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42) 민주노총 위원장은 깔끔하다. 옷맵시가 그렇고, 업무 방식도 마찬가지다. 김 위원장이 최근 얻은 별명은 ‘댄디보이’. ‘멋쟁이 소년’이라는 뜻이다. 그가 가진 젊고 참신한 이미지와 단정한 옷차림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별명이다.
그는 정제되지 않은 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준비는 철저하게, 회의는 짧게, 실천은 꼼꼼하게…. 그가 조직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7일 서울 영등포 민주노총 위원장실에서 김 위원장을 만났다. ‘자신의 성격을 한마디로 표현해 달라’는 물음에 그는 “글쎄, 글쎄…”만을 반복하다 “어떤 것 같냐”고 되물었다. 기자가 “인터뷰를 해 보니 깔끔한 스타일인 것 같다”고 말하자 손사래까지 쳐 가며 “그렇지는 않다”고 고개를 젓는다. 자신은 “깔끔 떤다”는 말을 무척 싫어한다면서.‘깔끔’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모양이나 생김새 따위가 아담하고 매끈하다’와 ‘솜씨가 야물고 알뜰하다’는 두 가지 의미가 나왔다. 그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던 삶의 여정과 인간관계 맺음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광주항쟁·망월동이 내 인생 바꿔”

하숙집이 문제였다. 그곳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이 문제였다. 문제라 표현해도, 그는 마음 깊숙이 ‘고맙다’는 느낌을 간직하고 있었다.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뜨였던 공간, 민주노총 위원장이라는 현재의 자신을 있게 만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학생운동을 했다. 그리고 철도노동자로 살아온 지 어느덧 18년. 이제는 그냥 노동자 운동권이다. 80년대 대학생치고 ‘데모 무용담’ 하나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 잘난 경력도 아니고 짐이 되는 것도 아니다. 집권 여당 높으신 분들마저 한때 자신도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자랑하지 않는가. 민주노총은 노동운동을 하는 조직이니, 위원장은 당연히 운동권일 것이다.

87년 부산 동아대 신입생 김영훈은 하숙집에서 광주항쟁 비디오를 봤다. 그것도 ‘독일 무삭제판’으로. 그해 하숙집에 같이 살던 친구와 광주 망월동에 갔다. 외져 황량한 곳에 무덤만 가득했다. 김 위원장은 “그것이 내 인생을 바꾼 계기였다”고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걸까’, 질문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 일 없었던 듯 조용했고, 그는 그 모든 것이 왠지 모르게 서러웠다.

데모를 하려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도 그랬다. 신입생 시절 처음 가입했던 동아리는 ‘운동하는 동아리’, 야구부였다. 68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 위원장은 부산 출신답게 롯데 자이언트의 열광적인 팬이다. 지금도 민주노총 위원장 다음으로 ‘야구 감독’을 훌륭한 직업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광주 망월동 이후에도 1학년 때는 데모를 열심히 안 했다는 김 위원장. 그랬던 그가 단과풍물패 연합회장과 단과대 학생회장을 거쳐, 92년 3월 또 다른 운동을 펼치기 위해 철도에 입사했다.
 
최연소 지부장·최연소 위원장
 
94년 6월23일 새벽. 철도기관사들이 농성을 벌이던 서울 용산구 용산역 구내 동차사무소에 경찰병력 20개 중대 1천여명이 들이닥쳤다. 입사 2년차인 철도기관사 김영훈도 철도노조 부산기관차승무지부 교육선전차장으로 농성에 함께하고 있었다. 94년 노동계와 한국 사회를 뒤흔든 전국기관사협의회(전기협)와 전국지하철협의회(전지협) 공동파업 사건이다.

김 위원장은 “그때도 지금과 비슷했다”고 말했다. 전기협과 전지협은 당초 6월27일 파업을 예고했다. 그때까지는 협상의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경찰력을 먼저 투입했다. 경찰력 투입 다음날인 24일 전기협은 물론 서울·부산지하철노조 등 전지협도 자연스레 파업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 11월 철도노조가 파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철도공사는 노사 간 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단체협약 파기선언을 했다. 노조는 파업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건은 모두 김 위원장의 인생을 바꿔 놓은 전환점이었다. 94년 전기협 파업은 ‘노조 민주화 없이는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각인시켰고, 지난해 파업으로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결심을 굳혔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이 자신의 당선과 관련해 “MB정권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말했던 이유다. 그는 94년 전기협 파업 이후 2001년 민주파가 노조 위원장에 당선되기까지 7년 동안 노조 민주화 운동을 끈질기게 이어 갔다. 당시 전기협·전지협 공동파업으로 철도노조 부산기관차승무지부에서만 11명이 해고됐고, 4명이 구속됐다. 입사 2년차에, 지부 차장이라는 낮은 직책 덕분에 김 위원장은 다행히 해고를 피할 수 있었다. 파업 후 폐쇄된 지부 사무실을 몰래 열고 들어가 청소하고 구속된 선배들을 옥바라지했다. 파업 후유증에, 노조라면 기피하던 조합원들도 하나 둘 만났다.

김 위원장은 “극심한 탄압으로 조합원들이 위축되기는 했지만 파업이 끝난 이후 노조를 민주화시켜야 한다는 열망은 가득했다”며 “지난해 파업 후에도 진보정당 정치후원금 사업에 이전에 비해 2배가 넘는 조합원이 참여하는 등 정치의식이 고양됐다”고 말했다.
그는 2000년 32세 나이로 최연소 지부장(철도노조 부산지부장)에 당선됐고, 같은해 철도노조 민주화추진위원회 정책부장을 맡았다.
 
52% 지지율 … “48% 잊지 않겠다”
 
우연찮게 지지율이 똑같았다. 2004년 철도노조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던 김 위원장은 52%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올해 2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얻은 지지율도 똑같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48%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털어놓았다. 복수의 칼날이 아니다. 조합원에 대한 무한책임 의식이자, 하나된 조직을 만들고 싶다는 지도자로서의 욕심이다.

철도노조 위원장 시절 그는 세 번의 파업을 준비했다. 두 번을 접었고, 한 번은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은 노동자들의 최후의 무기다. 파업을 하기도 어렵지만, 준비했다가 물러서기도 쉽지 않다.
김 위원장에게도 파업을 철회했던 경험이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선 것은 아니다. 2005년 1월1일 철도의 공사 전환을 앞두고 이뤄진 2004년 12월 특별단체교섭. 김 위원장은 12월3일 새벽 3시, 파업 돌입 1시간을 앞두고 철도 사용자와 극적으로 특단협에 합의했다.

파업 철회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김 위원장은 협약이 부결되면 위원장직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위원장 불신임은 규약상 조합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한다. 김 위원장은 당시 “협약 찬성률이 50%를 넘지 않으면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결과는 찬성률 54%였다.
김 위원장은 위원장으로 남았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했던 부위원장들과 실장급 간부 전원을 떠나보내야 했다. 김 위원장은 “결과에 스스로 책임지던 간부들의 자세는 노조 민주화 운동을 통해 53년간의 어용노조를 이겨 낸 철도노조의 전통”이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불신임 투표가 끝난 뒤 현장을 순회했다. 욕도 많이 들었다. 답답하고 불안했던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렇게 3개월을 보냈다. 어느 날 차량지부에서 간담회를 하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나이 지긋한 한 조합원이 “왜 이제야 왔냐. 더 일찍 와서 이야기를 했어야지”라며 그를 나무랐다. 김 위원장은 “‘아, 조합원의 마음이 이런 것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소통을 못했다고 했다. 파업을 못하면 왜 못하는지, 특단협에 합의했으면 왜 그랬는지. 김 위원장은 “조합원과 만나 이야기하고 논의하고 소통하는 과정이 부족했다”고 아쉬워했다.

조합원에 대한 무한책임. 소통과 신뢰구축. 위원장을 반대하거나 욕하는 조합원들. 김 위원장은 “잘못은 조합원에게 있는 게 아니라 그들과 소통하고 함께하지 못한 위원장에게 있다”고 말했다. 여전히 52% 지지밖에 받지 못하는 위원장이라는 그는 “해를 넘길수록 그 지지율을 높이는 것이 위원장으로서의 사명이고, 그 과정이 ‘승리하는 민주노총’을 만드는 초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합원·국민과 소통하는 민주노총
 
김 위원장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위원장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을 ‘하숙생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물 흐르듯 살겠다는 것이다.  그는 “조합원들 옆에 항상 있겠지만, 너무 가까우면 정 때문에 판단이 흐려진다”며 “조합원은 물론이고 사무총국 간부들도 위원장이 잘못할 경우에는 쓴소리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특히 “두루뭉술 일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고 밝혔다. 보고나 회의가 길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원칙이다. 사전 준비가 불충분하면 회의가 길어지고, 회의가 길어지면 말만 늘어나고 실천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회의를 하기 전에 철저히 준비하고 점검해야 일을 제대로 진행할 수 있다”며 “민주노총에 그런 업무 스타일을 정착시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미래를 향해 세상을 바꿔 나가는 운동권이지만, 현실 앞에 바로서야 한다고 강조하는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근본을 모르는 사람은 근본을 바꿀 수 없고, 현실을 모르는 자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잘 모르면서 바꿀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김 위원장은 “운동은 근본을 바꾸고, 현실을 바꾸는 것”이라며 “역사를 통해 근본을 배우고, 우리가 처한 현실에 발 디디면서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것만이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는 길이자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라며 “민주노총은 조합원·국민과 소통하고 함께하면서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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