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의 쟁의행위는 조합원의 자주적인 의사로 결정된다. 물론 쟁의행위를 하려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야 하며, 주체·목적·방법·대상이 합목적적이어야 한다.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절이 있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노동조합의 쟁의행위 자체를 원천 차단하려 했다. 단체행동권은 헌법에 규정된 노동기본권이라는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노동관계법에 제3자 개입금지 규정이 있었지만 노동단체나 외부인이 개입하는 것만 처벌했다. 노사관계에 대한 국가기관의 조직적 개입은 처벌은커녕 공공연하게 인정됐다.

지난 99년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의 취중발언은 이런 정황을 실체로 드러나게 했다. 진 전 부장은 당시 점심식사 후 기자들과의 면담에서 “조폐공사 파업은 공기업 구조조정의 선례를 만들기 위해 공안당국이 유도한 것”이라고 폭탄발언을 했다. 조폐공사는 조폐창 조기 통폐합을 위해 옥천 조폐창을 직장폐쇄했고, 노조는 파업으로 맞섰으나 경찰의 진압으로 강제해산됐다. 수사 결과, 검찰은 강희복 전 조폐공사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검찰이 책임질 테니 구조조정을 강행하라”고 말한 진 전 부장의 단독범행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반면 강원일 특별검사는 “경영권의 위협을 느낀 강 전 사장이 파업을 유도했고, 두 사람이 협의한 사실은 없었다”며 검찰의 수사결과를 뒤집었다. 결국 서울지법은 진 전 부장의 노동조합법(제3자 개입금지) 위반 혐의만 인정했고, 강 전 사장과 진 전 부장의 업무방해와 직권남용은 혐의가 없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강 전 사장의 임금협상 불성실 교섭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가 인정됐다. 사법당국이 공안당국의 조직적 개입에 대해 무죄를 선고함에 따라 파업유도 사건은 숱한 의혹만 남긴 채 해프닝으로 끝났다.

11년 전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야4당 소속의원 94명이 지난 2일 ‘한국철도공사의 철도파업 유도 기획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요구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지난해 12월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의 폭로로 불거졌다. 철도공사 인사노무실이 작성한 ‘전국 노경담당팀장 회의자료’에 따르면 공사측은 단체협약 해지로 노조를 압박하고, 조기파업을 유도하는 계획을 세웠다. 노조의 파업을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정부정책 반대로 몰아 목적과 절차상 부당한 것으로 몰아가려 한 것이다. 실제 지난해 11월26일부터 12월8일까지 8일간 진행된 철도파업은 공사측의 의도대로 진행됐다.

야당의원과 노동계의 주장은 당시 정황을 고려하면 설득력이 있다. 종전과 달리 공사측은 노조보다 더 많은 단체협약 개정 요구안을 제시했고, 단협을 서둘러 해지했다. 노조의 파업이 예상됨에도 공사측이 단협을 해지하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 이런 정황은 구조조정을 강행하기 위해 공격적 직장폐쇄를 했던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 물론 두 사건은 차이가 있다. 11년 전에는 공안당국의 조직적 개입 여부가 사건의 핵심이었다면, 지금은 철도공사측의 파업유도 기획 여부다.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 수사는 진 전 부장과 강 전 사장의 진술에 의존했다면, 현재는 철도공사의 문건이 증거로 공개됐다. 여기에 정부기관들과 공사측의 연계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야4당 의원 대부분이 국정조사를 요구한 만큼 여당은 이에 응해야 한다. 의혹이 제기되고, 국민적 불신이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굳이 외면할 이유가 없다. 정부와 공사측이 떳떳하다면 국정조사를 통해 사실관계를 밝히면 될 일이다. 여당이 사실관계를 따져 보지도 않고, 국정조사 요구를 물리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공사측도 더 이상 철도노조를 벼랑으로 내몰아서는 안 된다. 지난해 12월 노조 파업 후 노조간부 154명 해고, 900명 직위해제, 단순파업 참가 조합원 1만3천명에 대한 징계절차 착수는 너무 지나치다. 게다가 징계위원회 참가와 소명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원에서 소송이 진행 중인 만큼 철도파업의 합법·불법 여부는 법원에서 가리면 될 일이다. 법원의 판결에 근거하지 않은 철도공사의 대량 징계는 되레 직권남용으로 규정될 수 있다. 이런 위험부담을 고려하면 공사측이 대량징계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공사측이 진정으로 안정된 노사관계를 원한다면 노조측의 교섭요구에 성실히 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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