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현장에서는 많은 화학물질이 쓰인다. 금속가공유를 비롯해 윤활유·페인트·희석제·금형이형제·용접봉에서 스프레이 같은 작은 캔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고, 수도 많다. 이들 제품은 성분에 따라 독성도 다르다. 석면이나 벤젠 등은 폐암(중피종 포함)이나 백혈병을 일으키는 발암성 물질이다. 스타이렌·이소시아네이트류 등은 천식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호흡기독성물질, 태국여성노동자에게 앉은뱅이병을 일으켜 사회문제가 됐던 노말헥산은 신경독성이 있다.

필자는 10여 년간 노동현장에서 작업환경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일을 했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대부분의 노동자는 화학물질뿐만 아니라 독성 여부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 예를 들어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찾아봐도 ‘영업비밀’이나 ‘독성자료 없음’이라고 적혀있는 경우가 적지 않고, 이러한 자료를 근거로 안전보건교육을 받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영업비밀’이나 ‘독성자료 없음’에 숨겨진 진실은 뭘까. 지난해 12월 미국의 환경단체인 EWG(Environmental Working Group)는 정부의 화학물질관리법규와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해 몇 가지 충격적인 결과를 내 놓았다. 예를 들어 과거 33년간 미국에서 생산된 신규화학물질 2만403종 중에서 기업이 ‘영업비밀(confidential business information)’을 이유로 정보를 공개하지 않은 물질이 1만3천596종이나 된다. 이는 전체의 3분의2가 넘는 것이며 영업비밀 딱지가 붙은 대량유통물질 151종 중에서 최소 10종 이상이 14세 미만의 아이들이 사용하는 제품에 사용됐다고 한다. 또한 기업에서 화학물질 성분과 독성을 공개하지 않아도 법적으로 규제가 어렵다. 기업의 로비활동으로 정부의 규제가 지속적으로 완화됐기 때문이다.

‘영업비밀’, ‘독성자료 없음’이라는 것을 이제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보가 은폐된다면 위험한 물질들에 대한 통제가 어려워지고, 불필요하게 노출될 수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만약 노동자가 발암물질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일을 한다면 불필요하게 노출될 가능성이 높을뿐더러, 암이 생겨도 산재 신청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기업의 정보은폐, 불합리한 정책과 제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유럽연합(EU)은 좋은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유럽연합은 기존 화학물질 관리정책의 부재와 위해성 자료의 부족 등으로 인한 환경오염과 건강피해 증가, 이에 따른 시민·노동자들의 거센 개혁요구에 직면하자 결국 시민과 노동자의 건강·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화학물질관리전략을 수립해 시행하고 있다. 핵심적인 원칙으로는 사전예방의 원칙, 물질대체의 원칙, 기업 책임의 원칙, 정보가 없으면 시장유통 금지의 원칙, 시민·노동자의 알권리 보장의 원칙을 꼽고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부와 기업은 안전보건·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폐쇄적이고, 느리며 비효율적이다. 결국 시민과 노동자들이 주도적으로 운동을 전개하고 개선을 요구할 때 사회는 변한다.

최근 민주노총 금속노조에서 올해 전 조직적으로 현장에서 발암물질을 찾아내고 추방하는 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발암물질로 인한 노동자 피해를 줄이는 목표와 더불어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활동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발암물질을 찾아서 사용금지와 대체물질을 요구하고, 암 환자를 찾아서 보상을 지원하고, 정부와 기업에게 정책과 제도개선을 요구해 나갈 것임을 밝히고 있다.
노동자들도 원칙을 세워 현장에서 실천하면 자신과 동료노동자 건강을 지킬 수 있다. 사회도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 정말 멋진 일이지 않은가. 이제 정보가 없으면 구매를 금지하고 현장사용은 금지하는 원칙을 세우자. 현장에서 확인된 발암물질은 금지하거나 대체물질로 바꿔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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