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주 강도논쟁으로 뜨거웠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사이의 설전으로 전개됐다. 먼저 이명박 대통령은 “잘되는 집안은 강도가 오면 싸우다가도 멈추고 강도를 물리치고 다시 싸운다. 강도가 왔는데도 너 죽고 나 죽자 하면 둘 다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일 잘하는 사람을 밀고 싶어 한다”고 말했고, 이에 박근혜 전 대표는 “집안에 있는 한 사람이 마음이 변해 강도로 돌변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일 잘하는 사람에 대한 판단은 국민이 하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세종시 수정을 둘러싼 현재의 권력과 미래의 권력 사이의 논쟁이라면서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이 논쟁에서 강도는 누구인가. 이 대통령에게는 민주당 등 세종시 원안 주장자들이고, 박 전 대표에게는 이 대통령을 포함한 세종시 수정론자들일 것이다. 그런데 위 강도논쟁은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독창적으로 창안해 설파(?)함으로써 논쟁된 것은 아니다. 어떤 조직에서든 현안에 대한 해결책을 논의할 때 조직 내부 분쟁에서 이와 같은 논쟁이 흔히 전개된다.

2. 지난 1월 민주노총 위원장 등 임원선거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노총 위기상황에서 이 위기의 극복방안을 둘러싸고 정파를 떠나 하나로 뭉쳐 국민과 함께 승리하는 싸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민주노총 내부 쇄신을 주장하기도 했다. 강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논쟁의 본질은 강도논쟁과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오늘 노동운동에서 강도는 누구인가. 자본과 권력인가, 아니면 자본과 권력에 붙어 타락하거나 혹은 무능력한 노동권력인가. 과연 누구 주장이 옳은 것인가. 이명박인가, 박근혜인가. 혹은 민주당 등 노동에 우호적이라는 민주적인 권력과 자본은 현시기 노동운동에서 강도가 아니고 한나라당 등 노동에 적대적인 권력과 자본이야말로 강도인가. 벌써 20여년이 넘은 노동운동 논쟁이다. 비판적 지지와 그 비판에 관한 논쟁이 그것이고, 최근에도 홍세화의 ‘첼로를 켜는 노회찬’이라고 표현한 칼럼을 통해 도발적 문제제기로 다시금 논란이 되고 있다. 이상에서 보면 강도논쟁은 자기와 타자, 혹 동지와 적을 가르는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를 결집해 적에 맞서 싸우기 위한 논쟁이다. 어떠한 조직이든 외부와 자신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면 그 조직은 독립적 실체로 존속하기 어렵다. 따라서 외부와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없다. 그래서 강도논쟁은 조직의 존립에 관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도 마찬가지다. 노동이 자본과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게 된다면 노동운동은 존립 자체가 문제된다.

3. 오늘 노동운동의 위기는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 노동운동은 자본과의 경계를 분명히 설정한 데서 출발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출범 당시부터 자본과 노동의 경계가 분명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의 지배에 대항하는 노동운동은 가장 주요한 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시기 노동기본권 등 노동의 계급적 권리가 국가 법질서로 확보되는 등 중요한 노동운동의 전진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이 경계가 분명했던 것은 아니다. 자본에 의해 왜곡된 경계가 주된 것으로 제기되고 그로 인해 노동운동은 침체되기도 했다. 시장 확보를 내세우며 노동과 자본을 모두 포섭한 ‘국민’으로 다른 국민국가와 경계를 설정하면서 국가 간의 경쟁이 노동운동을 압도했다. 그 압도가 운동의 괴멸을 가져온 극단이 파시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다른 국가와의 경계 설정을 통해 지금까지 자본주의 국가는 존립해 왔다. 오늘 자본은 국가를 넘어선 이동이 보장되고 있지만 여전히 국가의 경계는 분명하고 자본은 국가 법질서를 넘어설 수 없다. 국가 내에서 자본의 지배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진실이다. 노동운동은 자본주의 국가 법질서 내에 포섭돼 즉 자본의 지배하에서 노동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운동으로서 존재한다. 스웨덴·핀란드·독일·네덜란드는 노동의 지위를 확보했지만 우리는 이러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노동의 지위가 확보된 나라에서 법질서는 노동의 권리를 위해서는 보호돼야 할 것이기 때문에 노동은 국가 법질서에 참여하고 협력한다. 노동관계법은 노동의 권리가 보장되고, 그 해석은 우호적이고 협력적이다. 그러나 노동이 배제된 우리의 경우 그 해석은 우호적·협력적일 수 없다. 우호적이고 협력적인 다른 나라의 해석을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적용할 경우 그 해석은 노동의 권리보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배제적인 법질서를 옹호하는 결과를 낳는다. 다른 국가와의 경계는 노동이 설정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시장 확보를 위한 자본의 논리로서 주장된 것이며 자본의 이해를 위한 국가권력이 설정한 경계이다. 정치·경제·문화·교육 등 국가의 모든 영역에서 이 경계가 생산되고 확대된다. 이 경계에 압도돼 노동의 경계는 일부 국가에서는 부차적으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오늘 자본 권력에 의해 설정된 강도논쟁이 노동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경제성장·선진화·세계화와 국가경쟁력 강화, 경제위기 극복 등이 노동자의 의식을 지배한다. 그래서 자본은 철저히 계급투표를 하는 데 비해 우리 노동자들은 계급배반투표를 하거나 자신을 대변하는 정당을 위한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국민국가의 경계 설정을 통해 자본은 노동에 승리했다. 자본과 노동의 경계는 그 경계에 묻혀 가려졌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이제 자본에 맞서 노동의 계급적 권리를 획득하려고 하지 않는다.

4. 우리의 경우 노동의 계급적 권리 보장을 위한 노동관계법 개정은 언제나 노동의 패배로 귀결되고 말았다. 올해 1월1일 새벽 전격적으로 단행된 노조법 개정만이 아니다. 2006년에도 그랬고, 97년도 그랬다. 노동자대투쟁 이후에 개정된 옛 노동쟁의조정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53년 3월 제정된 이후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으로 통합 제정된 오늘에 이르기까지 노동의 계급적 권리보장이라는 면에서 볼 때 노동은 패배하고 자본은 승리했다. 올해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신입사원들이 지난 설날 가족들과 무슨 대화를 하고 그들은 무슨 덕담을 받았는가.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는 모두 개인적인 입신과 부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신입사원이 아닌 일반 노동자라고 다르지 않다. 동계올림픽 중계방송을 보며 국가대표 선수들을 응원하고, 한일 축구경기 방송을 보고 일본 골대에 골을 넣은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박수를 쳐댔다. 누구도 신입사원이 된 가족에게 회사에 노조가 있는지, 노조에 가입했는지를 묻지 않았고 노동자들이 함께 노동자의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떡국을 먹으면서 국가경제를 말하고 술자리에서 경기회복 전망에 대해 말하면서 말다툼까지 했지만 자신의 임금이 얼마이고 올해 얼마가 오를지에 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강도는 다른 나라이며 그래서 다른 나라 선수들을 누르고 그 나라보다 앞서야 한다. 우리 노동자에게 자본은 강도가 아니고 그래서 노동자들이 노조로 자본에 맞서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해야 할 이유가 없다. 지금 노동자는 자신의 계급적 이해에 무심하다. 노동운동을 괴멸시킨 국가의 폭력적 지배, 즉 파쇼국가체제가 아님에도 노동운동은 지리멸렬하다. 국가권력의 폭력적 지배 때문이 아니다. 노동운동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법적으로 얼마든지 보장돼 있다. 국가보안법을 말하지 마라. 지금 노동운동에 대해 국가를 넘어설 무언가를 논의하는 수준에서 그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를 구분하고 그래서 중소영세,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처지와 다르다고 그들을 탓하는 것으로 지금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문제는 경계이고 그 경계는 노동과 자본의 경계이지 노동 내부에서의 경계가 아니다. 노동 내부의 경계 설정은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 경계를 넘어설 수 없다. 기존의 국가 법질서는 자본과 노동의 경계 설정을 피할 수 없었고, 그래서 노동의 권리와 노동기본권 보장에 관한 헌법규정과 노동법을 제정했다. 만약 이 경계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노동과 자본의 경계를 전제로 하는 노동조합·노동법·노동운동은 소멸할 것이다. 자본에 의한 노동의 지배가 사라진 세계에서라면 경계의 소멸은 노동을 위한 진보의 종말이 아니겠지만 그렇지 않은 세계에서 단지 노동과 자본의 경계만 소멸돼 버리는 것이라면 노동을 위한 진보의 종말이다. 그것은 과거 파시즘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국가의 개별적 노동 보호입법은 존재하지만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노동의 계급적 권리로서 노동기본권은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다. 이상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강도논쟁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분명해졌다. 이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분명히 세우기 위해 강도가 무엇인가를 자신들의 조직·지지자·국민에게 던짐으로써 자신에게 유리한 경계를 설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을 통해 자신이 승리하고자 했다. 현재 위기에서 노동운동의 극복 방안도 마찬가지이다. 운동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경계 내 조직을 하나의 이해로 묶어 경계 밖의 적에 맞서라. 노동자의 진정한 이해를 위해 이렇게 한다면 노동자들은 일 잘하는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지지하고 함께할 것이다. 이때야 노동의 계급적 권리인 노동기본권 행사의 보장을 위한 노동운동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 이 나라에서 노동기본권 행사가 법률에서 원칙적으로 보장돼 있다고 당신이 이해하고 있다면, 그래서 예외적으로 제한하고 있는 법조항을 개정하면 된다고 보고 그러한 개정투쟁에 노동운동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지금 노동운동에서 올바른 경계에 서 있지 못하다. 자본과 권력이 설정한 경계에 혼란스럽게 서 있을 뿐이다. 이 같은 혼란은 교수의 노동법교과서와 판사의 판결을 통해 당신에게 심어졌다. 경계를 분명히 하고 노동기본권 행사를 보장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되짚어 보라. 그리고 당신의 머리를 비우고 새롭게 채워 넣는데 필자의 글이 도움이 되면 좋겠다. 적어도 필자는 당신 집안에 든 사람이 강도인지 아닌지 알려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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