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어둠에 휩싸인 공장 안. 촛불을 켜고 홀로 앉아 책을 읽는 노동자의 모습은 어째 좀 생경하다. 생전 책 한 번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다는 이병철(43)씨. 그는 요즘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고 있다. 책 읽기에 서툰 이씨는 장르를 따지지 않는다. 전날 ‘세계사’ 교과서를 읽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헤집더니, 오늘은 ‘어머니의 힘’이라는 처세서에 필이 꽂혔다. 이런 그를 두고 동료들은 ‘우울증 1호’, ‘사법고시생’이라며 놀려 댄다. 그러든지 말든지 그는 책 속에 자신을 맡길 뿐이다.

이 노동자를 독서삼매경의 세계로 인도한 이는 누구일까. 이씨를 해고한 사장일까. 아니면 그의 직장을 하루아침에 문 닫게 한 프랑스계 다국적기업 발레오일까. 이씨는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라고 점잔을 빼더니 이내 “책 내용은 절반도 눈에 안 들어오고, 빨리 공장이 정상화돼야 할텐데…. 뭐 그런 생각을 합니다”라고 쑥스러워했다.


황당한 노동자, 더 황당한 회사

지난 5일 천안시 입장면 기로리 111-7번지 발레오공조코리아 공장. 노동자들이 조를 짜 경비를 서는 ‘초소’를 지나니 투쟁구호가 잔뜩 적힌 헝겊조각이 여기저기 나부낀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낮이었기에 망정이지, 으슥한 밤 이곳을 지나면 반드시 귀신과 마주치리라.

인간이 사는 이승에서 귀신보다 무서운 것은 먹고사는 문제다. 그러니 ‘해고 통지’는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자동차 에어컨에 들어가는 냉매압축기(콤퓨레셔)를 제작하는 발레오공조코리아는 지난해 10월26일 전 직원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다음날 퀵서비스를 이용해 직원들에게 ‘11월30일부로 근로관계가 해지된다’고 통보했다. 공장은 폐쇄됐다. 부동산과 기계설비, 각종 채무 등에 대한 청산절차가 시작됐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해고 통보를 받고도 반신반의했죠. 피부로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여느날처럼 출근했는데 집에 가라니…. 사회적으로 추방당했다는 느낌에 혼란스럽습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을 주는 사회가 아니었구나, 앞으로 열심히 산들 잘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해 11월1일부터 공장을 지키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염동희(41)씨의 말이다.

노조와 일체 협의도 없었다. 회사측은 별안간에 공장 문을 닫았고, 당일 노조에 전화로 사실을 통보했을 뿐이다. 그 뒤 단 한 차례의 교섭도 진행된 바 없다. 대신 회사측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입장을 전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집으로 편지를 보내 ‘공장 점거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가라. 그러지 않으면 법적 책임을 묻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식이다. 때론 ‘청산을 번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검토대상도 아니다. 허무한 꿈을 기대하면서 방황해선 안 된다’며 노동자들이 현실을 직시하기를 촉구하기도 했다.




캔들 레스토랑

‘몽매’한 노동자 96명이 지키고 있는 발레오공조코리아 천안공장은 종종 전기가 끊긴다. 공장 내 전기시설을 점검해 주는 업체가 따로 있는데, 공장이 폐쇄되자 점검을 나오지 않는다. 이날도 전기가 나갔다. 먼지를 뒤집어쓰기 시작한 공장의 기계들은 시꺼먼 어둠 속에 몸을 숨긴다. 하필 점심시간에 이 모양이다.
공장 한구석에 테이블을 붙여 만든 간이식당에 양초를 두 줄로 세우고 불을 켜니 누군가 말한다. “이야~ 레스토랑 같고 좋네.”
이곳 노동자들은 ‘밥차’를 불러 일용할 양식을 해결하고 있다. 한 끼에 1천400원짜리. 밥과 국, 밑반찬 두세 가지가 나온다. 김치는 집에서 가져다 먹고, 어떤 땐 지역 농민회에서 쌀을 지원해 주기도 한다.
어둠이 눈에 익으니 공장 안 기계들의 윤곽이 드러난다. 87년 대한공조(주) 시절부터 회사와 생사를 함께 해온 기계들이다.<현장분석 기사 참조> 이 업체는 한 번도 온전히 한국기업이었던 적이 없다. 한-일 합작회사로 출발한 이 업체는 일본 젝셀사에 넘어갔다가 다시 프랑스 발레오사로 넘어가더니, 급기야 문을 닫았다.

지난 23년간 이 업체는 자동차 에어컨에 들어가는 콤퓨레셔를 제작해 왔다. 로터리(회전식) 타입 콤퓨레셔를 제작하는 F/K라인은 전 세계 발레오 공장 중 천안공장이 유일하게 보유한 것이다. 지난해 10월26일 공장 가동이 중단되면서 F/K라인도 멈춰섰다. 어찌나 황망하게 기계를 껐는지, 컨베이어벨트에 만들다 만 콤퓨레셔들이 걸려있다.

피스톤(왕복운동) 타입 콤퓨레셔를 제작하는 K/C라인은 공장이 폐쇄되기 한 달 전인 지난해 9월 가동이 중단됐다. K/C라인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주로 미국의 GM사로 수출돼 왔다. 지난해 GM사태를 거치며 납품 물량이 급격히 줄었다. 일본·태국·중국의 발레오 공장에서도 동일 제품이 만들어진다. 발레오그룹 차원에서 보면 천안공장의 문을 닫아도 물량 조달에 차질이 거의 없다. 이러니 하루아침에 문을 닫아 버린 것 아닌가.

이 같은 사정을 잘 아는 노동자들은 “청산이 아닌 매각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살길을 열어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발레오가 매각을 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이미 몇몇 업체가 콤퓨레셔 시장을 분할하고 있는 상황에서, 매각은 곧 ‘경쟁사로의 편입’을 뜻하기 때문이다.



비누세트 사건

공장 정문. 공장을 바라보고 왼쪽엔 노동자들의 ‘초소’가 오른쪽엔 ‘경비실’이 각각 회사를 지키고 있다. 초소 앞 드럼통난로를 가운데 두고 노동자들이 둘러앉았다. 난로 안에 넣어둔 고구마 익는 냄새가 그럴싸했다.
초국적기업인 발레오를 대표하는 색깔은 흰색과 초록색이다. 친환경 경영을 상징하는 글로벌업체의 자부심을 상징한다. 그래서 발레오공조코리아 노동자들의 작업복은 흰색이다. 옷깃과 소매엔 산뜻한 녹색 띠를 둘렀다.

“김치공장도 아니고, 작업복 색깔이 이게 뭡니까.” 이날로 꼭 입사 20년째라는 이대우(45)씨의 말이다. 이씨는 “톨레랑스의 나라 프랑스에서 온 발레오는 한국의 노동자에게만큼을 일체의 관용을 보이지 않았다”며 “이미 체결된 단체협약도 번번이 무시했다”고 주장했다. ‘비누세트 사건’이 대표적이다.
“설이나 추석이 되면 회사는 비누세트를 하나씩 줬어요. 20년 내내 비누세트였죠. 그런데 발레오가 주인이 되면서 그마저도 안 주는 거예요. 5만명이 넘는 종사자를 거느리는 다국적기업이 이렇게 치졸해도 되나요?”
노동자들은 결국 비누세트를 받았다. 이렇게.
“잔업을 거부했죠. 잔업 거부하면 노동자 입장에서 수당 손해가 만만찮은데. 그래도 주던 걸 안 주겠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그런데 더 어이없는 건 석 달이 지나서야 비누세트를 주더라고요.”
올해 설에는 그 비누세트도 못 받게 됐다. 공장을 지키고 있는 노동자들의 마음은 무겁다. 집에 갈까, 가지 말까.
이씨는 “친척들이 ‘먹고살 궁리를 찾아야지 언제까지 거기(공장) 그러고 있을 거냐’고 전화를 걸어온다”며 “엊그제 실업급여 교육받으러 고용지원센터에 갔었는데 비로소 내 처지가 실감나더라”고 말했다.
이기만(37)씨도 설이 다가오는 게 부담이다. 그는 “공장도 지켜야 하고. 가족이나 친척들한테 좋은 소리도 못들을 텐데…”라며 “설 전에 미리 가서 집사람하고 아이들 얼굴이나 보고 올 생각”이라고 털어놨다.


절망의 공장을 희망의 공장으로

발레오공조코리아의 전체 임직원은 187명. 이 가운데 146명이 현장직이자 노조 조합원이다. 조합원 146명 가운데 50명이 희망퇴직으로 회사를 떠났고, 나머지 96명이 공장을 지키고 있다. 96명 중 절반 가량은 공장을 지키고, 나머지는 서울·경주·창원·대구 등에 있는 발레오공조코리아 관계사와 서울 프랑스대사관 앞에서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며 길거리로 내몰린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고 있다.

발레오공조 본사가 있는 일본에 한 차례, 발레오그룹 본사가 있는 프랑스에 두 차례 다녀왔다. 프랑스 원정투쟁을 거치며 ‘국제적 동지’도 생겼다. 프랑스노총(CGT)과 프랑스 발레오노조·프랑스 르노자동차노조 등이 한국에서 온 노동자들의 투쟁에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 원정투쟁에 직접 다녀온 이택호 금속노조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 지회장은 "공장과 공장, 노동자와 노동자가 직접 만날 때 비로소 국제 연대가 실현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전세를 빼 월세로 돌리는 한이 있더라도 원정투쟁을 계속할 것이고, 반드시 프랑스 본사와 담판을 지을 것"이라고 말했다.

발레오공조코리아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은 38세, 평균 근속연수는 15년이다. 천안공장은 이들에게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니면 군대를 제대하고 입사한 첫 직장이다. 꿈에서도 해고가 될 거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사실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재취업 고민을 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생각은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이 나이에, 해고자를 누가 써 주겠어요. 잘해야 어디 용역일이나 나가는 거지.” 이제 겨우 서른일곱인 이기만씨가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이다.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공장을 지키고 있는 노동자들. 이들은 이 절망의 공장에서 희망을 피워 낼 수 있을까.


세계 2위의 자동차 부품업체인 발레오는 전 세계 27개국에 121개의 공장과 61개의 연구개발센터, 9개의 유통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종사자수만 5만4천여명에 달한다.
발레오의 공조부문(콤퓨레셔 공장) 공장은 한국 외에도 일본·태국·체코·중국·멕시코(설립 중)에서 가동되고 있다. 이 가운데 일본·태국·중국공장에서 한국공장과 동일한 기종을 생산하고 있다. 물량의 이원화와 조절이 가능한 상황이다.
발레오그룹은 지난 2008년 말 5천명가량의 인원을 감축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의 발레오공조코리아도 여기에 포함됐다. 인건비 부담이 높은 일본이 아닌 한국이 구조조정 물망에 오른 배경은 무엇일까. 박상수 금속노조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 사무장은 “일본공장의 경우 별도 연구원을 운영 중이고, 멕시코 이민 3세를 대거 취업시켜 임금이 낮고 해고가 쉽다”며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전 직원이 정규직인 한국공장을 타깃으로 삼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지회에 따르면 발레오공조코리아의 최대 거래처인 르노삼성차에는 현재 일본과 중국에서 제작된 콤퓨레셔가 역수입돼 납품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천안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이미 방출돼 르노삼성차가 비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구은회 기자

발레오공조코리아는 지난 87년 한일 합작으로 설립된 대한공조(주)에서 출발했다. 일본의 젝셀사와 한국의 자본이 50대 50의 지분으로 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한국인 경영진 내부에 갈등이 발생했고, 94년 일본 젝셀사가 지분 100%를 보유하며 경영주가 됐다.
젝셀의 시대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젝셀은 경영난에 봉착하자 독일의 보쉬에 지분의 50%를 팔았다. 그 뒤 보쉬의 지분은 2003년 발레오로 팔려갔고, 발레오는 2005년 젝셀의 지분까지 완전히 인수하며 발레오공조코리아의 경영주가 됐다.
발레오가 기업을 인수하기 전 이 회사의 노사관계는 원만한 편이었다. 이택호 금속노조 발레오공조코리아 지회 지회장은 “한국과 일본이 같은 문화권이기 때문인지 노사 간 큰 마찰 없이 회사를 운영해 왔다”며 “그런데 프랑스 발레오가 회사를 완전히 인수한 2005년부터 노사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특히 임금·단체 협상을 벌일 때 프랑스기업의 특성이 두드러졌다. 회사측은 한국의 노사관계 관행을 무시하며 공세적으로 요구안을 제출했고, 기존 단체협약을 문제 삼았다. 단협 미이행을 둘러싼 노사갈등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발레오는 국내 운영을 접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조차 단 한 차례도 노조와 협의하지 않았다. 형식적인 노사교섭도 하지 않았다. 발레오공조 일본 본사 관계자가 노사 면담을 하겠다며 한국에 찾았다가, 면담장소인 노동부 대전지방노동청 천안지청 앞에 노동자들이 걸어 놓은 현수막 내용을 문제 삼아 그길로 되돌아간 어처구니없는 일도 발생했다. 현수막에는 영어로 “발레오! 같이 죽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룹 차원의 구조조정 방침과 회사측의 해고 통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공장 청산절차를 중단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할 수 일은 사실상 없어 보인다. 업체 매각이 경쟁사로의 편입을 의미하는 상황에서, 천안공장에 새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임원을 포함해 총 180여명이 집단해고됐지만, 조합원들은 "노동부 관계자가 단 한 번도 공장을 찾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지회는 국제 노동계와의 연대를 통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발레오의 공장 청산 과정이 ‘OECD 가이드라인’을 위반했다는 점을 들어 한국과 프랑스의 OECD 사무소에 발레오를 제소할 방침이다. OECD 가이드라인은 업체를 청산하려는 기업은 △노동자에 의견 개진 기회 제공 △자료 공개 등을 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택호 지회장은 “프랑스에 가 보니 기업을 매각할 때 노조와 협의해 업체를 선정하고, 기업 청산이 불가피할 경우 회사측이 금전적 보상 외에 재취업까지 책임지는 시스템”이라며 “외국계 기업의 ‘먹튀’ 논란이 빈번해지고 있는 이 때, 해당 기업 노동자들의 피해를 최소화 할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구은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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