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항상 문제의 시작은 불분명한 경계의 설정에서 온다. 사물은 다른 사물과의 구별을 통해 독립된 실체를 획득한다. 운동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해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먼저 대상인 사물이 다른 사물과 구별을 명확히 해 이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2. 자본주의 국가 법질서는 시민혁명을 통해 (반)봉건제 국가질서를 폐지하고 수립됐다. 당시 노동은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대헌장과 권리장전, 인권선언, 헌법 등은 천부의 권리로서 인민의 기본권을 선언하고 보장했다. 단두대로 봉건적 압제를 철폐함으로써 스스로 해방된 인간은 더 이상 봉건적인 권력과 지배를 받지 않게 됐다. 이러한 상태의 인간으로서의 보장이 천부의 것이라고 국가 법질서로 선언했다. 하지만 노동하는 인민의 권리는 보장되지 않았다. 그 뒤 노동하는 인민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대립해 ‘노동’으로 구별 지음으로써 계급으로서 노동자는 등장했다. 비로소 노동운동은 전개되기 시작했다. 천부의 권리로서 국가권력에 의해서도 빼앗을 수 없는 자연의 기본권으로서 보장된 시민계급의 권리와는 달랐다. 이를 전제로 그와 대립해 노동의 권리는 확보될 수 있었다. 그래서 자본주의국가에서 노동의 권리는 국가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고, 이것은 천부의 권리로서 시민계급의 권리와는 보장의 수준이 다른 것으로 취급당했다.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자본과 노동의 대립과 존재를 전제로 하는 노동의 운동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법질서 내에서 자본에 대한 노동의 독자적인 지분을 확보할 것이냐, 자본주의 국가 질서를 넘어 노동의 전일적 지배를 확보할 것이냐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노동운동은 분열하고 대립하고 충돌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본주의 국가질서를 폐지했던 사회주의체제는 붕괴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또 하나의 노동운동조차도 급격히 쇠락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의 독자적인 지분의 확보가 아닌 자본과 협력하고 상생하면서 제3의 길을 찾아 나섰다. 유사한 많은 아류들이 갖가지 이름으로 등장했다. ‘새로운’ 것으로 포장하고 ‘희망’을 내걸고 ‘대안’을 내세웠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였다. 자본과 노동의 경계를 흔들어 상실하게 하고 혼동시키는 것이었다. 때로는 경제성장과 경제위기라는 이름으로, 국제경쟁과 국가위기를 내세워 노동은 자본과 협력하고 상생해야 한다며 새로운 대안을 떠벌렸다. 결과는 하나로 향했다. 그들의 노동운동의 종말이었고, 결국 그들조차도 소멸했다. 자본주의 국가 법질서가 확립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운동이 전개된 이후 모든 권력과 정당은 노동자를 말했다. 노동의 미래를 떠벌였다. 비스마르크도, 무솔리니와 히틀러조차도 노동자의 미래를 말했다. 박정희, 전두환과 노태우도 노동자를 위한 복지국가를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대한민국을 배웠다. 그러나 그들에게 노동운동은 없었다.

3. 오늘 복지국가를 말한다. 진보진영은 보수진영에 대응해 하나로 묶어줄 화두로 복지국가를 말하고 있다. 복지관련 시민운동 단체들이 등장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주최하는 토론회가 15일 열렸다. 한명숙·정동영(민주당), 이정희(민주노동당), 노회찬·심상정(진보신당), 유원일(창조한국당), 그리고 사회 노동계 인사들이 두루 참석했다. 이 단체의 공동대표 이상이씨는 “이젠 복지정책을 넘어 복지국가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복지국가를 주장하며 등장한 단체들을 보면 이명박 정권의 정책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복지국가를 내세우고 있다. 주도자들을 보면 과거 김대중·노무현 등 민주당 정권에 참여했던 인사들이거나 이들과 정치적인 지향을 같이 하는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역동적 복지국가’는 우리가 배웠던 대한민국의 복지국가와 무엇이 다른지 알 수가 없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역동적 복지국가의 3대 가치로 설정했다는 ‘존엄·연대·정의’도 추상적이어서 도무지 잡히지 않는다. ‘보편적 복지, 적극적 복지, 공정한 경제, 혁신적 경제’라는 4대 원칙도 어디에 노동하는 인간의 권리가 보장돼 있는지 잘 파악이 안 된다. 15일자 한겨레신문을 보면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등 보수진영의 복지가 사회적 약자를 위주로 한 시혜적 복지정책인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고용·보육·의료·주거·일자리 불안을 덜어주는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보편적 복지’라고 이 단체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배웠던 대한민국의 복지국가와 이들이 주장하는 ‘보편적 복지’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한나라당 의원이라고 해서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있는가. 대한민국은 복지국가를 지향한다고 배웠고 헌법은 복지국가의 원리를 기본질서로 한다. 헌법 전문에서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라고 사회정의의 실현, 기회균등,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선언했고,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했으며, 제37조는 국가의 적극적 목적으로 공공복리를 규정했다. 뿐만 아니라 제31조에서 제36조까지 인간다운 생활권(제34조 제1항), 사회보장, 사회복지증진, 재해예방 등을 한 국가적 노력 의무(동조 제2항, 제6항), 생활무능력자의 국가적 보호(제5항), 사회적 경제적 방법에 의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 및 최저임금제의 실시(제32조 제1항), 인간의 존엄성에 합치하는 근로조건기준의 법률제정(동조 제2항), 여자와 연소자의 근로의 특별보호(제4항, 제5항), 여성근로자에 대한 차별금지(제4항), 근로자의 자주적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의 보장(제33조), 환경권(제35조)과 환경보전의 의무(제35조 제1항), 근로자의 권리(제32조 제1항)와 근로의 의무(제32조 제2항), 교육받을 권리(제31조 제1항)와 교육받게 할 의무(제31조 제2항), 보건에 관한 국가적 보호(제36조 제3항) 등을 규정한다.
제9장 경제의 장에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되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적정한 소득의 분배, 경제력 남용의 방지 등으로 경제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경제의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를 규정하고(제119조 제2항), 소비자보호운동을 보장했다(제124조).
이상을 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들 앞에서 취임사를 통해 수호하겠다고 선서한 대한민국 헌법은 복지국가의 헌법이다. 그럼에도 지금 대한민국이 복지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의문 때문에 지금 복지국가를 주장하며 단체를 만들고 야권통합을 위한 화두로 등장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것만으로 진보일 수 없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렇다. 박정희, 전두환과 노태우도 대한민국은 복지국가를 말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추구하고 노동의 유연화와 인원 조정 등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했던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비정규직 문제를 말할 때는 정규직 노동자의 과도한 권리가 문제로 등장했지 비정규직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은 없었다. 언제나 그래왔다. 그들은 노동자를 위한 복지를 말했지만 노동기본권은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헌법 제32조 근로의 권리를 말했지만 헌법 제33조 노동기본권은 말하지 않았다. 자본과 대립하고 투쟁하는 노동자의 권리로서 노동기본권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들의 권력에는 자본에 대립하는 노동의 지분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노동운동은 없었다.
진보진영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복지국가를 말한다. 이들에게 노동운동은 있을까. 우리 사회에서 복지국가를 말하는 자는 진보이고 말하지 않는 자는 보수인가. 아니면 한나라당이 말하면 복지정책이고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이 말하면 복지국가인가. 필자는 궁금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파업을 처벌하고 징계하던 자들이 외치는 복지국가에서는 노동기본권은 무엇일까. 합법이면 보호하고 불법이면 규제하겠다는 것이라면 이 나라에서 노동기본권의 행사는 보장될 수 없다. 헌법이 보장한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등 노동기본권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등 법률에 의해 그 행사가 보장되지 않는다. 파업은 불법이고 처벌된다. 파업이 처벌되지 않도록 하겠다면 이때 이들이 말하는 복지국가는 한나라당이 말하는 것과 구별될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기본권 행사의 보장을 위해 대단한 진전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에 대립한 노동의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것인데 지금 복지국가를 주창하는 단체나 그 인사들이 일치해 이 주장을 내세울 수 있을까. 이들이 이것을 내세울 수 없다면 과거 노동자를 위한 복지를 말했던 자들처럼 오늘 복지국가 주장자들에게도 노동운동은 없다. 이들은 복지국가가 노동자정당이 다수를 확보하고 있는 국가에서 탄생하고 유지되고 있는 것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자본의 위기상황에서 그 존립을 위해 노동자를 위한 복지제도를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자본에 대립하는 노동의 지분을 통해서만 복지국가는 확보될 수 있다. 복지국가를 말하면서 자본과 대립된 노동과 노동운동을 부정했던 자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주장에서 노동기본권 행사를 보장하기 위한 입법을 단행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어야 한다. 이것을 통해서만 복지국가 주장이 오늘 노동이 진보와 보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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