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요즘 변호사님 칼럼(매일노동뉴스)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제 근기법이(이하 노동법)이 제정됐을 때인 50~60년대 열악한 노동 환경을 어느 정도는 벗어나지 않았나요? 그러나 님께서는 시종일관 노동과 자본의 대립구도로 그러한 시각에서…, 1900년 초 무지몽매한 시절의 노동자 혁명을 기다리시는 것은 아니시지요? 제가 보기에는 이제 노동자가 그렇게 약자 같지도 않고 일부 노동단체는 힘이 너무 넘쳐서 오히려 사용자가 위축돼 있는 것 같은데요. 양자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고요. 너무 일방적이시니까…. 좋은 글이라기보다 짜증스럽습니다. 미안합니다. 김기덕 변호사님….”

지난주 어느 독자분께서 매일노동뉴스에 게재된 제 글을 읽고 메일로 보내온 글입니다. 지난주 신입사원을 위한 노동법강좌1에 관한 글에서 신입사원들에게 당신들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노동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법을 해석하는 법률가라는 제가 그만 균형을 잃고 근로자에 편향된 일방적인 글을 게재했는가 봅니다. 그래서 위와 같이 독자님을 짜증나게 하고 말았습니다.
예. 분명 근로기준법 등 노동법이 제정됐던 1950년대의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지금은 ‘어느 정도’ 벗어났지요. 그런데도 노동과 자본의 대립구도로 일방적으로 노동편향의 글을 보니 좋은 글이 아니라고 위 독자분은 생각하셨던 것이지요. 이해가 갑니다. 어쨌든 저는 균형을 갖춘 독자분을 짜증스럽게 하고 말았습니다. 미안하게도. 그런데 그 독자분에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근로자인 당신들에게 저는 법률가로서 노동법을 말합니다. 노동법이 제정됐던 1950년대와 지금이 위 독자분과는 달리 제게는 아무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독자분은 제게 균형을 말씀했지만 저는 시종일관 사용자로부터 근로자인 당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을 말합니다. 노동과 자본의 대립구도로 그러한 시각에서 저는 그저 근로자의 권리보호를 위한 노동법을 말합니다. 왜 저는 그러한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노동법이 사용자와 근로자로 나뉘어 존재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노동법에서는 노동과 자본은 대립구도로 존재합니다. 기본법이라는 민법이 채권자와 채무자, 매도인과 매수인 등으로 그 사회적 지위나 신분과는 무관하게 무계급적으로 중립적으로 존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노동환경이 열악하던 1950년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지금도 여전히 사회는 사용자와 근로자로 나뉘어 존재합니다. 민법의 세계가 사용자이든 근로자이든 관계없이 대등한 당사자들이 법률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세계인데 비해 노동법의 세계는 대등하지 않은 사용자와 근로자의 근로관계에 관한, 근로자에게는 결코 자유롭지 않은 세계입니다. 그래서 노동법을 하는 저는 중립적인 언어로 다른 법률가들이 갖춘 균형 잡힌 글을 기고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노동과 자본의 대립구도로 그러한 시각에서’ 벗어나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노동법을 만들고 해석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노동법은 민법에 흡수되고 말 것입니다. 노동법은 특별히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이러한 세상은 대등한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세상에서 근로자인 당신들은 법적으로 사용자와 똑같이 자유를 갖지만 그것은 임금노예로 추락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계약자유의 원칙에 의해 당신들은 사용자로부터 체결된 계약에 따라 얼마든지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착취를 당해도 자신이 자유롭게 체결하였다는 것 때문에 법적으로는 정당한 것이고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노동법이 존재하지 않았던 자본주의 세계가 바로 그랬습니다. 민법의 세계였고 그 세계에서 근로자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 세계는 자유로운 세계였지만 근로자에게는 비정한 자유세계였습니다. 그래서 노동법이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노동과 자본의 대립구도로 그러한 시각’으로 편향된 법기술자인 제가 탄생한 것입니다.

헌법은 근로의 권리를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국가는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 보장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최저임금제를 시행하도록 하고(제32조 제1항),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하도록 했고(동조 제3항), 이에 따라 헌법이 정한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하기 위해 근로기준법이 제정됐습니다.(근로기준법 제1조) 이 법은 목적이 근로자의 근로조건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 향상시키기 위한 것이지(제1조), 민법처럼 근로자와 사용자 모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일방적으로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근로기준법입니다. 최저임금법·임금채권보장법,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률, 기간제법·파견법 등 근로자보호를 위한 제법률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등 근로자의 단결·교섭과 행동에 관해 규정하고 있는 노동법도 헌법에 의한 근로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등 노동기본권을 보장해 근로조건의 유지·개선과 근로자의 지위 향상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1조)
그래서 근로기준법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근로조건을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도록 했음에도(제4조) 그 법이 정하는 근로조건은 최저기준이므로 당사자들이 이보다 낮출 수 없도록 했고(제3조), 근로기준법이 정하는 근로조건에 미치지 못하는 근로계약 부분은 무효로 하고 그 부분은 근로기준법이 정한 기준에 따르도록 했습니다.(제15조) 그리고 근로기준법은 온통 “사용자는 … 못한다”, “사용자는 … 하여야 한다.”고 규정해 근로계약의 일방 당사자인 사용자에게만 법상 의무를 부과하고 있고 이를 위반한 사용자만 처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최저임금법 등 근로자보호를 위한 제법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노동법은 불편부당하지 않고 편파적이고 일방적입니다. 사용자에게는 불리하고 근로자에게 유리하도록 제정된 법이 노동법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법이 모두 그렇지는 않습니다. 특히 우리의 경우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등 노동기본권의 행사를 보장하기 위한 법률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을 보면 “노동조합은 … 하여야 한다”고 규정해 부당노동행위 등 몇 조항을 제외하고는 노동조합의 행위를 규제하고 처벌하고 있습니다. 헌법이 보장한 근로자의 노동기본권의 행사를 특별히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행사를 제한하고 금지하기 위해 제정된 법률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법률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 목적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법률의 목적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근로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해 근로조건의 유지·개선과 근로자의 지위 향상을 위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1조) 이것은 노동기본권 행사를 보장하기 위한 법률도 근로자를 위해 편파적이고 일방적이어야 함을 선언한 것입니다.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장차 그와 같이 개정해야 하겠지요.

노동법이 불편부당하지 않고 근로자를 위해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법률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법률에 관한 해석은 어떠해야 할까요. 법은 편파적이고 일방적이지만 해석이라도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 불편부당하게 중립적으로 해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 이 나라에서 교수·변호사·노무사 등 수많은 법기술자들이 그와 같이 해석합니다. 노동법은 단순히 근로자에게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를 위해서도 제공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많은 법기술자들이 사용자를 위해 노동법을 해석해 줍니다. 이 해석에서 중립적이고 균형을 갖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나라에서 판사도 오랫동안 일반 민사법적인 해석법으로 훈련됐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법원의 판례는 노동법의 특수성을 무시한 시민법적인 판례들이 넘쳐납니다. 오늘 노동법 해석에서 저와 같이 당당하게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해석을 하는 법기술자가 있다면 오히려 법률가로서 반드시 갖춰야 할 균형성을 상실한 자로 낙인찍힐 정도입니다. 그래서 위 독자분은 제 칼럼에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과 자본의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균형을 잡는다면서 노동법을 해석할 경우 결국 해석에 의해 노동법은 민법체계로 흡수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법은 어디까지나 근로자로서의 권리를 근로조건 기준을 정함으로써 보호하고 노동기본권 행사를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입니다. 이것은 그 법의 목적으로 제1조에서 당당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동법의 해석은 근로자와 사용자 사이의 균형이 아니라 이와 같은 법의 목적으로 정한 바와 같이 근로자의 근로조건 향상과 노동기본권 행사를 보장하기 위한 노동법의 목적에 부합하게 해석돼야 하는 것입니다. 법조항의 규정문언이 당연히 근로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면 그 규정의 엄격한 해석을 통해, 그 규정문언이 근로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것으로 불충분하게 표현돼 있다면 위와 같은 법의 목적 등 취지에 부합한 해석을 통해 근로자의 권리가 확보되고 보장될 수 있도록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법기술자로서 지금 제가 취하고 있는, 편파적이고 일방적인 해석론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근로자는 사용자에게 강자일 수 없고, 일부 노동단체가 힘이 넘쳐나서 사용자가 위축되는 경우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용자들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근로자 또는 노동단체와 사용자 사이에 균형은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었고, 아무리 일부 노동단체가 힘이 넘쳐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노동법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 제대로 된 해석은 편파적이고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는 봅니다. 필자는 노동법을 해석하는 자로서 어쩔 수 없이 균형 없는 일방적이어서 좋지 않은 글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위 독자분에게 유감스럽게도 필자는 다음과 같은 메일밖에 답신하지 못했습니다.

“균형감각이 사실 없지요. 제가. 노동자편향입니다. 균형감각을 기대하셨다면 제 칼럼 열심히 읽으실 필요 없습니다. 2010.1.26. 균형감각상실자 김기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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