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은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2007년 숨진 고 황유미(사망 당시 22세)씨의 기일이었다. 노동안전보건단체들은 지난주를 반도체산업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주간으로 정했다. 전자산업의 직업병 문제를 널리 알리고 삼성을 비롯한 전자산업 기업들의 책임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수십 년 전부터 전자산업 직업병 실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온 해외의 활동가들도 국내를 찾았다. <매일노동뉴스>는 5일 서울 충정로의 한 카페에서 테드 스미스(65·사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ICRT·International Campaign for Responsible Technology) 코디네이터를 만났다. 그는 ICRT의 설립자이자, ICRT의 모태가 된 ‘실리콘밸리 독성물질 방지연합’(SVTC)과 ‘전자제품 되가져오기 운동연합’(Electronics TakeBack Coalition)의 설립자다. 지난해 국내에서 번역·출간된 ‘Challenging The Chip : 세계 전자산업의 노동권과 환경정의’ 공동저자이기도 하다.

스미스 코디네이터는 “실리콘밸리에서 지역주민들이 반도체공장의 직업병과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된 데는 지역언론의 역할이 컸다”며 “이런 문제를 주요 언론이 다루지 않는 한국의 상황은 매우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 ICRT는 어떤 단체인가.
“(ICRT의 모태가 된) SVTC는 82년 실리콘밸리(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 카운티의 별칭)에서 지역운동으로 출범했다. 이후 전자업체들이 실리콘밸리에서 애리조나·텍사스·멕시코 등 미국의 남서쪽으로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 지역 노동자들의 임금이 낮고 환경규제가 덜했기 때문이다. 당시 실리콘밸리에서의 경험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운동으로 활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시민·사회단체(NGO)들과 힘을 합쳐 직업병·환경 문제에 관해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전자산업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제가 지하수·환경·공기 오염 등이었다. 전자산업이 외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국제적인 캠페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활동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내가 실리콘밸리 지역에 살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변호사인데, 70년대에 전자산업 직업병 문제를 조망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아내는 직업병과 관련한 지역NGO인 ‘산타클라라 노동안전보건센터’(SCCOSH)를 결성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82년 캘리포니아 주 당국 차원에서 전자산업이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역 주민들은 노동자들만 산업재해를 당하는 게 아니라 주민들, 특히 어린이들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전자산업이 옮겨간 지역 주민들에게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고, 그들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공유하기 시작했다.”

- 기업들로부터 어떤 변화를 이끌어 냈나.
“첫 번째 성과는 70년대 후반 미국에서 트라이클로로에틸렌(TCE) 사용을 금지하게 만든 것이다. 미국에서는 더 이상 TCE를 사용하지 않는다. 유기용제인 Glycol ethers(솔벤트의 일종)과 Chlorofluorocarbon(CfC's)의 사용도 금지됐다. 두 번째는 전자회사에서 배출되는 물질(가스나 유기용제 등)을 막아 주는 장치를 설치하도록 요구했다. 회사들이 이런 공간을 꼭 만들어야 한다는 법도 제정됐다.”

 

스미스씨가 활동한 단체들은 이후 미국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내셔널반도체(미국기업)와 대만 RCA의 직업병 암 발생사례<본지 3월5일자 10면 참조>를 접하게 된다. ICRT는 2002년 ‘첨단기술 산업의 지속가능성 전략을 위한 국제 토론회’를 열었다. 대만과 일본·말레이시아·태국 등 15개 국가 활동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전자산업의 각 단계에서 건강·환경·노동권에 미치는 영향을 염려하기에 단결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했다.
그는 "2008년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 노동재해 피해자 권리를 위한 네트워크’(ANROAV) 총회에서 처음으로 삼성반도체의 사례를 접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삼성의 사례가 전 세계 전자산업에서 일어나는 패턴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 미국 텍사스에도 삼성반도체 공장이 있다. 직업병 발생 사례를 들어본 적이 있나.
“잘 모른다. 다만 텍사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그 친구는 현지 노동자들도 만나고 있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한국의 상황을 친구에게 전해 줄 것이다. 미국의 삼성 노동자들은 한국의 삼성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른다. 미국 언론 중 한국의 상황을 조망하는 언론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기업이 어떤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 지역주민들에게 공개하는 내용의 법이 통과됐다. 텍사스에 있는 삼성도 웹사이트를 통해 이를 공개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 미국 전자산업에서 직업성 암으로 보상받은 사례가 있나.
“미국에서도 여전히 어렵다. 일을 하다 손을 다치는 경우처럼 명확한 사고는 보상규정이 정해져 있지만, 질병은 어떤 유해물질에 노출됐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보상을 받기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예컨대 탄광이나 의류산업에서는 직업병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규정돼 있지만 전자산업은 그렇지 않다. 여러 화학물질에 노출된 것을 산재로 인정하는 명확한 규정이 없어 싸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향후 10년 안에 법적으로 명확한 보상규정이 마련될 것이다. 아내가 IBM 노동자를 대변할 때 회사측으로부터 지난 30년간 3천여명이 사망한 산재 관련 사망자료를 입수했다. 역학조사를 하는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해 조사해 봤더니 독성화학물질을 많이 사용할수록 젊은 나이에 암 발병률이 더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IBM과 노동자 사이에 일종의 협상이 진행돼 보상은 이뤄졌지만 그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리고 민사소송을 제기했는데 배심원단에게 역학조사 관련 자료가 공개되지 않았다. 배심원들은 역학조사 결과를 모른 채 기업의 손을 들어줬다. 만약 배심원들이 역학조사 결과를 알았다면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을 것이다. 나중에 법정에서 역학조사 결과를 공개해도 좋다는 판정이 내려졌지만 이미 2년이 지난 후였다.”

- 국내에서는 삼성반도체 공장 인근 지역 주민들의 관심은 저조하다. 어떻게 관심을 끌어내야 하나.
“산호세(실리콘밸리 지역)에는 훌륭한 지역언론이 있었다. 이 언론사는 노동자 건강 문제뿐만 아니라 지하수 오염 문제도 계속 보도했고 결국 지역주민들이 알게 됐다. 우리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유인물을 나눠 주고 마을사람들을 모아 놓고 주민회의를 시작했다. 나중에는 방송국에서 마을 주민회의를 방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매우 우려스럽다. 주요 미디어에서 이런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지난 2일 AP에서 나와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를 인터뷰해 갔는데 방송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대전MBC에서는 취재를 중단했다. 한국에서는 삼성의 힘이 너무 막강하다. 미국에서는 삼성처럼 언론에 엄청난 광고비를 주는 기업들은 없다.”

인터뷰를 마친 테드 스미스씨는 “마지막으로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오기 직전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있는 한 방송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그 기자는 "모토로라 제품에 들어가는 칩을 만드는 공장의 상황을 취재하고 있다"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아이들 가운데 선천성 기형이 100건 이상 발견됐다"고 전했다. 이런 내용의 방송이 나간 후 유사한 사례가 있다는 제보가 쇄도했다고 한다. 스미스씨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도 한국에서는 이런 사례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며 “반도체공장 노동자 자녀들의 선천성 기형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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