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금융)시스템을 개혁하고자 하는 결심은 개혁에 저항하는 기업(금융기관)들이 낡은 관행으로 복귀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강화됐다.
중소기업에 대출을 늘릴 수 없고, 신용카드 수수료를 낮출 수 없고, 구제금융 자금을 상환할 수 없다고 강변하는 그들이 기록적인 이윤을 남기는 것을 봤을 때 더욱 굳어졌다. 금융기관의 무책임이 개혁을 필요하게 만들고 있다.”(오바마 미국 대통령 2010년 1월21일 연설 중)
 
금융위기 진원지에서 온 메시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대형은행의 과도한 위험투자와 대형화를 규제하는 ‘볼커 룰(Volker Rule)’을 제안했다. 볼커 룰은 미국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의장인 폴 볼커의 이름을 딴 것이다. 볼커 룰의 핵심은 “상업은행만이라도 은행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상업은행의 자기계정 거래와 사무펀드·헤지펀드 등 상업은행의 투기행위를 금지하겠다는 것이다. 자기계정 거래는 고객의 자금이 아닌 금융기관이 자체 조달한 자금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주식·채권·파생상품 등을 거래하는 행위를 말한다.

은행은 업무에 따라 크게 상업은행·투자은행·자산관리로 구분된다. 이 중 상업은행은 은행 본연의 임무인 고객 예금으로 중소기업 등에 자금을 빌려 주는 금융중개 기능을 주로 담당한다. 그런데 미국의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경계는 지난 30년 동안 모호해졌다. 조원희 금융경제연구소 소장은 “지난 30년간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가 득세하면서 각국의 은행들은 지급결제와 예금유치·대출이라는 금융기관 본연의 신성한 임무는 뒷전으로 돌리고 돈벌이를 일삼았다”고 비판했다.
 

‘대마불사 ’금융개혁
 
‘덩치가 큰 말은 죽지 않는다’는 대마불사(too big to fail). 대마불사는 금융기관 대형화를 언급할 때 자주 나오는 말로, 덩치가 큰 금융기관일수록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형 금융기관이 파산 위기에 빠질 때마다 미국 정부는 ‘구제금융이냐 경제위기냐’는 선택을 강요받았다. 폴슨 전 미 재무부장관은 미국 하원의원 정부개혁위원회 ‘AIG청문회’에서 “AIG가 파산했다면 금융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되고 실업률은 대공황 시기인 25% 수준까지 올라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이스너 현 미 재무부장관도 “심각한 금융위기에 직면한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선택만이 남았다”며 “수십억달러의 공적자금을 투입해 AIG를 구제할 것인가, 아니면 AIG를 파산시키고 경제 전체에 재앙적인 손실의 초래를 받아들일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대마불사의 신화는 한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수합병설이 끊이지 않는 우리은행의 한 관계자는 “은행 경영진은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키워 국내를 넘어선 글로벌 플레이어가 돼야 한다는 믿음을 마치 역사적인 사명감처럼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작 지진이 난 곳에서는 지진복구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최근 한국의 금융당국은 마치 ‘금융위기라는 지진은 우리와는 상관없다’는 투의 말을 쏟아 냈다.

역주행하는 ‘불도저’, 한국금융
 
곽승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3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위기 이후 한국 금융산업의 재도약을 위한 미래 비전’ 국제세미나 개회사에서 “한국의 금융은 초등학생 수준이며 미국처럼 대학생 수준의 학생이 사고를 쳐서 고등학생 수준으로 규제하려는 것을 보고 따라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한국금융연구원·자본시장연구원·보험연구원 등 대표적인 연구기관들도 8일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금융선진화를 위한 비전 및 정책과제 심포지엄’에서 미국이 벗어나려는 대형화·겸업화를 가속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형화 규제는 오바마 금융개혁안의 핵심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국의 금융만 역주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여경훈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연구원은 “미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의 규제완화에도 불구하고 금융과 산업 간 장벽은 유지하고 있었다”며 “한국은 지난해 금산분리 완화를 통해 금융과 산업의 장벽도 허물어 버렸다”고 우려했다.

한국금융연구원 등 3개 연구기관은 지난달 발표한 ‘금융 선진화를 위한 비전 및 정책과제’에서 향후 국내 은행산업을 1~2개의 ‘글로벌 지향형 대형은행’, 3~4개의 ‘국내시장 중심의 중형은행’, 다수의 ‘지역은행’ 그룹으로 재편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외환위기 악몽, 재현되나
 
연구기관들은 “단기적으로 국내은행 간 합병 등을 통해 아시아의 대표적인 우량은행을 탄생시킨 뒤 국제적인 영업을 통해 중장기적으로 세계적인 글로벌 은행으로 성장하는 전략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금융기관 간 인수합병은 은행 자산 대비 고용자수의 감소를 불러온다.
줄어든 자리도 비정규직으로 채워진다. 금융노조가 2006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다른 은행에 합병된 은행 직원의 절반 이상이 퇴출당했다. KB국민은행에 합병된 7개 은행 직원들의 ‘생존율’은 45%에 불과했다. 2001~2004년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합친 직원수는 6.11% 증가하는 데 그쳤지만 같은 기간 비정규직은 26.59%로 크게 늘었다. 외환위기에 이어 글로벌 금융위기로, 또다시 금융 산업구조 개편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금융권 노동시장 지형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회사? 금융기관? 두 글자 속에 숨은 담론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5월 국무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금융기관’이라는 용어를 ‘금융회사’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금융기관이라는 말이 적합한 용어냐”고 반문하면서 “금융이 정부 소유였을 때 금융기관이라고 해야 맞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어 “금융기관이라는 용어는 관치금융 느낌이 난다”며 “금융회사 등으로 용어를 변경하는 것을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이후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 등이 낸 보도자료에서 ‘금융기관’이라는 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금융기관은 “예금 등에 의해 자금을 조달하고 이를 기업 또는 개인에게 대부하거나 증권투자 등을 하는 기관의 총칭”이다. 반면 금융회사는 “소비재 및 용역의 구매를 위해 신용을 제공하는 전문 금융기관”을 뜻한다.
금융기관과 금융회사라는 말에는 관치금융·업무범위에 따른 구분 말고도 ‘금융의 공공성’이라는 담론이 숨어 있다. 한 금융권 전문가는 “금융기관을 모두 금융회사로 불러야 한다는 대통령의 말에서 은행이 공공성이 아니라 수익만을 추구하는 회사가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오재현 기자



“한국의 금융산업이 초등학생이고 중학생이 막 되려고 하는데, 대학생인 미국의 금융이 사고를 쳐서 고등학생 수준으로 내려가려는 상황이라서 우리와 상관없다는 것은 현실을 오도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조원희(54·사진)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소장은 지난 18일 서울 중구 금융경제연구소에서 <매일노동뉴스>와 만나 오마바 미 행정부의 금융개혁안에 대한 한국 금융당국자들의 목소리에 대해 이같이 반박했다.
조 소장은 “금융당국은 영미식 금융시스템을 유일한 발전방향으로 보는 단선적인 관점부터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오바마 금융개혁안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오바마 대통령은 이번 개혁안으로 상업은행이 금융중개기능을 소홀히 하는 ‘탈중개화’에 제동을 걸려고 하고 있다. 금융기관 본연의 기능을 회복하려는 측면에서 파격적이다. 상업은행의 사모펀드·헤지펀드·자기계정 거래 규제는 은행이 더 이상 투기꾼으로 활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은행은 국가가 지급을 보장한다는 것을 이용해 손쉽게 자기 돈벌이에 나섰다.
금융위기는 이런 돈벌이가 국민경제를 취약하게 만들고 실업률 증가 등 국민에게 고통을 안긴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물론 비판론도 있다.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업무 경계선이 애매하고 이미 탈중개화된 금융환경에서 상업은행이 본연의 기능만을 유지할 수 있는가라는 견해다. 유럽의 유니버셜 뱅킹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국제공조가 어렵고, 투자은행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는 것도 지적된다. 하지만 오비마의 금융개혁안 자체는 상업은행 본연의 기능을 되살리자는 데 큰 의의가 있다.”
 
- 한국 금융당국 일각에서는 미국을 따라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영미식 금융시스템이 매우 우수하고 선진적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 얘기다. 미국 금융시스템을 보면 ‘대학생’이 아니다. 미국 금융시스템은 금융위기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권위가 손상됐다. 미국 자신조차 버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굳이 ‘초등학생론’이 적합한 부문을 찾는다면 복지다. 최근 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했듯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멕시코 다음으로 형편없는 ‘복지 초등학생’이므로 유럽이라는 ‘복지 대학생’을 따라가야 한다.”
 
- 최근 금융당국은 대형화·겸업화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이명박 정부정책의 핵심은 신자유주의의 급진적인 추진이다. 미국 금융시스템의 권위가 상실되든, 전 세계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동안 추진했던 자립산업화·대형화·겸업화를 끌고 나가겠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금융환경이 금융위기로 나빠지니까 모든 금융기관이 아닌 한두 개의 금융기관을 대형화하겠다고 정책을 약간 수정했다. 한두 개의 대형은행 육성 방침은 반드시 은행 간 과당경쟁을 불러올 것이다. 국내 은행의 규모가 비슷비슷한 상황에서 은행들은 대형화 흐름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사활을 걸 것이다.”
 
- 글로벌 대형은행 육성이 정부가 발표한 금융선진화의 주요 내용인데.
무엇보다 금융이 금융 자체의 논리에 따라 굴러가고 팽창하는 ‘과잉금융화’를 경계해야 한다. 위험이 팽배한 사회에서 모든 위험이 상품화되면 과잉금융화가 초래된다. 모든 위험이 투기의 대상이 되거나 위험회피를 위한 상품이 난무한다. 과잉금융화는 사람들을 금융의 노예로 만든다. 쇠사슬로 묶여 있어야만 노예인가. 월급 받아 카드빚 갚고, 대출받아서 집 산 사람은 대출이자 갚느라 바쁘고, 학자금을 융자받은 사람도 10~20년에 걸쳐 빚을 갚는다. 이번 기회에 정부는 영미식 금융시스템을 유일한 발전이라고 보는 단선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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