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단연 고용불안일 것이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노동자들에게 질병을 불러오고 심지어는 죽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비정규직 기간제한 연장 논란으로 시끄럽던 지난해 여름, 법원은 “과로와 해고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수면부족으로 인한 사망은 업무상재해”라는 의미 있는 판결을 내놨다.

과로·스트레스에 시달린 비정규직

윤아무개(사망 당시 28세)씨는 2001년 한국전력 전남지사의 한 지점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배전과(현 전력공급팀)에서 일했다. 윤씨가 주로 맡은 업무는 신배전정보시스템에 준공도면과 배전공사 설비자료를 입력하는 것으로, 배전설비 관리업무의 근간이 되는 것이었다. 한전 본사는 매 홀수 달마다 해당 업무를 점검하고, 이상이 발견될 경우 사업소 평가에 반영했다. 때문에 작업자의 특별한 세심함이 요구됐다. 그럼에도 윤씨는 대체인력 없이 혼자 업무를 도맡았다. 야근이나 휴일근무도 잦았다.

한전은 1년에 한 번씩 상급자의 추천으로 비정규직 직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제도가 있었다. 윤씨도 몇 년에 걸쳐 상급자 추천을 받았다. 그러나 계속 탈락했고,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것에 대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2007년 3월부터 6월 사이에는 비정규직 직원이 정규직원으로 전환되거나 고용관계가 종료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윤씨는 퇴출당할 것이라는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면서 수면제를 복용하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상태로 악화됐다.

업무상재해 인정하지 않은 공단

윤씨는 같은해 4월 어지럼증과 불면증·두통을 호소했다.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받았지만 특이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윤씨는 이후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왼쪽 귀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는 증상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증상이 나타났다. 며칠 뒤 윤씨는 발작을 일으켰고 병원에서 단기 정신증적 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후 심한 경련과 폐렴 증상까지 나타났고, 같은해 5월 저산소성 뇌증·급성 호흡부전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사망했다.

윤씨의 유족들은 같은해 “회사에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면서 극심한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이로 인한 수면부족이 간질중첩증을 야기해 사망에 이른 업무상재해”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보상 및 장의비를 청구했다. 하지만 공단은 “과로 및 스트레스와 망인의 사인인 간질중첩증은 의학적 인과관계가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유족보상 및 장의비 부지급결정을 내렸다.

“과로·스트레스가 질병 유발, 업무상재해”

하지만 서울행법은 다음과 같은 사정을 반영해 윤씨의 업무상재해를 인정했다.
1. 윤씨는 회사에 입사한 이래 남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적시에 처리해야 하는 업무를 혼자서 지속적으로 과다하게 수행해 온 것으로 보인다.
2. 윤씨가 5년여간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면서 고용불안으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3. 2007년 3월부터 해고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정상적인 수면을 취하지 못한 채 업무를 수행했고, 적어도 2007년 4월19일부터 같은달 24일까지 닷새 동안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4. 윤씨가 기존에 간질이나 이와 유사한 발작을 일으킨 적이 전혀 없다.
5. 발병 후 한 달여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윤씨가 사망에 이르게 된 경위가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과로·스트레스·수면부족이 직·간접적으로 간질의 발병·악화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에는 의학적 견해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업무상 사유에 의한 사망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업무와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법원은 “질병의 주된 발생원인이 업무수행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더라도 업무상의 과로나 스트레스가 질병의 주된 원인에 겹쳐 질병을 유발 또는 악화시켰다면 그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법원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업무 과중에 따른 육체적·정신적 과로와 해고에 대한 불안감 및 이로 인한 스트레스와 수면부족으로 말미암아 윤씨가 간질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사망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므로 윤씨의 사망은 업무와 상당인과관계에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


[관련판례]
서울행법 2009년8월26일 선고 2008구합31888 유족급여 및 장의비 청구 반려처분 취소
대법원 2003년11월14일 선고 2003두5501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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