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뭡니까?", "그래픽입니다"
지난 11일 오전 7시 인천 김포시 아파트신축공사장 앞. 페인트 등 공구를 트럭에 싣고 달려온 손정익(52)씨는 공사장 입구를 막는 경비를 향해 이같이 외쳤다. 손씨는 아파트 등 고층건물 외벽에 숫자·상호 등의 글씨와 그림을 그리는 '슈퍼 그래픽 도장공'이다. 슈퍼 그래픽 도장이란 건물 표면에 색채와 조형언어로 이미지를 개선하는 예술의 하나로 환경 그래픽이라고도 한다. 아파트·산업시설·지하주차장 등에 주로 적용되고 있다. 슈퍼 그래픽 도장공은 전국 건설 현장 등을 다니며 두세 명씩 팀을 꾸려 건설일용직 형태로 일한다.
이날 <매일노동뉴스>가 이번에 찾은 곳은 15층 높이의 아파트에서 로프(줄)를 타고 벽에 슈퍼 그래픽 도장을 하는 건설현장이다.



지붕 위를 걷는 사람들

손씨는 온갖 건설현장을 전전하던 중 20년 전 우연히 친형의 권유로 로프를 탔다. 고수익이 보장된다는 것에 솔깃했던 터였다. 그는 “처음 로프를 탔을 때,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밥벌이를 해야 하나 싶어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손씨는 현재 15명의 도장공을 이끄는 팀장으로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슈퍼 그래픽 전문가다.
"그래픽은 아무나 할 수 없어요. 제도를 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로프 타는 기술과 미에 대한 감각, 그림이나 건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전문기능인이죠."

손씨는 "막일을 한다는 안 좋은 고정관념을 버리고 기술을 배우려고 노력했다"며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들이 기능인으로서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오전 7시30분이 되자 팀원 김진영(45)씨와 이영봉(50)씨가 도착했다. 이씨와 손씨가 안전띠를 매고 작업을 준비하는 사이 이번 현장에 새로 투입된 김씨는 안전수칙 등을 따로 교육받았다.

작업을 하기 위해 15층 아파트 옥상에 오르니 바람의 세기와 온도가 지상과는 달랐다. 아파트 옥상에는 지붕 등 각종 구조물이 많았다. 밤새 내린 비로 인해 구조물에는 습기가 흥건해 미끄러웠다. 하늘엔 구름이 가득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했다. 손씨를 비롯한 이들은 지붕 위를 가뿐히 걸어다니며 로프를 구조물에 묶었다. 로프는 2개 이상의 구조물에 결속하고 8자 매듭으로 여러 번 묶는다. 이어 달비계(공중작업을 할 수 있도록 매단 의자)를 매달고 코브라에 보조 로프를 엮었다. 코브라는 작업자의 추락을 예방하는 안전장치다. 달비계에 묶는 로프 직경은 18~22밀리미터이며, 보조 로프의 직경은 12~16밀리미터다. 안전점검이 완전히 끝나면 작업자가 달비계에 타고 컴퍼스·자 등의 각종 도구를 달비계에 매단다.

이 과정에서 한순간의 실수는 곧 사망으로 이어진다. 이들에게 로프는 생명줄이다. 안전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달비계에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원칙이다.
"달비계를 타고 처음 내려갈 때가 가장 예민할 때입니다. 이때 말을 걸면 안 됩니다."

이들을 지켜보던 공사현장 안전기사 오인수(37)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오씨는 슈퍼 그래픽 도장공들의 안전장비 착용, 로프 등을 점검하고 이들이 작업하는 동안 외부인의 접근을 막았다. 작업하는 사람의 안전도 문제지만, 작업자의 도구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오 기사의 관리·감독하에 슈퍼 그래픽 도장공들의 작업이 시작됐다. 달비계에서 손씨와 김씨는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컴퍼스·자 등을 이용해 벽면 위에 제도를 시작했다.



날씨와 싸우는 사람들

"끼이익."
바람이 불 때마다 달비계는 심한 소리를 내며 출렁거렸다. 아파트 옥상 허공에는 추운 날씨로 인해 작업자들이 뿜어내는 입김이 피어올랐다.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데, 아까부터 무거워 보이던 하늘이 결국 이슬비를 뿌렸다. 비가 내리면 페인트가 흘러내리기 때문에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

한동안 하늘을 지켜보던 손씨는 "20년 경험을 돌아봤을 때 지나가는 비"라며 작업을 계속 진행했다. 슈퍼 그래픽 도장공들에게는 날씨가 중요한 변수다. 장마·황사·눈 등으로 인해 이들은 1년에 평균 180여일 정도를 일한다.

"하늘을 바라보고 일을 하다 보니 하늘이 천벌을 내릴까 나쁜 짓도 못하겠어요. 기술뿐 아니라 천기를 읽어 내는 센스가 있어야 밥벌이를 할 수 있다니까요."
손씨의 말처럼 이슬비가 지나갔다. 점심을 먹고 나니 이번엔 언제 비를 뿌렸냐는 듯 햇빛이 내리쬔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이내 또 이슬비가 흩날렸다.
"아휴, 오늘 날씨는 여자 마음보다도 더 감 잡기가 어렵네요.(웃음)"

종잡을 수 없는 날씨에 손씨는 그냥 웃고 말았다. 달비계를 타고 작업하는 것만으로도 체력적으로 쉽지 않은 탓이다. 사람보다 더 큰 크기의 글자와 그림을 벽면에 제도할 때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슈퍼 그래픽 도장공들은 업체가 정해 준 디자인 도안에 따라 작업을 진행한다. 도안에 맞춰 기하학 등을 이용해 제도를 하려면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렇다 보니 슈퍼 그래픽 작업자 중에는 건설현장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없다. 온갖 공사가 동시에 진행 중인 아파트 신축공사현장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작업이 슈퍼 그래픽도장이다. 지나가는 건설 노동자들은 한 번쯤 발길을 멈추고 로프를 탄 채 작업하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다. 페인트공 박아무개(40)씨는 "줄을 타는 것만으로도 신기한데, 전문기술로 그래픽까지 하니 부럽다"고 말했다.

이날 손씨와 김씨는 '6코'를 탔다. 보통 로프를 한 번 타는 것을 한 코라고 말한다. 이름 없던 아파트에 숫자와 상호가 새겨졌다. 이들이 작업을 할 동안 이씨는 로프를 정리하며, 이어 줄을 탈 곳에 미리 설치하는 등 온종일 보조작업을 수행했다. 길이가 200미터에 이르는 로프의 무게는 약 30킬로그램에 달한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씨의 머리카락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무거운 로프를 양 어깨에 메고 다니느라 슈퍼 그래픽 도장공들은 어깨와 허리에 신경통이 자주 발생한다.


'오늘도 무사히', 늘 감사하는 마음

오후 5시 어스름이 깔리자 저녁 이슬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두 곳의 아파트에 동호수가 새겨졌다. 때마침 중국집 배달원이 아파트의 동호수를 보고 쉽게 길을 찾아갔다. 이에 손씨가 "우리가 한 작업이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하고 알리는 실용적인 기능도 포함돼 더 보람된다"고 웃었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끝낸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얼굴 여기저기에 페인트가 묻은 손씨가 안도의 숨을 쉬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다고 했다. 추락사에 대한 긴장감 때문이다. 모든 팀원들이 안전하게 일을 마친 것이 매번 그의 가장 큰 보람이다. 손씨는 트럭을 몰고 퇴근하는 길에도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건물 외벽의 그림을 보며 눈에 익히느라 여념이 없었다. 퇴근 후 일정을 물어 보니 일러스트 등 컴퓨터로 작업하는 디자인 공부에 도전할 계획이란다.

"한국에서도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다른 선진국처럼 기능인으로 인식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전문가로 인정받았으면 좋겠어요."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함을 느낀다는 손씨의 숙원이다.


지난달 23일 제주시 용담동 소재 한 아파트 4층에서 외벽 페인트 작업을 하던 양아무개(35)씨가 바닥으로 추락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양씨가 타고 작업하던 작업받침대에 연결된 밧줄이 끊어져 사고가 난 것으로 보고 조사에 들어갔다.
이처럼 슈퍼 그래픽 도장공을 포함해 로프를 타고 작업하는 이들은 매 순간 추락사에 대한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건설노조(위원장 백석근)가 지난 9일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건설업 중대재해 조사 의견서'(2008년 7월~2009년 6월)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건물 외벽에 페인트 칠을 하다가 추락한 사고가 약 30건 정도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옥상에 묶어 놓은 로프가 풀리는 경우, 로프고정대가 뽑힌 경우, 단순 난간대에 매달린 상태에서 무게를 못 이겨 파손되는 경우 등이 주를 이뤘다. 간혹 낡은 로프가 끊겨 발생한 사고도 있었지만 대부분 경미했다.
반면에 선진국에서는 고층작업시 곤도라 등의 기계를 설치해 작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로프가 유일한 안전장치인 한국에서는 고층건물이 많아 곤도라 설치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건물주나 시공사가 비용 문제로 기계 설치를 꺼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때문에 추락에 의한 재해가 줄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날 김포시 아파트신축공사장에서 작업을 관리·감독한 안전기사 오인수(37)씨는 “로프를 타고 작업하는 이들이 속한 업체가 영세한 데다 다른 업체와 경쟁을 벌이느라 스스로 안전에 대한 부분을 꼼꼼히 챙기지 않는 것 같다”며 “안전에 대한 관리·감독의 경우 이들에게만 떠넘기지 말고 정부 당국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은성 기자

[현장분석] 슈퍼그래픽 도장공이란?
"제 살 깎는 저가 출혈경쟁…조직화 절실"
업계에서는 슈퍼 그래픽 도장공이 전국적으로 500여명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은 목소리를 대신할 노조나 협의회 등의 창구가 없어 정확한 규모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슈퍼그래픽 도장공들은 전문기능인으로서 많지 않은 수임에도 불구하고 저가 출혈경쟁에 몸살을 앓고 있다.

◇도장업체 저가경쟁 촉발=슈퍼 그래픽 도장공들은 건설 일용직 노동자들처럼 2명에서부터 10여명에 이르기까지 팀을 꾸려 전국 건설현장을 다닌다. 주로 플랜트·아파트 공사현장에서 일한다. 일당은 평균 20만원 안팎이다. 실력이 좋고 작업하는 장소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일당은 늘어난다. 이들은 건설시공사에게 하청 받은 도장업체와 계약을 맺고 일한다. 슈퍼그래픽 도장공 강아무개(45)씨는 "모래알 같은 개개인이 도장업체를 상대하려다 보니 서로 저가 출혈 경쟁을 펼치며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강씨는 "슈퍼 그래픽이 전문영역이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을 것 같지만 막상 내부 실상은 서로 견제하며 제 살을 깎아 먹느라 기능인으로서의 처우를 스스로 낮추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목소리 모아 내는 조직화 절실=일의 양이 많은 페인트 등의 도장과 달리 슈퍼 그래픽 도장일은 흔치 않다. 따라서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경쟁자보다 시간과 비용을 깎고, 이틀 걸릴 일을 하루에 마치겠다는 식의 질적 하양평준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강씨는 "슈퍼 그래픽 도장공들을 대변할 노조 혹은 협의회 등을 통해 목소리를 조직화하는 것이 절실하다”며 "입찰가격에 대해 최소한의 기준이라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지금 같은 상태로 도장업체를 상대하다 보면 슈퍼 그래픽 도장공들은 무한정 약자일 수밖에 없다”며 “서로 불신이 쌓여 쉽지는 않겠지만 업계의 선도그룹만이라도 저가 경쟁에 참여하지 말고 적정한 가격을 제시해 공정한 거래를 유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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