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으로부터 용역대금 6억여원을 받은 후 잠적한 이아무개 대표. 노동자 280여명의 임금·퇴직금 5억7천여만원은 안중에도 없었다. 회사마저 문 닫고 도주했다가 자수했지만 용역대금은 이미 써 버린 지 오래. 전 직원의 밥줄을 개인 빚 갚는 데 유용한 것이다.

고의로 회사를 폐업·신설해 온 부동산기획업체 박아무개 사장. 이름뿐인 대리사장을 내세우고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왔다. 박 사장은 현재 운영하는 업체 외에 대리사장을 내세운 업체의 퇴직노동자 200여명의 임금·퇴직금 6억여원을 지불하지 않았다.

건설회사의 실질적 사주인 강아무개 대표는 미성년자인 아들 명의로 주식을 보유하면서 회사의 전권을 휘둘러 왔다. 아들까지 동원하면서 경영권 방어에 골몰하면서도 회사 직원 450여명의 체불임금 122억여원은 외면했다.

회사 대표가 잠적했더라도 국내에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OO교통 서아무개 대표는 고의로 회사를 부도내고 외국으로 도주했다. 노동자 254명의 임금 19억여원을 떼먹고 고의로 도주한 것이다. 다행히 관계당국은 일시 귀국한 서 대표를 체포했다.
임금·퇴직금을 떼먹어 구속영장이 신청된 사업주들의 행태가 천태만상이다. 악성 체불사업주 탓에 노동자들은 설 연휴가 반갑지 않다. 설 연휴가 내일부터 시작되지만 고향에 내려갈 여비와 제수비용조차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금체불은 지난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지난해 신고된 임금체불액만 1조3천438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무려 40.6%가 늘었다. 체불로 고통받는 노동자만 30만명이 넘는다. 임금체불액이 1조원을 넘긴 것은 관련통계를 집계한 이래 처음이다. 이 통계는 노동부에 신고된 것만 집계해 신고되지 않은 체불액을 포함하면 더 늘어난다. 사업장 규모별로 보면 5인 이상 30인 이하 사업장이 가장 많았고, 산업별로는 제조업·건설업 순으로 많았다.

사상 최대의 임금체불은 경제위기의 여파 탓이다. 지난 2004년 이후 1인 이상 전 사업장을 대상으로 임금체불 통계가 작성되기 시작된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임금채불이 사상 최대로 늘어난 것은 구조적인 요인과 당국의 미온적 대처 탓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건설업의 경우 제조업 다음으로 체불금액이 많다. 건설노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체불금액의 절반 가량이 불법 하도급으로 인해 발생한다. 건설산업기본법에는 발주처·원청·하청(전문건설업체) 이상의 도급만 합법으로 명시돼 있음에도 건설현장의 불법 하도급은 끊이지 않고 있다. 불법 재하도급자가 잠적하거나 부도를 내게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에게만 전가된다. 건설업 체불의 구조적 요인은 바로 불법 하도급인 셈이다. 불법 하도급을 근절하지 않고선 건설업의 체불금액은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때문에 관계당국은 불법 하도급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

관계당국이 체불사업장 단속을 강화하고, 엄정수사를 한다고 하지만 '솜방망이에 그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실제 지난 1월까지 체불액(1조1천3백여원) 중 62%만 지도해결·사법처리 했을 뿐 38%는 여전히 처리 중이다. 특히 사법처리 가운데 구속영장이 청구된 사업주는 미미하다. 이러다 보니 일부 사업주들이 상습적으로 체불하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는 것이다.

악성 체불사업주에 대한 구속수사를 늘리겠다는 관계당국의 공언은 그야말로 ‘말’에 그쳐선 안 된다. 차제에 체불사업주 명단을 공개하는 방안도 추진해 볼 만하다. 물론 현행법에는 명단 공개가 금지돼 있다. 그러나 체불 근절을 위해 본보기 차원에서 명단 공개는 필요하다. 노동부가 체불사업주 명단 공개를 추진한다고 하니 기대를 걸어 본다. 노동부는 빠른 시일 안에 관계법령 개정에 나서 체불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눈물을 닦아 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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