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상 손해배상제도는 업무의 재해발생 기여도를 일정한 비율로 산정해 손해배상액을 결정한다. 그러나 산업재해보상제도는 과실책임 원칙과 과실상계의 이론을 적용하지 않고 단순히 업무상 재해 발생 여부만을 판단해 보상여부를 정한다. 즉, 업무와 사고 또는 업무와 질병발생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는지 여부에 따라 업무상재해로 인정하거나 반대로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와 관련, 서울고등법원이 최근 업무상질병에 따른 추가상병신청 불승인사건에서 기존 질병 경험인 기왕증(旣往症·anamnesis) 기여도 개념을 도입해 근로복지공단의 불승인처분 중 일부를 취소하는 판결이 나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산재사건에서 기왕증 기여도 개념 도입 시도

서울고법은 이번 판결에서 민사상 손해배상제도의 기왕증 기여도 개념을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요구하는 산업재해보상 제도에 도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서울고법은 대상판결문에서 기왕증 기여도 개념의 도입에 대해 산재보상제도의 생활보장적 성격에 비춰 적절치 않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으나, 근로기준법상 재해보상제도나 산재보상제도가 생활보장적 성격을 갖는 것은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과실책임의 원칙과 과실상계의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것이지, 인과관계가 없는 부분까지 보상하고자 하는 데 있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이런 비판은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서울고법은 또 그 동안 실무경향을 보면 업무가 질병 발생에 기여한 정도가 50% 이상인 경우에는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고, 50% 미만인 경우에는 이를 부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실무 경향에 따르면 극단적으로 말해 업무 기여도가 51%인 경우에는 업무상재해로 인정받아 많은 혜택을 받게 되지만 그 기여도가 49%인 경우에는 업무상재해로 인정받지 못하여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는 매우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결과에 이르게 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기왕증 기여도 개념을 도입하여 적절히 운영함으로써 이러한 불합리나 불공평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울고법은 더불어 △기왕증 기여도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다수의 산업재해 사건을 조정·권고 등을 통해 간이·신속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점 △외형상 하나의 행정처분이라고 하다라도 가분성이 있거나 그 처분상의 일부가 특정될 수 있다면 그 일부만의 취소가 가능하고 산재보상보험법상의 각종 급여는 결국 금전으로 지급하는 것이어서 가분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산재불승인 처분에 대하여는 그 업무에 기인한 부분에 한하여 취소가 가능하다는 점 등을 기왕증 기여도 개념 도입의 논거로 제시했다.

최초상병이 추가상병 원인에 기여했다면 기여 비율만큼 재해인정

본 사건의 원고는 2007년 산소촉매제품 원액을 만드는 회사에 입사해 오전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하루 18시간을 일하던 원고가 업무수행 중 갑자기 눈에 통증을 느껴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요양승인을 받았다. 그 후 중증의 우울증에 시달려 최초상병을 원인으로 추가상병을 신청했으나 우울증은 최초 질병과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신청이 기각됐다.
이에 원고는 소송을 냈으나 1심에서 패소하고 2심(서울고법)에서 일부 승소를 한 것이다.

서울고법은 ‘업무상 질병의 치료과정 중 우측 시신경의 장애 발생, 시력저하, 안구통증, 이로 인한 수면부족 및 불안감, 절망감과 과로 및 스트레스 등이 우울증 에피소드의 발병 또는 악화에 30% 정도 기여했을 것이라는 점 등에 비추어 이 사건 추가상병은 상당 부분 원고의 기존질환 또는 개인적인 취약성 등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 일부는 이 사건 최초 상병 및 그 치료과정이 원인이 돼 발생했다 할 것이고 이사건 최초상병 및 그 치료과정이 기여한 비율은 1/4정도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추가상병불승인처분 중 1/4부분을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이런 판결은 재해인정 처분의 위·적법 여부를 판단해, 전부 취소 아니면 전부 인용하는 그 동안의 판결관행에 비교해 이례적으로 볼 수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해 기존 재해인정 판결문을 보면 ‘과도한 스트레스는 우울증 발병의 심리적, 환경적 요인으로 작용해 우울증이 발병되기 쉬운 소인을 가지고 있는 환자에게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는 점 등 제반사정에 비추어 볼 때, 원고는 발음의 부정확에 대한 콤플렉스, 내성적이면서도 완벽주의자적인 성격 등 우울증이 발병하기 쉬운 여러 가지 소인들을 가지고 있었다가 업무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업금융 1팀의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면서 극심한 과로와 스트레스를 겪게 돼 그와 같은 과로와 스트레스가 심리·환경적인 요인으로 작용해 원고의 우울증을 유발했다고 추단함이 상당하다. 또한 원고가 식욕 및 의욕 부진의 상태가 지속되다가 우울한 마음이 들어 자살을 시도했고, 그 이후에 나타난 원고의 불면, 불안, 과도한 흡연 등 원고의 제반 이상행동에 비추어 보면 원고가 우울증의 심화로 정신병적 증상이 발현됨으로써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 또는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 다시 자살을 기도하다가 저산소증 뇌손상을 입어 이 사건 상병인 중증 우울증 에피소드, 기질성 기분장애가 발병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 상병은 업무상의 사유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판단했다.(2005.10.14, 서울행법 2004구단377) 이런 사례는 일부 재해발생 원인에 있어 개인적 사유가 영향을 미쳤더라고 하더라도 재해발생이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될 수 있다면 전부 인용해 100% 보상한 경우이다.

이 같은 기존 판결관행은 근로자의 재해인정여부판단에 따라 과도하게 보상받거나 그 반대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는 불합리한 결과로 귀결된다. 이른바 ‘전부 아니면 전무(全無)(all or nothing)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 판례가 제시한 재해인정 기준은 ‘재해인정’ 여부가 아닌 ‘재해인정 비율’에 초점을 두고 있어 산재보상의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부분을 해소하는 유연한 기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유연한 재해인정기준 확대 정립 필요

필자의 실무적 경험으로는 지난 2008년 산업재해보상법 개정(업무상재해 인정기준의 법제화, 업무상질병과 관련해 질병판정위원회제도 도입 등)이후 재해 발생에 대한 형식적이고 무성의한 심사로 인해 산재 인정률이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재요양 및 요양연기 신청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본 판결은 형식화된 재해 인정기준을 보다 유연하게 해석해 업무와 재해의 인과관계를 엄격하게 판단하지 않고 업무적 요소와 개인적 요소를 비율적으로 산정해 재해에 대해 업무로 기인한 부분만큼만 산재보상으로 인정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런 판단기준은 산재근로자에 대한 실질적 공정보상이라는 산업재해보상법의 목적에 부합한다.

앞으로 이번 서울고법의 판단요지가 대법원의 최종 판결로 정착될 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그 합리성에 비춰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근로복지공단도 이번 판결내용을 산재인정기준에 적극 반영해 승인과 불승인의 극단적인 선택을 위한 심사가 아닌 유연성 있는 심사기준을 정립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근로복지공단의 존립근거의 하나가 근로자들의 적정한 산재보상혜택 부여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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