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산재보험이 만들어진 지 40년 만에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전면개정’이라는 이름을 달고 개정됐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단순한 개정에 불과했다. 특히 20년 가까이 노동안전보건운동 영역에서 줄기차게 문제를 제기했던 주요 개혁요구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표적으로 ‘선보장 후승인’·‘보장성 강화’·‘포괄적 산재 인정’·‘산재 미인식 노동자 구제책’·‘충분하고 효과적인 재활 노력’ 등의 요구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려웠다. 오히려 산재보험 개정 이후 산재 인정률은 계속 후퇴하고 있으며 요양 중 강제종결은 강화되고, 재요양이나 요양 연기 등은 더욱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결국 산재보험이 가진 실질적인 사회보험으로서의 기능은 현저히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정부나 경영단체에서 주장하고 있는 ‘꾀병환자’·‘산재보험을 갉아먹는 도덕적 해이’ 등의 이데올로기로 포장돼 더욱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개정 산재보험법은 노동자들의 치료와 보상 권리를 주눅 들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실제로 현장을 살펴보면 산재처리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안타까운 사정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산재로 인정되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일을 못하니 임금도 없고, 자기 호주머니 돈 써 가면서 치료비를 내야 하니 그야말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거나 패가망신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산재보험이 가진 한계가 뚜렷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산재보험제도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게 노동자들에게는 큰 위안인 셈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시각을 좀 바꿔 생각해 보자. 내가 노동자인데 (재수 없게) 산재가 아닌 개인사고를 당하거나 개인질병에 노출됐다고 가정해 보자. 혹은 내가 전업주부인데 사고나 질병에 노출됐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사람들은 근로복지공단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주는 의료급여 지원에 만족해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보면 우리나라 의료보험과 산재보험은 보장성에서 큰 격차가 존재하고 있다. 바로 생활급여로 평균임금의 70%를 지급하는 산재보험에 비해 의료급여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노동자도 국민이다. 업무와 관련해 다치거나 병드는 것과 그렇지 않은 조건에서 발생하는 사고나 질병에는 도대체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모든 국민은 어떤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보장받아야 한다. 병들고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일수록 보장수준이 높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할까.

필자는 단연코 의료보험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산재보험개혁을 미루자는 얘기는 아니다. 의료보험 개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건강하지 않은 노동자, 건강하지 않은 국민 모두에게 기본수준의 안녕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의료보험 개혁의 주요 내용은 휴업급여를 지급하는 것이며 현재 존재하는 본인부담금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너무 늦은 감도 없지는 않다. 이미 서구에서는 1세기 전에, 늦어도 70년대에는 이런 정책이 도입됐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노동자들은 산재로 인정받기 위해 안달하지 않는다. 자신의 휴업급여와 의료급여를 지원하는 (운영) 주체가 누구인지 관심도 없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산재로 다친 것도 억울한데 승인받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은 더욱 통탄할 노릇 아닌가. 따라서 향후 산재보험의 높은 적용성과 보편성이라는 문제가 해결돼야 하며 이는 의료보험제도의 진정한 진보와 관련돼 있다.

물론 현재 구조에서 충분한 경로 설정 없이 바로 서구유럽처럼 가자는 주장이 힘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한 사회안전망 강화가 조세개혁(이는 정말 어렵다. 자본은 물론 노동조차도 조세부담률을 높이는 데 반대한다)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 않던가. 최근 의료보험 민영화 얘기가 너무 자주 나오고 있어 매우 불안하다. 현재의 의료보험제도 후퇴를 막는 것도 큰 과제일 테지만 좀 더 개혁해 ‘노동자-민중’의 보편적 사회안전망을 확보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한인임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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