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을 다하겠습니다. 시민생활복지과 민혜숙입니다."
7년차 의료급여관리사 민혜숙(44)씨의 오전 업무는 여느 사무직 공무원들과 다를 바 없다. 민씨는 수북한 공문철과 서류더미 속에 앉아 의학영어로 쓰여진 초진 차트 등을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방문간호사에서 메신저를 거쳐 형사가 됐다가 다시 행정업무로 돌아오는 등 멀티플레이어로 활동했다.

<매일노동뉴스>는 지난달 26일 전주시 완산구청에서 일하는 의료급여관리사 민씨를 만났다. 의료급여관리사는 질병을 앓는 저소득층 의료수급권자와의 상담을 통해 의료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하게 유도하고, 이를 통해 수급권자의 건강 향상과 의료급여 재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지난 2003년부터 시행됐는데, 실제 수급자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의료급여 재정을 절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보건복지가족부에 따르면 현재 약 460여명의 의료급여관리사가 전국 지자체에서 일하고 있다. 이들은 1~2년씩 계약을 맺고, 각 지자체의 상황에 따라 무기계약 전환 여부가 결정된다. 의료급여관리사들은 전문적 의학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임상경험이 있는 간호사들로 자격을 제한하고 있다. 주로 사례관리사업·의료급여일수 연장승인, 선택병원 업무·의료급여 중복청구 및 부적정한 장기입원자 조사 등의 업무를 한다.



수급자 보호와 규제의 딜레마

완산구에는 약 1만7천271여명의 의료수급권자가 있다. 민씨를 포함한 의료급여관리사가 3명 있는데, 한 명당 5천여명씩 맡고 있는 셈이다. 복지부는 사례관리사업에 대해 1인당 340여명(1년)씩 목표치를 할당하고, 그 결과를 순위로 매겨 지자체에 통보한다. 민씨는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 사례이지만, 대부분의 의료급여관리사가 기간제 노동자 신분인 것을 감안하면 실적에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모든 것이 체계가 갖춰진 병원 업무에 비하면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어요. 그 흔한 공문양식조차 없어 전부 다 새롭게 만들고, 생소한 행정 전산 업무를 익히는 데만 1년 정도가 걸린 것 같아요. 처음엔 3교대에 따른 나이트 근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살 것 같았는데.(웃음)"

민씨는 전북대병원 등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중 지인의 소개로 2004년부터 의료급여관리사 업무를 시작했다. 많은 간호사들이 육아기에 접어들면 3교대 근무 등으로 인해 육아사직을 강요받는다. 민씨와 함께 일하는 명선(37)씨와 은경(39)씨도 육아를 병행하기 위해 병원근무 대신 의료급여관리사를 선택했다. 실제로 의료급여관리사의 평균 연령은 육아에 신경 쓸 나이인 30대 초·중반이다. 공무원과 같은 주 5일 근무와 규칙적인 출퇴근 탓에 육아를 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업무는 당장 수술과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대상입니다. 하지만 의료급여관리 대상자는 꾸준한 관리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식이요법이나 운동 등 생활의 변화 없이 무조건 병원을 많이 다닌다고 아픈 게 나아지는 질환이 아닌 거죠."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올바른 의학정보를 통해 의료수급자를 보호해야 하지만, 잘못된 의료내용에 대해서는 규제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수익을 올리려는 병원 의사를 상대로도 싸워야 한다. 그럴 경우 의료급여관리사는 수급자와 병원 모두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된다.
"의료 쇼핑을 하시는 분들이 악의를 갖고 그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학정보가 없고, 돈도 없다 보니 처음에는 아파도 참아요. 그러다 보면 합병증이 생기고 결국 만성질환으로 갑니다. 약 효과가 단시일 내에 나타나지도 않아요.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병원 쇼핑을 하게 되고, 약물 과다복용의 부작용으로 위와 간이 나빠집니다. 심하면 무슨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어지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작은 관심이 삶의 질을 바꾼다"


이 같은 약물 오남용을 막기 위해 민씨는 환자에게 건강을 상담해 주는 방문 간호사 역할을 하고, 다른 복지 기관과 수급자를 연계해 주는 메신저 역할도 한다. 점심을 먹고 숨을 돌리고 나니 세 차례의 상담업무가 대기 중이다. 핵심 업무인 의료급여 사례관리를 위한 가정방문, 상해외인 조사를 위한 병원방문, 의료비 합의 상담 등이 예정돼 있다.

한정된 시간에 더 많은 상담을 하기 위해 의료급여관리사에게 필요한 자질 중 하나는 운전실력이다. 의료수급자 주소 하나만 들고 자가용으로 해당 지자체 곳곳을 부지런히 누벼야 하기 때문이다. 이십여 분을 달려 완산구 효자동에 위치한 낡은 주공아파트단지에 도착했다. 의료급여 사례관리 대상자 집으로 들어가 보니 난방이 안 돼 외부 온도와 내부 온도가 똑같다. 전기장판에 의지해 몸을 녹이고 있는 여든의 노모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ㅈ아무개(44)씨가 민씨를 반겼다.
 
사례관리업무 대상자인 ㅈ씨는 30여년간 정신질환 등으로 약을 복용했고, 최근에는 가려움증과 장에 대한 약을 복용하고 있는 중이다. 사례관리업무는 의료급여 과다이용 수급권자를 대상으로 의료내역 등을 분석해 건강상담과 함께 올바른 의료이용을 하도록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민씨에 따르면 ㅈ씨는 약물 과다복용 등으로 과민성 장 증후군을 앓고 있다. 일상적인 거동도 어려웠다.
"야가 요즘엔 하루 종일 잠만 자다가 저녁에 일어나 하루치 약을 한꺼번에 먹기만 혀요. 배고푸냐고 물어도 대답도 않고, 계속 일어나질 못해요. 예배드리러 오는 교인이나 선생님이 집에 오는 날에는 어떻게 아는지 그런 날은 또 일어나구요."
민씨를 상대로 건강상담을 청하는 노모의 눈에 눈물이 비쳤지만, 아들을 보고는 이내 사라졌다.

"우리 OO씨, 약마다 한 번에 먹는 용량이 있는데 세 번에 먹을 약을 한 번에 다 먹으니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거예요. 좋아하는 컴퓨터도 못하고 우찌할까요?"
"그나마 야가 선생님 온다는 전화를 받고 오늘 깨어나서 이렇게 일어났네요. 그래도 요즘은 소변을 이불에 싸지 않아 참말로 고마워요."
"어머님께서 힘들더라도 아드님의 잠자는 시간을 정확히 기록해야 합니다. 다음에 병원에 갈때 의사 선생님하고 상담을 해 보세요."

건강상담가가 됐다가 때로는 딸처럼 노모와 한참 말동무를 하고 있는데 ㅈ씨가 더듬더듬 말문을 열었다.
"약을 안 먹으면 경기를 일으킬까 봐 무서워서 약을 먹어요. 불안해서요. 변비도 걸리고 설사도 하고 그래요."
"하루에 식사 세 번 하기.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움직이기. 밥 먹고 30분씩 깨어 있자고 저랑 약속 할 수 있어요?"
"기억이 안 나요. 요즘은."
"그럼 제가 구청에 가서 까먹지 말라고 편지를 보낼게요."

민씨는 40여분간의 건강상담을 마치고, 노모의 오랜 배웅을 받으며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수급권자 중에는 가정·신체·정신 등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마음을 열고 자신의 환부를 드러내고 상담을 하게 하려면 신뢰감 있는 말솜씨가 필요하다.
"첫 방문을 갔을 때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어요. 한 시간 반 동안 한 할머니가 울면서 얘기하는 걸 듣기만 했어요. 정작 제 말은 못하고 다음 방문도 연기했죠. 업무 특성상 단번에 성과를 내는 게 쉽지 않아요. 하지만 복지부가 요구한 실적을 채워야 하니까, 오래 관리하지는 못해요."

실적과 인정 사이에서 정답을 찾지 못할 때 민씨는 힘이 빠진다. 지자체에 연계할 복지기관 등이 없을 경우에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냥 기다려 줘요. 수급자의 눈높이에 맞춰 목표를 제기하고 얘기를 잘 들어주는 게 중요해요. 그것만으로도 치료되는 사람들이 많아요. 병원 쇼핑을 하는 이유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수급자 입장에서는 병원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유일한 곳일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작은 관심을 우리 사회가 보여 주면 수급자들의 삶의 질이 달라지고 세상이 밝아질 수 있어요."

민씨의 상담 철학이다. 이번엔 완주군 평화동에 위치한 한양병원을 방문했다. 의료급여 상해외인 조사다. 고의에 의한 자해 등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거나 법 규정을 위반해 발생할 경우 지급된 의료급여 비용을 환수하기 위한 업무다. 민씨는 지붕에서 떨어졌다는 담당 환자의 진술서를 받고, 초진 진료 차트와 비교해 사실이 아닐 경우 환수 등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자필 서명을 받았다.


책임만 있고 권한 없는 의료급여관리사

4시간 만의 출장이 끝나고 구청으로 돌아오니 이번엔 의료비 상담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한 가해자가 의료수급자인 피해자를 폭행했는데, 전치 7주가 나와 형사고발 위기에 처하자 이에 대한 의료비 상담을 요청해 온 것이다. 민씨는 경찰의 사건경위서와 의학영어가 적힌 병원 진술서, 근로복지공단 서류 등을 검토한 뒤 합리적인 의료비 납부방법을 제시해 줬다.

"이럴 땐 구체적인 조사를 통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형사가 된 기분이에요. 해가 갈수록 막중한 책임은 부과되는데 의료급여관리사의 신분이 대개 기간제이다 보니 책임에 걸맞는 권한이 없어요. 아쉬운 부분이지요."

마지막으로 방문한 내용을 토대로 전산시스템에 입력하는 행정업무가 시작됐다. 수급자에 대한 행정업무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국내 사회통합복지망 전산서비스를 이용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정규직 공무원 신분이 아니다 보니 열람 접근이 제한돼 있다. 완산구의 경우 지자체의 승인을 얻어 열람할 수 있지만, 다른 지자체에서는 다른 공무원의 아이디를 빌려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책임과 역할은 부여되는데 권한은 주어지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공무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분에 대한 불안감 없이 맘 편히 일할 수 있게 최소한 별도 직군이라도 생겼으면 좋겠어요. 신분은 불안한데 책임은 무겁고, 보수도 일반 병원보다 적어요. 경력이 쌓여도 처우나 월급 등에서 달라지는 것도 없고. 새로운 비전을 찾아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 같은 현실에 민씨도 가끔 불안해진다고 한다. 흔들리는 민씨를 붙잡는 것은 작은 관심과 정확한 의료정보만으로도 누군가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보람이다. 수면제 중독에 빠졌던 중년 여성이 상담으로 활기를 되찾은 사례, 고맙다며 생고기를 두 손에 꼭 쥐어 준 할머니 얘기를 전하는 민씨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말로만 듣던 수급자분들을 직접 만나면서 사회의 이면을 새롭게 배워요. 아주 사소한 작은 관심과 의료정보만으로도 의료수급자의 삶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밝게 변해 가는 것을 볼 때 오히려 저희들이 더 많은 걸 느끼고 함께 성장하는 것 같아요. 올해는 보건교육사 자격증을 따 사회복지에 대한 전문지식도 갖출 생각입니다.”


"일할 때는 보이는데, 교육 혜택 등 권리찾기에서는 투명인간이죠."
6년차 의료급여관리사 ㄱ아무개(36)씨는 서울의 한 자치구에서 기간제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ㄱ씨의 보수는 기존에 일하던 대학병원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그는 "급여는 줄었는데 업무 강도는 세 배 가량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행정 전산시스템 처리업무와 방문사례관리 업무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상황에 따라 사회복지과 업무까지 해야 한다. ㄱ씨는 "의료급여관리사 업무 외에 다른 업무도 해야 한다"고 털어놓았다.
"한 사무실에서 공무원과 같이 일하기 때문에 기간제 신분인 우리가 사회복지 기타업무를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 보면 정작 핵심 사업인 사례관리 상담은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많아요. 주말에 출근해 일을 해야 할 만큼 행정업무 비중이 높은 게 현실이죠."
전국여성노조(위원장 박남희)에 따르면 전국 460여명의 의료급여관리사 중 70%가량이 ㄱ씨 같은 기간제 노동자다. 이들의 월급은 지난해 기준으로 평균 154만원. 경력이나 초과근무에 대한 별도 수당은 없다. 반면 간호사 면허증을 소지하고, 의료기관 임상경력자로 비슷한 일을 하는 건강보험공단 건강관리사들의 임금은 월 251만원이다.
무기계약을 피하기 위해 단기계약 후 일정기간을 쉬고 재입사하는 편법도 적지 않다. 이직률은 50%에 달한다. 비정규직으로 신분이 불안한 데다, 일은 고되고 보수는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여성노조는 “보건복지가족부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전국의 의료급여관리사들이 절감한 의료급여예산은 790억원이 넘는다"며 "복지부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판단해 의료급여관리사의 인원을 계속 늘리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처우개선 노력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의료급여관리사에 대한 업무 지시는 복지부가 하고, 인력관리는 지자체가 맡는 이중구조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때문에 이들의 처우는 각 지자체의 형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노조는 "의료급여 사례관리사업에 들어가는 예산은 국비 80%, 지방비 20%(서울 50%)로 사실상 정부가 하는 사업"이라며 "복지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료급여관리사가 2년마다 옮겨 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수급권자들과 신뢰감 속에서 건강관리를 할 수 있을까요. 의료급여관리사의 업무는 복지부도 인정한 만큼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의료지식이 없으면 대체도 불가능해요. 지금 상태라면 수급자와 지자체 모두 피해를 볼 수밖에 없어요."
이직을 고민 중인 ㄱ씨의 하소연이다. 김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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