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1월부터 시행될 예정인 현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복수노조 허용·전임자임금 지급금지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노-정 간 갈등의 수위는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황이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7월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노사관계선진화위원회 공익위원안 공개부터 10월 현재까지 벌어진 사건과 한국노총·민주노총·재계·청와대·노동부(노사정위)·정치권·공익위원·언론 등 각 주체들의 내밀한 움직임을 들여다봤다.

지난 2006년 시행 유예 합의 이후 3년 만에 복수노조·전임자임금 논란의 서막이 올랐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본격적인 논란의 시작은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노사정위) 공익위원안이었다. “노동부의 결정적 패착은 공익위원안을 너무 일찍 보였다는 것이다.”
지난 8월 말 국회에서 만난 한나라당 주요 관계자의 말이다. 왜 이런 분석이 나왔을까.

공익위원안 너무 일찍 공개했다?

공익위원안이 보고된 것은 7월20일. 핵심 내용은 근로시간 면제제도(타임오프제) 도입과 300인 미만 기업엔 정부재정 지원,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방안(다수대표제)이었다.

그런데 공익위원안은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노사정이 행보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공익위원안을 존중한다.”(노동부) “검토대상이 아니다.”(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

정부는 옹호했으나 노사는 공익위원안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시 시간을 되돌려 보자.
노사정위는 공익위원안을 바탕으로 8월 중순부터 장·차관급으로 격상해 본격적으로 협상을 시도하겠다는 계획을 내비쳤다. 노동부가 8월 중·하순께 (공익위원안 중심의) 노조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 같은 분위기 탓인지 한나라당 정책위원회는 8월에만 두 차례 보좌관과 출입기자를 대상으로 복수노조·전임자 관련 설명회를 열기까지 했다. “곧 입법예고가 될 텐데 취재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는 게 당시 한나라당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같은 시기, 노사정 안팎에서 노사가 ‘유예’에 합의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5년 유예안에 MB 난색 표해

한국노총 출신 현기환 한나라당 의원은 15일 한국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 참석, 연대사를 통해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8월21일 한국노총 출신 국회의원 4명이 이명박 대통령을 면담해 5년 유예를 요구했다.”

그동안 떠돌던 소문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것이 현대가 최고경영자(CEO) 출신 대통령에게 날카로운 ‘경고음’으로 들렸던 것 같다.

현 의원은 “대통령의 입장이 매우 강했다. 과거엔 한국노총 출신 간부였지만 이젠 국가 전체를 위한 국회의원으로 일해 달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실제 이때부터 정부의 움직임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입법예고 시점이 자꾸 늦춰지더니 어느 순간 흐지부지됐고, 끝내는 개정안을 내지 않겠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노사가 또 담합(유예)할 경우 노동부가 막을 도리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3년 전의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인 셈이다. 전운배 노동부 노사정책국장이 지난달 18일 노사정위 주최 토론회에서 “노사가 합의해도 유예는 안 된다”고 발언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정부, ‘내년시행’ 강경방침으로 돌아서

같은달 8일 조해진 한나라당 의원은 자유기업원 주최 토론회에서 “내년 1월부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법조항을 일단 시행하고 사후 보완하는 게 좋다”는 발언을 내놓았다.

‘선시행 후보완’이라는 정부의 방침이 처음으로 선보이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조 의원은 한국노총과의 정책연대 파기 가능성까지 제기했다. 평소 보일 듯 말 듯 조용했던 조 의원의 행보라고 믿기지 않는 파격적 발언이었다.

하지만 곧 철저히 계산된 발언임이 확인됐다. 조 의원에 이어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작정한 듯 쐐기를 박고 나선 것이다.

안 대표는 지난달 22일 원내대책회의에서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규정을 시행하는 것이 당론”이라고 못 박았다. 물론 당론이 논의된 적은 없었다. 이에 앞서 안 원내대표는 같은달 17일 환노위원 간담회에서 현행법 시행을 강조하는 한편 한국노총 출신 강성천·이화수 의원을 국정감사 뒤 사·보임을 통해 환노위에서 빼겠다고 압박했다.

그렇다고 여당 내에 강경 입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안홍준 의원은 원내대책회의에서 안 원내대표의 당론 발언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안 의원은 현재 노조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청와대의 강경한 입장 탓에 온건그룹은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우왕좌왕 재계, 임태희의 한계?

청와대에서는 노동팀이 아닌 경제팀이 복수노조·전임자 ‘선시행 후보완’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노동부도 보조를 맞췄다.

실제 노동부와 기획재정부는 지난달 복수노조에 반대하는 각 기업 인사노무 관계자들을 차례로 불러내 내년 시행을 강조하며 “미리 준비하라”고까지 통보했다. 이 같은 정부·여당의 행보에 대해 노동부의 한 관계자는 “그동안 정부는 노동계에 계속 시그널(신호)을 줬다. 하지만 못 알아듣더라”며 극약처방(?)의 배경을 설명했다.

재계는 입장을 통일하지 못하고 있다. 삼성·LG·포스코 등은 복수노조 시행에 반대하는 반면 현대자동차·효성 등은 전임자임금 지급금지를 상대적으로 중시한다. 지난 8일 경제5단체장이 모였지만 상황만을 공유했을 뿐 별다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언론들도 헷갈리는 모습이다. 보수일간지나 경제지는 기업의 입장차에 따라 복수노조 반대에 힘을 싣는가 하면, 전임자임금 지급금지에 무게를 싣기도 한다. 개혁성향 일간지도 원칙과 현실의 차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소극적으로 다루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나라당 정책위의장 시절 한국노총과의 대화를 주도했던 임태희 노동부장관도 기존 정부의 입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반격에 나선 노동계

결국 노동계가 반격에 나섰다. 선봉에는 ‘한국노총’이 섰다. 장석춘 위원장은 이달 8일 강경방침을 주도한 정부 경제팀을 직접 겨냥해 ‘비밀TF’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전쟁을 선포했다. 한편에선 노사정위에서 철수하면서 양대노총·경총·대한상의·노동부·노사정위로 구성되는 6자 대표자회의에서 합의를 도출하자고 제안했다. 정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런데 그 시각을 전후해 청와대에서는 중대한 반전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난 6일 청와대 이영호 노동사회비서관이 경제금융비서관실로 쳐들어가 이른바 ‘활극’을 펼친 것이다. 내막인즉, 복수노조·전임자 문제와 관련해 청와대 노동팀이 경제팀을 찾아가 항의한 것이었다. 이 비서관은 징계조치를 당했지만, 노동업무는 다시 노동팀으로 원위치됐다.

이는 경제부서에 밀렸던 노동부가 복수노조·전임자 주무부처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노동부의 움직임이 부쩍 활발해진 게 사실이다. 실제 임 장관은 최근 노사 관계자들을 수시로 만나는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고 정부의 입장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기 때문이다.

양대노총 ‘연대투쟁’, 협상국면 열릴까

한국노총은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총파업과 정책연대 파기라는 칼을 뽑아들었고, 양대노총은 21일 “정부가 복수노조·전임자 시행을 강행한다면 결국 연대총파업이 불가피하다”며 5년 만에 다시 연대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정부와 재계는 양대노총이 얼마나 위력적인 투쟁을 벌일 것인지 주목하고 있다. 노동계가 실질적 힘을 보여 주는 만큼 협상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노-정 갈등은 10·28 재보선에서 산업현장의 노심(勞心)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한국노총이 제안한 6자 대표자회의 성사 가능성에 관심이 쏠린다. 민주노총도 6자 대표자회의에 합류키로 했다.

그런 가운데 21일 노동부 노정국 라인과 한국노총 본부장들이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노동부는 대화 참여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임태희 노동부장관도 23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대화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럼에도 정부는 여전히 ‘내년 시행’을 강조하고 있다. 노사정대표자회의가 열린다고 해도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 노동계는 강경한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투쟁과 협상을 병행하는 전략을 유지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화가 시작된다는 그 자체가 새로운 국면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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