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조운동의 성과가 오히려 노동자 내부의 차별로 나타나는 역설적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민주노조운동의 자랑스러운 대표체인 민주노총이 ‘정규직 노동자’의 조직으로 간주되고 비판받고 있습니다. 민주노총은 보다 근본적인 혁신 없이는 목표를 이루기 어렵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올해 5월1일 민주노총 노동절대회에서 임성규 위원장은 ‘사회연대선언문’을 발표했다. 임 위원장은 “공장 안에 갇힌 투쟁을 넘어 공장 밖 사회적 의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실천해 노동의제에 한정된 ‘노동운동’을 넘어서겠다”고 밝혔다.
민주노조운동의 한계를 넘어설 대안으로 사회연대운동이 발표되자, 정규직 양보론을 비롯한 여러 논쟁이 뒤따랐지만, 구체적인 사업추진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논쟁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듯하다. 혹자는 민주노총의 ‘그릇’을 탓하고 혹자는 ‘리더십’을 탓하지만 어쨌든 사회적 연대의 가치가 병상 위에 누운 노동운동을 회생시킬 처방이라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어 보인다. 지금껏 숱하게 언급됐던 여러 담론은 잠시 접어둔다면, 사업장에서‘연대’를 향한 몸짓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인 현실 속에서 원·하청 노동자 간 연대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부산지하철노조가 간접고용 비정규직을 조합원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공장 안에서 경계 허물기

부산지하철노조는 지난해 규약상 조합가입 대상범위를 부산지하철 부대업체 직원까지 확대하기로 한 데 이어 지난달 22일 이들의 조합비 납부규정을 만들고 서비스지부로 새롭게 편제했다.

불과 3년 전인 2006년 서울에서 지하철 식당 계약직들이 고용불안을 느껴 정규직노조 문을 두드렸으나 외면당했던 사례와 비교하면 뚜렷한 변화다.
당시 노조 규약에는 조합원 범위가 ‘도시철도공사에 종사하는 자’로 폭넓게 규정돼 있었지만, 노조는 대의원대회를 통해 ‘비정규직은 가입대상이 아니다’는 유권해석을 내놓았다.

부산지하철에서 일하는 하청노동자는 청소·차량정비·설비점검부문에 약 1천500여명. 현재 부산지하철노조 조합원은 2천500여명으로, 만약 하청노동자 대부분이 가입절차를 밟을 경우 조합원의 40%가량을 차지하게 된다.

노조 내부구도가 뒤바뀌는 결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부산지하철노조의 이번 결정은 최근 지하철 업무의 외주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노동유연화 흐름에 대한 노조의 적극적인 방어전략으로도 풀이된다.

금속노조 마창지역금속지회 한국보그워너씨에스 현장위원회는 파업 끝에 이주노동자의 고용을 지켜냈다. 미국계 중장비 쿨링시스템 팬을 생산하는 이업체의 올해 생산물량이 10~20%가량 줄면서 이주노동자 4명이 해고위기에 처했다.

지회는 파업 끝에 이들의 고용을 법이 허용하는 최대한(3년+3년) 보장한다는 합의서를 체결했다. 또 2007년 이주노동자를 노조에 가입시킨 금속노조 삼우정밀지회는 올해 정규직 생산직 44명이 3개월 동안 2개조로 나눠 2주일씩 휴업하는 대신 18명의 이주노동자를 계속 고용키로 회사와 합의했다.

부산지하철노조나 금속노조 사업장의 이런 노력은 그저 ‘착한 노조’라서가 아니다. 노동유연화 추세에 맞서는 노조의 적극적인 방어전략으로 풀이할 수 있다.

김성희 한국비정규센터 소장은 “간접고용 비정규직이나 이주노동자의 경우 사회연대 측면에서 매우 어려운 과제”라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사업장에서 사회연대를 실천하는 방안의 시험대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공공기관이나 서비스업종의 경우 간접고용 비정규직이 주변업무를 담당하면서 정규직 조합원의 이해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외통수”라며 “기간제가 간접고용으로 대체되는 가운데 정규직노조가 제대로 된 연대전략을 짜는 것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쌍용차 노동자들이 77일간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뉘어 공장 정문을 사이에 두고 사투를 벌이는 동안 공장 ‘옆에 살고 있는 자’들은 냉담하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개그맨 김제동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쌍용차를 잊지 말자. 우리도 언젠가 약자가 될 수 있다’고 남겼을 때 고개를 끄덕였던 대중들은 노동자들의 ‘함께 살자’는 처절한 외침은 철저히 외면했다.

공장 울타리 뛰어넘기

조건준 금속노조 정책국장은 지난 9일 개최된‘아빠는 현금인출기가 아니야’ 출간 기념 토론회에서 “쌍용차 투쟁 과정에서 절실히 느낀 것은 노조의 사회적 고립과 지역사회와의 소통과 나눔의 부재였다”며 “평소에 ‘나만 살자’고 하다가 정작 내가 다급해져서 ‘함께 살자’고 했던 것은 아닐까 되새겨진다”고 말했다.

조 국장은 “노조 내부에 ‘사회부’라도 만들어서 지역사회와 부단한 연대를 촉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조합운동의 혁신과 대안을 논의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공장 담장을 넘어 지역사회와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그만큼 다양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공공노조 광주전남지부의 경우 노동자들의 문제를 지역사회와 함께 해결하는 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2007년 3월 외주업체 변경으로 해고통보를 받은 광주시청 청소용역 노동자 20여명의 복직투쟁은 그해 내내 지역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노동위원회의 부당해고 구제신청 등 제도적 해결방법이 꽉 막힌 상태에서 지부는 처음부터 지역시민·사회단체와 적극적인 연대를 통해 ‘민주·평화·인권도시’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권 유린’의 현장을 낱낱이 고발했다.

지역사회의 공감대를 지렛대 삼아 광주시민단체협의회라는 중재자를 내세웠고, 결국 440일 만에 고용보장 약속을 받아 냈다. 이러한 성과는 이후 광주시 서구청 대형폐기물·재활용처리 업무를 수탁하고 있는 (주)수진환경 노동자들로 이어졌다.

이들은 민간위탁 문제를 단순히 고용불안이나 노동조건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시민단체와 정치권·지역언론까지 결합한 지역네트워크를 구성했다. 자치단체 수행업무의 민간위탁에 대한 연구와 토론·제도개선 투쟁도 전개했다.

노조가 지역사회와 연대와 나눔을 실천하는 사례는 다양하다. 대우조선노조는 매년 노조창립기념일에 지역주민 1만여명이 참가하는 축제를 연다.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는 노사가 공동으로 어린이도서관을 지어 기증하기도 하고, 한국노총과 함께 울릉도 같은 도서벽지 청소년들에게 국제문화 체험 캠프도 연다. 금속노조 기아차지부 광주지회는 구례군농민회·조선대 학생회·화엄사 스님들과 함께 ‘통일쌀 공동경작단’을 만들어 6만6천제곱미터의 논에 벼농사를 짓고 있다. 가을에 수확한 쌀은 북한에 전달한다.

“노동조합을 재구성하자”

사실 노동조합이 지역사회에 공헌하거나 연대하는 사례를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웬만한 대공장 정규직노조라면 낮은 단계든, 높은 단계든 사회적 연대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혜성·일회성사업에 그칠 경우 노조로서는 ‘생색내기’ 외에는 남는 게 없다는 것이다.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노조는 지역에서 일종의 사회단체이기도 하다”며 “ 지역의 환경·문화운동이나 지방자치단체 감시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상시적으로 지역운동을 추진하는 것이다. 현재 노조의 지역사회 활동이 취약한 만큼 인력과 재정을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조합원들이 지역조직에 가입해 스스로 활동하면 저절로 관심이 높아질 것이라는 게 오 실장의 설명이다. 정규직-비정규직처럼 노동자 내부연대와 더불어 지역-노조 간 연대를 통해 공동의 힘을 축적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민주노총은 노조와 지역본부가 사용할 수 있는 사회연대운동 매뉴얼을 올 연말까지 제작해 보급하겠다는 계획이다.

김태현 정책실장은 “총연맹 차원에서 ‘조중동OUT’이나 ‘4대강 사업 저지’ 등의 의제를 중심으로 사회연대운동의 유형을 개발하고 있다”며 “지역과 사업장에서도 각자 역할에 맡게 할 수 있는 사회연대운동을 체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연대는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계층 사이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며 “지역사회와의 연대 못지않게 노동자 내부의 계급적 단결을 위한 활동도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에는 기존 노조의 설계부터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노동운동의 반성과 혁신 차원으로는 지금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김진억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국장은 “지금의 산별노조를 단시간 내에 변화시키기는 어렵다”며 “다수의 비정규, 중소·영세, 청년, 실업노동자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업종을 불문하고 지역에 기반한 초기업적노조를 만들어 사회적 생존권 투쟁과 생활문화운동·사회운동이 결집하는 새로운 노조운동을 모색하고 실험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적과 녹이 손잡고, ‘착한 소비자’와 만나고
오는 29일부터 31일까지 동국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는 청년 일자리 문제를 재조명하고,‘녹색 일자리’ 정보를 제공하는 ‘2009 녹색일자리 한마당’이 열린다. 양대노총과 농민단체·생활협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 등 30여개 조직이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지난달 23일 발족식을 열었다.
추진위는 “녹색 농업·녹색 건축·녹색 공동체 등 녹색 일자리의 신규 창출과 확대, 기존 일자리의 녹색화 등을 종합하고 체계화해서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정보와 선택 기회를 제공해 줄 필요가 있다”며 “녹색 경제·녹색 일자리야말로 가장 강력한 사회안전망이자 유일한 현실의 대안”이라고 밝혔다.
녹색일자리 한마당에서는 ‘녹색 일자리와 노동조합의 정의로운 전환’을 주제로 한 워크숍도 진행된다. 교토의정서에 따라 우리나라가 이산화탄소 의무감축국이 될 경우 일자리는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워크숍에서는 ‘정의로운 전환을 통한 녹색 일자리로의 이동 전략과 최소한 기후변화 대응 일자리 전략을 준비하는 노동조합의 슬기로운 대처방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네덜란드나 호주 등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낯선 경험인 ‘적-록연대’가 녹색일자리를 화두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와 함께 ‘착한 소비’를 지향하는 움직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정무역이나 공정여행 등의 소비자운동이 노동조합과 만날 경우 폭발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지난해 원진노동환경연구소와 민간서비스연맹이 주축이 돼 벌인 ‘서서 일하는 서비스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도 성공한 사례다.
대형마트나 백화점의 ‘고객’(그들의 직장에서는 ‘노동자’인)을 상대로 서비스노동자에게 의자가 왜 필요한지 설득함으로써 의자캠페인은 효과적으로 진행됐다.
신용카드에 부착할 수 있도록 제작된 ‘서비스노동자에게 의자를’이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는 다른 업종의 노조나 여성단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공장의 담장을 허물고 나올 때 ‘노동’은 다양한 사회 문제와 결합된다.
교육·의료·주거 문제는 물론 성이나 생태·소비 등 일상적 영역에서 시민들과 마주할 때 발랄한 상상력과 풍부한 감수성은 덤으로 따라올 것이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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