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말 크리스마스라고 거리엔 화려한 불빛이 넘쳐난다. 어제 퇴근길에 넘쳐나던 장식불빛이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보이지 않았다. 출근하는 도중에 아침부터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자문하고 있는 ○○건설 노동조합에서 회사의 대주단 가입 문제와 관련해 상담을 해야 한다고 했다. 출근하자마자 바로 노동조합 담당자와 전화상담을 했다. 벌써 100억원이 넘는 임금이 체불되고, 자금사정으로 대부분의 회사 건설현장이 멈췄는데도 회사가 회생절차 개시신청이나 워크아웃신청 등 정상화를 위한 방안을 찾지 않고 버티면서 대주단 가입을 통해 채무지급연장 등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데 급급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회사 근로자들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2. 신문에는 연말연시 광고가 뜨겁다.
최근 ○○은행은 “2009년 한국 최고의 직장 대상 수상”이라고 광고하고 있다. 이 은행은 올해 노사가 산별노조의 승인 없이 지부가 양보교섭을 했다고 해서 문제가 됐던 사업장이다. 어째서 최고의 직장이라는 평가를 받아 상까지 받은 것일까.
“세계에 자랑할 만한 ○○대학”, “21세기를 이끌어 갈 인재육성, ○○대학교의 사명입니다”, “정규직 취업률 4년 연속 전국최우수” 등은 오늘 신문에 실린 대학 광고문이다.
“승현이 엄마는 ○○영어를 이렇게 자랑합니다”, “아이의 미래를 여는 힘” 학습지와 어린이 도서에 관한 신문 광고문이다. 아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고 영어학습을 열심히 해서 엄마가 대견스럽게 자랑하는 승현이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대학에 들어가 21세기를 이끌 인재가 되는 것일까. 아니 승현이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대학에 들어가야 21세기를 이끌 인재가 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승현이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대학에 들어가 21세기를 이끌 인재가 돼야 하는 것일까. 온갖 생각이 꼬리를 문다.
20대 대학생, 취업준비생이 모여 종로에 카페를 열었다는 사회면 기사 제목은 “‘88만원 세대’ 열정에 불붙이다”였다. 이 나라에서는 결국 승현이는 ‘88만원 세대’가 되는 것인가. 이 신문 다음 장을 넘겨 봤다. “이은○ 20주년 서울 연말 콘서트”, “김연○ 크리스마스 콘서트”. ○○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린다는 연말 공연행사 광고문이다. 연말, 크리스마스 공연행사가 넘쳐난다.

#3. 어제는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윤○○ 조합원으로부터 내일(22일) 기륭전자분회 송년문화제를 공단오거리에서 한다고 꼭 참석해 달라고 연락이 왔다. 그들은 불법파견·계약직 등 비정규직 문제로 벌써 수년째 투쟁해 왔다. 이 사업장 근로자들이 금속노조에 가입해 분회를 설립했을 때부터 관여해 왔는데, 볼 때마다 안타깝고 내가 수행하고 있는 일에 무력함을 느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위 공연행사 광고를 보자 이러저러한 생각들이 든다.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이 콘서트장에 가지는 않겠지. 그럼 88만원 세대가 가는 걸까. 승현이는 기륭전자분회 송년문화제에는 가지 않겠지. 비정규직세대가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두지 않는다. 왜 자신이 비정규직이면서도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일까. 세계에 자랑할 만한 대학에 들어가 21세기 인재가 돼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결국 88만원 세대로 알바를 하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한 승현이는 오늘도 정규직 취업시험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일까.

#4. 오후에는 ○○공사노동조합에서 단체교섭에 대해 상담했다. 상담을 하고 보니 정부가 정리해고 관련 노조와 합의하도록 한 조항을 삭제하도록 해 교섭에서 문제가 된 것이었다. 이 노동조합은 임금 삭감을 하고, 정부의 공기업 선진화 계획에 따른 인원감축 등으로 회사가 대규모 정리해고를 통보해 정리해고를 앞두고 있었다. 기존의 단체협약을 저하하고자 회사가 노조를 압박하고 있었다. 21세기 인재 승현이가 꿈꾸는 직장인 공기업 정규직 근로자들마저도 임금·복리후생 등 근로조건의 저하와 정리해고 등 고용불안에 내몰리고 있다. 정부와 언론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공기업·대기업의 정규직과 중소·영세사업장, 비정규직을 구분해 비교해 왔다. 그러면서 중소·영세사업장, 비정규 근로자의 근로조건 향상을 위한 제도개선을 모색한 것이 아니라 공기업·대기업의 정규직 근로자의 처우가 과도하다며 이를 끌어내리는 데 앞장서 왔다. 이제 어느 누구도 공기업·대기업 근로자와 노동조합에 우호적이지 않다. 철도파업에 대한 탄압은 이러한 상황에서 진행됐다.

#5. 정부와 공사는 '철도공사 근로자들이 임금이 얼마인데 파업을 하고 있다'며, '경제위기 상황에서 온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를 외면하고 있다'며 철도노조와 그 조합원들을 비난했다. 조금 전에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 보니 현대자동차 교섭이 사측의 임금 동결 제시로 난항을 겪고 있다. 자동차의 판매의 호조로 경제위기상황에서도 엄청난 흑자를 내고 있는데도 기본급 동결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공공기업 선진화의 마지막 단계로 내년에는 공기업에 완전한 연봉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성과연봉제를 도입해 개별실적에 따라 임금액을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용자와 개별 근로자 간 연봉계약에 의해 임금액이 정해지게 된다. 임금교섭 등 노동조합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연봉제는 반드시 노동조합과의 단체협약을 통해 도입돼야 하는데도 정부는 일방적으로 이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6.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개정안이 다뤄지면서 민주노총 위원장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의 면담 소식이 신문에 실려 있다. 전임자급여 지급금지,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에 관한 노조법 개정에 관한 문제다. 노동기본권을 보장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활동을 제한하고 위축시키는 방향으로 이 문제가 다뤄지고 있다. 노동조합은 노동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조법을 통해 규제당하고 있고, 점점 더 심하게 규제를 받고 있다. 파업은 처벌되고 교섭은 비난받고 노조 가입은 외면당하고 있다.

#7. 2009년 12월 어느 하루. 이 나라 노동자의 모습이 보인다. 정규직으로 고용되기 어렵고,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근로조건의 저하를 압박받고, 노동조합은 위협당하고 있는 이 나라 노동자들의 오늘이 보인다. 휘황한 장식불빛은 휴일 없이 일하는 근로자를 가리고 백화점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다. 그 찬란한 아름다움에 우리 승현이는 오늘도 고단한 알바 생활을 잊고 백화점 장식불빛을 무심히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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