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에 보장된 육아휴직도 언감생심인데, 여성의 경력을 위해 대체인력 등의 추가비용까지 대 가며 고용안정도 유지해야 하는 퍼플잡을 기업이 순순히 도입할까. 기회를 빌미로 저질의 단시간 일자리만 양산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오히려 퍼플잡을 활용해 모성권에 대한 사회적 권리를 확산시키고, 장시간 노동 문화를 바꾸는 계기로 삼아야지. 근본대책은 아니지만 다른 대안이 없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잖아.”

지난 17일 서울 종로의 한 식당. 30대 워킹맘들의 저녁 수다에 퍼플잡이 도마 위에 올랐다.  질 낮은 단시간 일자리가 고착화될 것이라는 우려와 양질의 단시간 근로를 확대하는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 교차했다.

퍼플잡이 화두다. 퍼플잡이란 정형화된 근무제도에서 탈피해 탄력적 근무를 선택하는 유연근무제도를 말한다. 빨강과 파랑이 섞인 보라색을 뜻하는 퍼플(purple)은 일과 가정의 조화를 상징하는 ‘평등’을 의미한다. 정부는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유연근무제를 활용해 민간부문까지 확산시킬 계획이다. 시간당 임금과 4대보험과 같은 복리후생을 현 정규직 수준으로 보장해 주는 상용직 단시간근로를 확대하겠다는 방침이다. 단시간근로와 시차출퇴근제는 선진국에서도 적극 활용되고 있다.<표 참조>
 


핵심은 일·가정 양립을 돕는 단시간 근로제다. 청년이나 노년층의 취업난 해소에도 기여할 수 있지만 주 대상은 여성이다. 정부는 유연근무를 통해 일과 생활의 조화를 지원하고, 2014년까지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을 60%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2010년 1월 현재 47.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61.3%보다 낮다. 특히 30대 여성의 고용률은 OECD 국가 중 꼴찌다.
여성부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는 한국IBM(재택근무·출퇴근시차제)·유한킴벌리(4조2교대)·KB국민은행(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야간전담반)·청주의료원(업무 집중시간대 근무)·부국산업(고령자 중심 단시간근무)·삼성테스코(단시간근무제) 등에서 퍼플잡을 시행 중이다.
 
비용↑ 생산성↓ 민간기업 ‘난색’
 
KB국민은행은 은행권에서 최초로 1주일에 20시간 근무하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를 지난해 7월부터 시행하고 있다.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를 사용하는 이들의 급여는 정상근무 대비 57% 수준이다. 인사 평가는 전일제 근무직원과 다르게 별도로 평가한다. 그 외 복지후생·성과급 등은 전일제 직원과 동일하다. 현재 3명(2명 무기계약직·1명 정규직)의 신청자가 활용하고 있다.

“답답했던 숨통이 트였죠. 온종일 아이 맡길 곳은 없고 경력도 유지하고 싶던 저에게는 단비와도 같았습니다.”
류강숙(39) KB국민은행 전산개발 프로그래머는 지난해 9월부터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를 이용해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4시간만 근무하고 있다. 정규직인 류씨는 일하는 시간이 줄어든 만큼 임금이 감소한 것 외에 모든 조건이 다른 정규직과 동일하다. 류씨는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육아휴직을 하고 온종일 아이와 있다 보니 고립감에 답답했고 업무 특성상 시시각각 변하는 흐름을 따라가지 못할까 불안했다”며 “육아휴직 급여가 줄자 기존 급여 수준에 맞춰진 생활규모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류씨는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 덕분에 세 가지 고민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주변에서는 진짜로 눈치 보지 않고 말 그대로 4시간 근무한 뒤 5시에 퇴근하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기업들이 제도를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지 여부가 퍼플잡 성공의 관건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단시간 근로에 대한 사용자들의 입장은 어떨까. 기업들은 비용 증가와 생산성 감소 때문에 우려하는 분위기다.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회장 문강분)가 대기업 다수를 자문하는 W노무법인이 10여개 회원사의 단시간근로 사례를 분석한 결과 단시간근로에 대해 정확이 아는 경우가 드물었다. 대기업이 단시간근로를 활용하는 경우는 대형유통업과 같은 특수한 환경의 저임금 단순업무에 한정돼 있었다.

이들은 단시간근로 시행시 애로점에 대해 △낮은 업무 집중도 △유기적 인력운영이 어려운 점 △구인에 따르는 어려움 △4대보험 가입 등에 따른 노무비용 및 간접인건비 증대 등을 꼽았다. 문강분 회장은 “단시간근로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반에 걸친 단시간근로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개선하고 일·가정 양립을 위한 삶의 패러다임 전환을 지원하는 정책적 고민이 수반돼야 한다”고 말했다. 문 회장은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소득감소에도 불구하고 단시간근로를 선택하려면 고임금을 받아야 한다”며 “고임금 지불능력이 있는 대기업이 양질의 단시간근로 모델을 주도할 있다”고 제언했다.
 
단시간의 양적 확대일까, 양질의 단시간 확대일까
 
사실 재택근무 등 유사한 관련제도가 마련된 지는 오래됐다. 그러나 제도 실행을 담보할 규제나 공공보육 시설 등의 사회적 인프라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지난해 6월 취업사이트 스카우트가 직장인 846명을 대상으로 ‘육아휴직 확대 실시 이후 실효성’을 조사한 결과 95.7%가 ‘육아휴직을 못쓰고 있다’고 응답했다. 육아휴직을 신청하지 못하는 이유는 ‘승진 및 인사상 불이익 때문’이 40%로 가장 높았다. 그 뒤로 ‘제도를 잘 몰라서(14.4%)’·‘사업주의 거부로 인해(12.2%)’·‘동료에게 미안하고 소외될 것이 두려워서(8.9%)’·‘연봉 협상시 불리해서(4.4%)’ 등의 순이었다.

정부의 인식도 민간기업에 퍼플잡을 ‘권고’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정부는 지난 2년 동안 출산·보육여성의 경력단절 현상을 보완하기 위해 육아기 단시간근로제의 자율적인 도입을 각 기업에 권고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제도가 시행된 이래 활용한 사람은 단 4명에 그쳤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일·가정 양립 및 여성고용촉진위원회는 지난해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근로시간단축 청구권을 담은 법 개정을 논의했지만, 인사시스템 재설계 등에 부담을 가진 경영계의 반대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유연근무의 민간부문 도입에 대해 “사실상 실효성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단시간근로제 도입으로 인한 금전적 비용 외에도 업무 연속성 단절, 팀워크와 생산성 저하 등으로 많은 간접비용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며 “임금의 시간 비례가 가능하려면 먼저 직무 중심의 임금체계 인사관리가 선행돼야 하는데 국내 기업의 현실은 동떨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특히 퍼플잡의 고용안정성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 그는 정규직에 준하는 고용환경은 민간 기업에게 너무 과하고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추후 새로운 직군을 신설한다면 모를까 기존 근무자들을 대상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이는 고용안정보다는 탄력이 우선시 돼 질 낮은 단시간 일자리가 양산될 것이라는 노동계의 우려와 맥을 같이 한다. 공무원들의 경우 필요에 따라 단시간으로 전환해도 국가공무원법상 계속 공무원의 신분을 유지하며 풀타임으로 전환될 수 있지만, 민간기업은 사정이 다르다.

단시간이라는 명목으로 일단 기간제로 뽑았다가 상용직화하지 않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기존의 정규직 일자리를 단시간 일자리로 쪼개 임금이나 복지를 비정규직 수준에 맞춘다면 일과 생활의 조화는 공염불일 뿐이다.

차별 없는 비율보상체계 부터
 
이 같은 지적에 대해 정부는 지나친 우려라고 일축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선진국에는 단시간 근로가 일반화돼 있고, 이에 따른 생산성 향상도 증명됐다”며 “장시간 노동 문화를 바꾸고 질 낮은 일자리가 되지 않기 위해 범정부 차원에서 노사정과 함께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전일제 1명이 하던 업무를 시간제 2명이 나눠 수행하는 직무공유제를 확대하고, 인원 기준으로 이뤄지던 공공기관 정원관리 요건을 시간 단위로 바꾸기로 했다. 이를 민간으로 확대하기 위해 가족친화 인증기업 등을 중심으로 사업장 50곳을 선별해 상용직 단시간근로자 신규고용을 유도하고, 소요비용 일부와 인사관리 컨설팅 등을 지원한다. 예컨대 기업이 상용직으로 단시간근로자를 채용하면 임금의 50%를 한 달 40만원 한도에서 1년간 지원한다. 국민건강보험과 국민연금의 직장가입자 제외조건도 기존 80시간 미만에서 고용보험과 같이 60시간 미만 근로자로 완화한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이 제도를 통해 양질의 단시간 일자리를 창출하고, 여성의 경제활동을 높여 주목을 받았다. 네덜란드는 지난 93년 동등처우법(Equal Treatment Act)을 통해 단시간 비정규직과 관련해 근로시간에 비례한 동등대우의 원칙을 수립했다. 유연한  노사관계와 단체교섭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등처우법이 통과되기 전부터 네덜란드는 단시간근로자에 대한 동등 처우를 명시한 단체협약을 체결해 왔다.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네덜란드의 사례는 다양한 유연근무제와 함께 비율보상체제를 확립해 임금과 근로조건상의 차별을 철폐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함을 시사한다”며 “이를 통해 자기개발 등을 이유로 근로시간을 줄이고자 하는 남성근로자의 참여를 자연스럽게 유도해 여성화된 단시간 일자리의 특성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는 애초에 여성의 경력이 단절되지 않도록 사회가 육아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육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경력단절은 일어나지 않아요. 육아가 여전히 여성만의 몫으로 남아 있는 한 이번 제도도 기회를 가장한 썩은 동아줄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육아휴직이 곧 육아사직인 현실을 감안하면 썩은 동아줄일지언정 다른 대안이 없잖아요.”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닌다는 3년차 워킹맘의 하소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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