 관리는 점점 고도화되고 있다. 친절교육·CS(고객만족) 강의처럼 단순히 직원들을 교육하는 데서 벗어나 미스테리쇼퍼나 각종 모니터링 제도 등을 도입해 인사평점과 직결시키고 있다. 반면 감정노동으로 인한 직무스트레스에 대한 관리는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감정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러셀 혹실드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 캠퍼스 교수(사회학)의 저서에 따르면 원래 감정을 숨긴 채 강요된 감정을 지속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노동자들을 적절히 관리하지 못할 경우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거짓 감정’을 생산하다보니 자신의 ‘참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결국 감정이 소진돼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무뎌지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혹은 감정의 동요가 심각해지거나 자신이 둘 이상인 것처럼 느끼기도 하는데 이런 증상이 오래되면 우울증이나 불안증에 시달릴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직무스트레스와 감정의 부조화는 정신적 고갈 상태에 이르면서 탈진증후군을 낳기도 한다.

감정노동의 ‘가치’는 얼마?

지난해 9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개최된 ‘서비스 노동자의 감정노동 문제와 대책 토론회’에서 박상은 서비스연맹 전 사무처장은 “감정노동은 그 의미나 정의조차 사회적으로 인식되지 못할 정도로 연구나 조사가 미비한 상태”라며 “반면 현실에서는 감정노동으로 인한 건강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기업들의 이익에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큼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의제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밝혔다. 감정노동에 대한 가치 평가가 우선돼야 감정노동으로 인한 건강 예방 조치나 보상 방안이 마련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일례로 가사노동의 경우 85년부터 국내에서 가치 평가 논의가 진행돼, 2004년에는 통계청과 여성부가 공동으로 전업주부의 연봉을 발표하기도 했다. 단순한 연구결과지만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연맹은 감정노동 가치 인정에 대한 사회 공론화를 위해 올해 임금·단체협상에서 감정노동 수당 신설을 요구한다는 방침이다. 연맹은 지난달 감정노동의 가치인정을 전제로 감정수당 지급이나 휴가부여 같은 보상과 감정노동에 따른 직무스트레스 예방 등을 임단협 요구안에 포함시켰다. 실제로 로레알코리아·엘카·샤넬 등 화장품판매노조를 중심으로 감정수당을 도입하는 사업장이 늘고 있는 추세다. 연맹은 “감정노동 가치 인정을 위한 실태조사와 연구사업도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혀 그 결과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탈진증후군
‘탈진증후군’은 허탈감이 오래 지속돼 무기력하게 되는 증상을 의미한다.
흔히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나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헤어날 수 없는 벽을 느낄 때 사람들은 자신이 다 타버린 것 같은 느낌(Born Out)을 이르기도 한다. 탈진이 진행되면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직장을 떠나거나 직업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교사를 비롯해 사람을 상대하는 특정 직업군에서 대두되는 증상으로, 7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인 하버트 프로이덴버거에 의해 ‘탈진증후군’이라 정의됐다.
국내에서도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2005년 발표한 ‘서비스 인력의 감정노동 및 노사발전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감정노동과 감정격차는 업무 탈진·대인 탈진·고객 탈진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업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감정과 실제 감정의 불일치 정도나 내부적 갈등 정도’를 의미하는 ‘감정격차’는 감정노동과 탈진과의 관계를 매개하는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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