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가 들썩이고 있다. 한국노총 상임지도부 전원이 15일 삭발했다. 앞으로 산별대표자·지역본부 의장들도 삭발을 결의할 예정이다. 한국노총은 이날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총파업과 정책연대 파기까지 결의했다. 민주노총도 같은날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한국노총과의 연대방안을 논의했다. 민주노총 산하 사무금융연맹은 지난 14일 대의원대회에서 2박3일 간부파업을 결의했다.

심상치 않은 노동계의 움직임에는 까닭이 있다. 하반기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복수노조-전임자임금’ 문제 때문이다. 원인은 정부가 제공했다. 정부는 최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조항을 내년 1월에 시행하겠다고 못 박았다. 게다가 “노사가 합의해도 법 시행 유예는 안 된다”고 압박했다.

임태희 노동부장관도 취임과 동시에 이 문제를 거론했다. ‘복수노조 허용-전임자임금 지급금지’ 문제는 현행법을 보완해 예정대로 내년에 시행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더 이상 시행 유예는 없다”는 전제조건도 달았다. 뿐만 아니라 기획재정부와 노동부 고위 관계자들은 대기업 노무담당 임원을 차례로 소집해 “예정대로 법을 시행하니 준비하라”고 통보하기도 했다. 한국노총은 청와대 내 경제팀을 중심으로 별도 회의체를 구성해 노사 단체를 배제하고 이 문제를 다루는 방안을 추진했다는 의혹까지 폭로했다.

정부가 노사단체를 압박하고 나선 것은 나름대로 배경이 있다. 경영계의 경우 찬반이 엇갈려 의견일치를 이뤄 내기 어려운 조건이다. 시행 유예로 의견을 통일했던 과거의 경영계가 아니다. ‘복수노조와 전임자임금’ 문제를 두고 대기업 집단들의 이해관계가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의 행보는 법 시행에 반대하는 대기업부터 ‘가지치기’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바탕으로 노동계를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정부는 그간 한 일이 별로 없다. ‘100만 해고 대란설’을 제기하며 비정규직법 개정에 역점을 뒀는데, 그것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되레 정부가 제기한 ‘대란설’이 허구로 밝혀져 낭패만 보고 말았다. 정부는 ‘복수노조-전임자임금’ 문제를 후순위로 미루고,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의 논의를 존중하겠다고 밝혔을 뿐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다. 국회에 비정규직법 개정안을 내고 적극적으로 나섰던 태도와는 정반대 모습이다.

그런 정부가 이제 와서 ‘현행법대로 시행하겠다’고 압박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정부 역할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정부 주도로 법안을 내도 노사단체를 설득할 자신이 없다고 고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각에선 법 개정을 주도한 정부가 비정규직법 개정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다 보니,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노사단체가 세 차례 합의로 법 시행을 13년간 미뤄 온 것에 대한 불신도 컸을 것이다. 노사단체가 대화로 풀자고 하면서 법 시행 유예나 폐기만 고려한다는 지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 내용을 음미하면 시행을 유예해 온 노사단체의 요구가 틀린 것만은 아니다. 노조법상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임금 지급금지 조항에 대해 노사단체가 합의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법 제정 당시부터 문제를 제기했고, 시행을 유예하는 합의만 했을 뿐이다. 노동계는 복수노조를 허용하되 창구단일화에 반대했고, 경영계는 교섭창구를 단일화하되 그 방식은 다수대표제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노동계는 전임자임금지급을 노사자율로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경영계는 완전 금지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노사단체의 입장을 고려할 때 현행법대로 시행한다는 것은 혼란만 불러올 뿐이다. 일각에선 큰 혼란은 없을 것이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노사단체가 새 질서에 적응할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러한 발상은 말 그대로 ‘모험주의’다. 법 시행에 따른 시행착오와 혼란을 줄이려 시범사업을 벌이는 상황에서 왜 노조법은 예외가 돼야 하나. 지금부터라도 노사정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노사정이 13년간 논의해 왔고, 그동안 나왔던 해법을 다시 검토해 하나씩 합의해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때마침 한국노총이 민주노총을 포함한 6자 회담을 제안했다. 정부는 한국노총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노동계의 투쟁 선포를 ‘본선을 대비한 예선 기세싸움’ 정도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이대로 가다간 노정 간 극한 갈등이 불가피하다. 정부는 노동법을 날치기 처리해 양대노총의 총파업을 촉발한 96~97년 노동법 개정 파동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동계는 지금 절박하다. ‘복수노조-전임자임금’ 문제가 노조활동의 활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새로운 노사관계 지형을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사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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