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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몰린 금융노동자 건강권올 들어 증권노동자 매달 1명씩 자살 … 은행 영업시간 변경 노사합의도 ‘흔들’

#1. 국내 한 증권사에 다니던 ㄱ씨는 지난 1월18일 아침 출근한다며 집을 나와 선산의 소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 그는 비정규직으로 7년간 일했고, 사망하기 전에는 정규직으로 일했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ㄱ씨는 정규직 전환을 위해 약정(증권매매 성립)를 늘려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2. 한 시중은행의 전산개발부 팀장이었던 ㄴ씨는 지난달 15일 오전 9시께 서울 서강대교 남단 한강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설 연휴에도 쉬지 못하고 은행의 새로운 전산개발시스템 업무에 매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해당은행 노조는 같은달 발표한 진상조사 결과보고서에서 “은행의 총체적 문제와 결합된 업무상 정신적 압박감이 사망원인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금융노동자들의 건강권 문제가 또다시 대두되고 있다. 14일 증권노조에 따르면 지난 1월 숨진 증권노동자 ㄱ씨는 정규직 전환을 위해 약정을 늘리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손실을 차마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했다. 이른바 자본시장을 쥐락펴락하며 고임금을 받는다는 증권노동자의 화려함 뒤에 숨은 그늘이다.
노조는 “증권노동자들은 수수료 인하와 같이 업계에 팽배한 출혈경쟁과 약정 강요에 짓눌리고 변동임금체계에 시달린다”고 강조했다. 증권업계의 이런 관행은 2008년 증권노조가 조사한 ‘증권노동자 건강권 실태조사’에서도 드러났다. 조사결과 연간 10여명의 증권노동자들이 과도한 스트레스와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과로사 또는 자살로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자료사진=정기훈 기자 ⓒ 매일노동뉴스


일과 가정의 양립, ‘그림의 떡’

“저녁 9시나 10시에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아침 8시에 출근해 12시간 넘게 일해요. 퇴근이 빠른 ‘가정의 날’인 수요일에도 늦게 집에 갑니다. 다른 직원 눈치 보느라 제때 퇴근하기 힘들어요.”
“교육 때문에 매주 4일 연속 7시30분에 출근합니다. 밤 11시 이후 퇴근은 기본이에요. 언제까지 이래야 되는 건지, 살려주세요.” (이상 기업은행지부 홈페이지)

장시간 노동으로 건강권을 위협받기는 은행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금융노조 기업은행지부는 2일부터 퇴근문화 개선을 위한 노사합의 준수를 촉구하며 서울 을지로 IBK기업은행 본점 로비에서 천막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지부에 따르면 기업은행에서는 올 들어 직원 3명이 숨졌다. 2005년 이후 5년간 1년에 서너 명씩 돌연사 등으로 사망하고 있다. 지부 관계자는 “2000년 이전에는 아예 없었던 일인데, 최근엔 거의 정기적으로 벌어지는 일이 됐다”고 우려했다. 지부는 돌연사의 원인을 업무 스트레스 때문으로 추정했다. 그럼에도 은행은 지난해 4월 영업시간을 변경하면서 노사가 합의했던 ‘퇴근문화 개선의 경영평가 반영’을 일방적으로 깼다. 지부가 수차례 원상복구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은행측 관계자는 "기업은행 직원은 다른 시중은행보다 일을 덜 한다"는 말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영업시간 변경 합의, 1년 만에 파열음

금융노조와 34개 금융기관은 2008년 12월 은행 영업시간을 기존 오전 9시30분~오후 4시30분에서 오전 9시~오후 4시로 30분 앞당기는 데 합의했다. 실제 영업시간 변경은 지난해 4월1일부터 시행됐다. 금융기관 영업시간 변경은 단순히 영업점 개·폐점 시간을 30분 당기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퇴근시간을 정상화해 조합원의 삶의 질을 개선하려는 취지에서 시행됐다. 하지만 시행 이전부터 영업시간 조정으로 출근시간만 앞당겨질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 인력은 줄어든 반면 업무 총량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늘었기 때문이다.

기업은행 노사는 지난해 3월 전체 지점 경영평가 중 5% 이내의 범위에서 퇴근문화 개선을 반영키로 합의했다. 퇴근이 늦은 은행노동자들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경영평가에 퇴근시각이 반영되면서 지난해 말까지는 퇴근시각이 빨라지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런데 은행은 올해 초 경영평가 기준을 발표하면서 퇴근문화 개선을 경영평가 항목에서 제외했다.

이에 대해 지부는 “노사합의를 일방적으로 깼다”고 비판했다. 지부에 따르면 노사는 지난해 3월 지부보충협약 체결 당시 합의의 존속기간을 '퇴근시각이 정상화될 때까지'로 정했다. 강제적인 장치였던 경영평가 반영 항목에서 퇴근문화 개선이 빠지면서 기업은행 노동자들의 퇴근시간은 올 들어 급격히 늦어지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 절실

은행노동자의 장시간 노동에 따른 건강권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금융노조가 2007년 9개 시중·국책·지방은행 임직원 5만4천4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은행원들은 ‘현재 생활하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건강 문제를 꼽았다.<그래프 참조>

출처=금융노조


실제로 2003년부터 최근 4년간 한 해 평균 33.5명이 숨졌고, 이 가운데 16.5명이 과로사한 것으로 추정됐다. 자살이나 교통사고·질식사 등 일반사망을 제외하고 한 해에 16.5명이 심근경색이나 뇌출혈·간경화 등 과로로 인한 사망으로 의심되는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노조는 "노조 산하 비정규직을 제외한 전체 임직원 9만8천721명 가운데 한 해 평균 30.1명이 과로사로 사망하고 있는 것 같다"고 추정했다.

실태조사를 담당했던 노조 관계자는 “일반 국민에게는 은행 노동자들이 깨끗한 환경에서 근무하면서 노동시간도 짧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며 “은행 노동자의 건강권 보호를 위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금융노조와 은행연합회는 당시 영업시간 변경에 합의하면서 출퇴근 실태점검반을 운영하고, 근무정상화 노력을 경영평가에 반영키로 했다. 퇴근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던 셈이다. 금융노조는 지부별로 영업시간 변경 합의 이행상황을 조사한 뒤 대응책을 마련할 계획이다.

증권노조는 건강검진 현실화를 시급한 과제로 제시했다. 노조는 금융투자협회 차원에서 정신건강상담소 설치를 요구하고 있다. 2007년 증권업계 산별교섭 당시 노사가 상담소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지만, 아직 실행되지 않고 있다. 노조 관계자는 “회사 안에 상담소를 설치할 경우 노동자들은 관련정보를 회사가 갖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며 “일상적으로 정신건강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재현 기자  ojh@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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