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9년 11월13일. ‘어느 청년 노동자’의 분신 39주년이 되는 날이다.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던 날이다. 재단사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바보회·삼동친목회를 조직해 활동하던 그를 반드시 떠올리게 되는 날이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통해 수많은 청년이 노동자와 함께하는 삶으로 투신했다.

2. 39년 전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으로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보호해 달라고 온몸으로 호소했다. 근로조건 실태를 조사해 노동부에 진정했으나 노동부 근로감독관은 전태일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기만했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은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법이 아니었다. 39년이 지난 오늘. 다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을 본다. 평화시장 노동자 중 얼마나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고 있을까.
평화시장에서 의류 제조·판매 사업장은 상시 4인 이하의 소규모 사업장이 대부분이고, 위장된 개인사업자이거나 고용형태도 계약직 등 비정규직이 많다. 이들에게 근로기준법은 여전히 예외적으로 일부에 대해서만 적용되거나 그나마도 적용되지 않는다. 오늘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은 여전히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법이 아니다.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은 오늘도 외칠 수밖에 없다. “근로기준법을 적용해 달라.”

3. 전태일은 바보회·삼동친목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단체로 조직돼 활동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바보회를 조직해 활동하다 해고당했다. 그 뒤 재취업해 ‘근로조건 개선을 공동으로 행동’하기 위해 삼동친목회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 모두가 가입해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사용자들과 교섭하고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조직은 전태일의 꿈이었다. 노동자로서 노동조합을 조직하지 못한 채 바보회·삼동친목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은 죽음으로써 마침내 청계피복노동조합을 조직했다.
그러나 미싱사·재단사 등 어제 전태일의 노동자들은 오늘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다. 사용자들은 근로계약관계가 아닌 하도급계약관계로 형식을 바꿨다. 미싱사 등은 개인사업자로 등록돼 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노동자로 불리지 않으면서 노동자로도 취급받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노동조합은 가입하거나 조직할 수 있는 자신들의 단체로 보이지 않는다. 오늘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은 자신의 죽음으로써 설립했던 노동조합이 아닌, 다시 바보회·삼동친목회를 만들어 활동할 수밖에 없다.

4. 전태일은 분신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자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분신뿐이었던 평화시장의 청년 노동자의 선택이었다. 우리 법에서는 노동자는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파업 등 단체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1970년에는 그렇지 않았을까. 그래서 전태일은 단체행동이 아닌 분신했던 것일까.
당시에도 헌법은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고 있었고, 노동쟁의조정법은 이를 규정했다. 그렇지만 전태일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감히 노조를 만들어 파업 등 단체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근로기준법 수준에 불과한 요구안조차도 사용자들에게 요구하고 이것을 관철하기 위해 파업을 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평화시장의 청년 노동자는 단체행동이 아닌 분신으로 행동했다.
오늘의 평화시장에서는 전태일이 단체행동을 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개인사업자이거나 일당제 노동자로 전락한 재단사 전태일은 노조를 만들 수 없고, 어렵게 노조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전태일이 그토록 사랑하는 미싱사·시다 등도 개인사업자여서 가입할 수도 없다. 그러니 전태일은 단체행동을 할 수가 없다. 그러면 평화시장 미싱사 등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이 청년 노동자는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인가.

5. 지금은 누구나 전태일을 말한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불온하거나 계급적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오늘 평화시장에 있지 않은 일반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어 교섭하고 파업 등 단체행동도 한다. 그래서 '1970년과는 다르다, 많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는가. 노동기본권이 보장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1970년 평화시장에 있지 않은 일반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고 교섭하고, 파업 등 단체행동을 할 수 있었다. 당시 노동쟁의조정법은 지금의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보다 파업과 같은 단체행동 보장에서 제한과 금지가 덜했고, 처벌의 대상도 적은 데다, 수준도 낮았다. 오히려 지금보다 법적 보장수준이 결코 낮지 않았다. 파업을 했다고 업무방해죄로 처벌받는 일도 없었다. 오늘 파업을 하면 주체·목적·절차·수단과 방법에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상 갖가지 금지와 제한을 받고 있고, 이것을 위반하면 업무방해죄로 처벌받는다. 그저 일하지 않고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국가가 형벌로써 다스린다. 오늘 평화시장에 있지 않은 일반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어 교섭하고 파업 등 단체행동을 할 수 있지만, 이들도 예외적으로만 업무방해죄 등으로 처벌을 면하고 단체행동을 보장받는다. 이 점이 1970년과는 다르다,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때보다 노동기본권이 덜 보장되고 있다고. 그럼에도 지금 누구나 전태일을 말한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불온하거나 계급적으로 취급되지 않으므로. 이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통해 청년들은 더 이상 노동자와 함께 하는 삶에 투신하지 않는다. 1970년 평화시장과 오늘 평화시장이 다르다고 자위하면서. 1970년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과 오늘 노동자의 보장이 달라졌다고 착각하면서.

6. 1970년 11월13일 청년 노동자는 39년이 지난 오늘을 보지 못했다. 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것이 보장돼 있으되 자신과 평화시장 동료들은 가입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파업 등 단체행동권은 보장돼 있으되 실질적으로는 예외적으로 허용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파업을 해도 법률의 금지와 제한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업무방해죄로 처벌받게 되리라는 것을. 지난 일요일 민주노총이 수만명의 조합원을 모아 놓고 외쳤다. 그 전날에는 한국노총이 십만명이 넘는 조합원을 모아 놓고 여의도공원에서 외쳤다.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 반대와 전임자급여 지급금지 시행 반대를 일제히 외쳤다. 이날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무엇을 봤을까. 노동자로 노조를 조직하지 못하고 파업 등 단체행동이 업무방해죄로 처벌받고 있는 나라에서 양대 노총의 집회에서 무어라고 외쳤을까. 이 청년 노동자가 무엇을 외쳤을지 감히 그것은 말하고 싶지 않다. 그저 그가 최후에 외쳤던 한 마디를 되새길 뿐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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