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8일은 102주년을 맞는 ‘세계 여성의 날’이다. 최근 젊은 세대들은 이 날을 세상의 반쪽인 여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날로 여긴다고 한다. 발렌타이데이(2.14), 화이트데이(3.14), 삼삼데이(3.3, 삼겹살데이), 빼빼로 데이(11.11)라고 하며 기념일을 만드는 세태를 보면 그럴 수 있겠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세계 여성의 날이 제정된 배경을 보면 이런 세태가 안타깝기만 하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자본주의체제가 발전하면서 남자들의 액세서리 취급받으며 가사에 전념했던 여성들의 지위가 바뀌었다. 여성들도 노동현장에 뛰어들면서 일하는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다. 19세기 말, 태동기에 있던 자본주의체제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가혹한 노동조건과 저임금을 감수해야 했다. 방직·직물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은 1857년 거리로 나와 항의에 나섰고, 마침내 1859년에는 여성들이 최초로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1908년 2월28일 미국 여성 노동자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노동시간 단축·임금인상·투표권을 요구했다. 노동자국제조직인 제2인터내셔널 노동여성회의는 여성의 날(1911년 3월19)일을 제정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이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이어 1913년 3월8일로 기념일이 바뀐 후로는 세계 각국에서 매년 행사를 진행했다. 오랫동안 군사정권 치하에서 시민권이 제약됐던 한국에선 1985년에 처음 공개 행사를 시작한 후로 1987년 민주화항쟁을 거치면서 매년 행사를 개최했다.

20세기 들어 ‘딸들아 일어서라’고 외치던 여성의 처지는 달라졌다.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보장받고, 사회진출은 날로 확대됐다. 하지만 여성들의 실질적 평등권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었다. 여성 총리와 대통령 그리고 전문경영인(CEO)까지 배출됐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 여성들에게 제공된 것은 저임금 일자리이며, 가사와 육아에 짓눌려 있던 현실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회·경제적으로 보면 한국 여성들의 경제활동참가율은 2010년 1월 현재 47.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61.3%)에 미달된다.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 10명 중 7명은 비정규직이고, 대다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는 100만원 미만의 저임금을 받는다. 30대 여성 고용률은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데 육아기 여성을 차별하는 기업 풍토 탓이다.

그래서 정부가 들고 나온 것이 이른바 ‘퍼플잡(유연근무제)’이다. 이를테면 육아가 가능하도록 정형화된 근무시간을 짧게 하거나 집에서 근무하는 등 다양한 근무방식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결국 단시간 근로를 확대하자는 취지다. 정부는 시간당 임금과 4대 보험과 같은 복리후생을 현 정규직 수준으로 보장하는 상용직 단시간 근로를 확대하겠다는 계획이다.

아이도 키우면서 일도 할 수 있다고 하니 퍼플잡에 대해 솔깃하는 이들이 많다. 정작 노동계와 여성단체들은 퍼플잡에 대해 “황당한 발상”이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가뜩이나 여성에겐 양질의 일자리보다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밖에 제공되지 않는데 정부가 이를 더욱 양성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풀타임과 파트타임 간 동등대우 법률이 적용되고, 임금과 근로조건의 차별이 금지돼 있는 유럽의 경우 퍼플잡이 가능하지만 이런 풍토가 미흡한 우리의 경우 무리라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경우 육아휴직 사용조차 회사측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이다. 여성이 육아휴직 후 복귀하더라도 직장 내에서 홀대받기 일쑤다. 경제위기에 일하는 엄마(워킹맘)는 해고 일순위로 전락한다.

물론 일부 공공부문과 금융권에서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와 재택근무가 시행되고 있지만 이제 걸음마단계다. 비용부담과 인력활용의 어려움을 우려하는 우리 기업 풍토를 고려하면 정부가 계획하는 단시간 일자리가 늘지 의문이다. 단시간 일자리가 늘어나더라도 여성의 경력과 전공을 살리기보다 보조(주변)업무로 배치될 것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이런 현실을 고려한다면 여성 노동계가 퍼플잡을 반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진정 정부가 일하는 엄마를 응원하려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부터 제대로 쓸 수 있는 기업풍토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업주의 거부나 인사상 불이익 탓에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쓰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처지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의 대다수가 비정규직인 만큼 퍼플잡보다는 양질의 풀타임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부부가 평등하게 아이를 양육할 수 있고, 워킹맘도 직장 내에서 차별받지 않는 세상에선 여성의 날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젊은 세대처럼 여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날이 여성의 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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