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어떤 점에서는 혁명보다 더 고통스럽다. ‘파괴’ 없는 ‘건설’이란 여간한 인내와 끈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금속노련 위원장이 되면서 내가 결심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정정당당한 싸움은 끝까지 지원한다. 둘째, 부당노동행위가 일어난 현장에는 반드시 조직을 붙인다. 셋째, 현장중심주의, 다시 말해 조합원과 유리된 노동조합은 개선시킨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개혁의 요체였다.
그러나 정세는 이미 ‘복수노총’ 시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한국노총이 이제까지 누려 오던 독점적 지위를 잃는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금속노련 내부에서도 엄청난 혼란이 연출됐다. 하지만 역사는 갈라졌다 뭉쳤다를 반복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조직이 분열되는 아픔은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개혁의 기회로 삼았다.
한국노총은 ‘조직 이탈’을 겪으면서 거듭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드는 생각이 있다. 만일 전노협이 민주노총으로 가지 않고 한국노총에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렇게 볼 때 민주노총이야말로 한국노총의 개혁을 가장 많이 도운 ‘우군’이었다. 그 민주노총이 벌써 몇 년째 ‘혁신’이라는 화두와 씨름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힘에 부치는 때가 많았다. 특히, 모토로라코리아노동조합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회사가 ‘무노조’를 고집하면서 부당노동행위를 참 심하게 했다.
삼성을 ‘타깃’으로
모토로라코리아 노동자들은 1987년 12월 노동조합을 설립했다가 회사측의 집요한 파괴공작 끝에 강제로 해산당한 뒤 1년 만에 노동조합을 다시 출범시켰다. 이때 마침 국제금속노련 허만 레브한 사무총장이 회의 참석차 서울에 왔기에 그와 함께 노조결성보고대회에 참석했다. 그 직후에도 회사측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며칠 동안 사무실에서 밤늦게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김장선 부위원장이 노진귀·신은철·강연택(조직부 차장) 등과 현장에 나가 지원임무를 맡았다.
회사측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조합원들이 농성 중인 회사식당 출입구를 산소용접기로 용접해 막아 버리는가 하면, 여성조합원들까지 무차별로 폭행했다. 폭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회사 바깥으로 쫓겨난 노동자들이 회사로 들어가기 위해 온몸에 시너를 뿌리고 회사로 돌진하자, 구사대는 라이터불을 들이댔다. 사람 잡겠다는 방화였다. 위원장을 포함해 간부 네 명이 끔찍한 화상을 입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은 큰 흉터가 남았다.
그러나 경찰은 방화범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방화를 규탄하던 조합원들과 금속노련 간부들을 연행했다. 밤늦게 사무실로 연락이 와 부랴부랴 성동경찰서로 뛰어가 보니, 그들은 구사대에게 얻어맞아 엉망이 돼 있었다.
나는 웬만해서는 다급한 표시를 내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이때는 다급함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우리와는 다른 일로 성동경찰서에 와서 서장을 기다리고 있던 단병호·김근태씨와 박영숙 평민당 부총재 등이 나더러 ‘먼저 만나보시라’며 양보했을 정도였다. 서장에게 ‘회사가 부당노동행위를 한 것인데 노동자를 연행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고 따졌고, 간부들은 새벽녘에 경찰서를 나올 수 있었다.
모토로라코리아노동조합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회사의 부당노동행위와 폭행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다루도록 만들었고, 국제금속노련은 부시 미국 대통령 앞으로 공개서한을 보냈다. 국제금속노련은 월스트리트저널 1면에 다국적기업 모토로라를 비난하는 광고까지 실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대체 무슨 연줄이 있는 것인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상상을 초월하는 회사의 부당노동행위 앞에 우리는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노동자대투쟁으로 잠시 얼이 나간 것 같던 자본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였다. 사업장 곳곳에서 부당노동행위가 판을 쳤고, 조직이 있는 곳에서 특히 심했다.
1988년 11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 해고자들이 유령노조 설립에 항의하며 한국노총에서 농성에 돌입했고, 현장에서는 파업이 일어났다. ‘유령노조 해산과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성명서 발표, 전경련 앞 집회, 삼성본사 앞 규탄대회, 불매운동 등 갖은 압력을 다해도 삼성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이럴 때 상급단체인 금속노련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실력대결 외에는 길이 없었다. 금속노련은 1989년 1월29일 대학로에서 ‘노동탄압 분쇄 및 89년 임투 승리를 위한 결의대회’를 열었다. 한국노총 산하조직으로는 사실상 최초의 대규모 시위였다. 그리고 이날 대회의 ‘타깃’은 바로 삼성이었다.
“아니, 박 위원장 이럴 수 있나?”
금속노련이 중앙위원회에서 집회 열기로 결의하자 안팎에서 거센 압박이 들어왔다. 한국노총 사무총장 출신으로 당시 노동부차관으로 있던 이용준씨(작고)가 가장 강경했다. “아니 박 위원장 이럴 수 있나? 집회를 강행하면 구속시킬 수도 있다.” 그 서슬에 놀랐는지 한국노총도 만류했다.
내부에서도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요컨대 조합원들이 몇 명이나 오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있었다. 어쩌면 이날을 위해 그 많은 현장을 돌았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주저앉으면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다면 개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결국 우리는 대회를 강행했다.
안팎의 압박과 우려 속에서 열린 대회에는 금속노련 조합원 1만2천여명이 참여했다. 대회는 기업의 부당노동행위와 정부의 경찰력 개입을 규탄하며 열띤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이날 내빈으로는 당시 여소야대 정국하에서 초선 의원들이 대거 참석했다. 금속노조 위원장 출신 김병용 의원, 전국광산노조 부위원장 출신 유승규 의원, 훗날 대통령이 돼 얼마 전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한 노무현 의원 등이 조합원들 앞에서 인사를 했다.
삼성본관 앞에서 진행한 이건희 삼성 회장 화형식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시위용 차량을 끌고 본관 앞으로 진출하려는데 남대문경찰서장이 막아섰다. 옥신각신하다 “불상사가 일어나면 책임질 거요?”라고 따졌다. 그러자 서장이 움찔했다. 이를 놓치지 않고 “비켜 주면 우리도 계획한 것만 하고 가갔다”고 말하자 경찰도 물러났다.
우리는 시위용 차량을 삼성본관 앞에 대고 차량 위에서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한 뒤 이건희 회장 화형식을 시작했다. 그런데 불을 댕기자마자 삼성본관 근처 빌딩 옥상에 대기하고 있던 회사측 경비원들이 물대포로 불을 꺼뜨렸다. 예상치 못한 대응이었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화형식 못하면 우리는 여기서 못 나간다!” 결국 경찰이 회사측 경비원들을 통제했고, 우리는 화형식을 성공리에 진행했다.
이 집회와 관련해 후일담이 두 개 있다. 몇 년 뒤 큰아들이 취직을 할 때였다. 나는 금속노련 위원장으로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잘 챙겨 주지 못했다. 하루는 큰아들이 취직시험에 떨어졌다는 얘기를 했다. 삼성에 취직시험을 쳤는데 면접에서 아버지가 뭐 하시느냐고 물어보길래 “금속노련 위원장”이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 뒤로는 아무 것도 묻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오너의 화형식을 주동한 집안의 아들을 받아 줄 정도로 너그러운 회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아비가 노동운동 대장인데 자식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 삼성에 취직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야, 이놈아, 그 뭐 하러 거기 시험을 쳤나?”고 꿀밤을 먹였더니 아비 마음을 아는지 큰아들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서 차근차근 설득을 했다. “얘야, 취직을 하려면 조직이 있는 곳이 낫다.” 큰아들은 내 말대로 노동조합이 있는 대기업에 취직해 지금까지 잘 다니고 있다.
“도시락부터 준비하세요”
당시 화염병과 쇠파이프가 난무하던 이른바 ‘전투적 노동조합’들의 가두시위와 비교하면 이날 집회는 매우 평화적이었다. 하지만 금속노련으로서는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무용담이 없을 수 없었다. 다음날 금속노련 간부들이 무용담을 늘어놓는데 뭔가 이상했다. 최루탄을 엄청나게 마셨다는 것이다. 무용담을 늘어놓다가 대오에서 이탈한 것까지 자백(?)한 셈이다.
사실인즉, 이날 대학로에서는 우리 말고도 대학생들의 전대협 집회가 열렸다. 집회를 끝내고 삼성 건물로 가기 위해서는 도심을 가로질러 이동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전대협 시위와 섞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동경로에 신경을 많이 썼다. 대학생들은 경찰과 충돌해 최루탄 세례를 받았지만, 금속노련 간부들은 우리 대오를 그대로 따라왔다면 최루탄 냄새를 맡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대오를 이탈했다가 콧물을 흘린 것이다. 어이도 없고 괘씸도 해서, 한마디 했다. “당나라 군사도 아니고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잘 됐다. 최루탄 맛이 좋더냐?” 두번째 후일담이다.
개혁에 속도가 붙었다. 위원장이 마음만 먹으면(?) 바꿀 수 있는 관행은 모두 바꿨다. 당시 금속노련 대의원대회는 기념식을 위주로 하고, 안건은 일괄적으로 간단히(?) 처리하는 게 관행이었다.
내가 금속노련 위원장이 되자, 참모들은 이구동성으로 “제발 점심시간 됐으니까 대의원대회를 끝내자고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다. 나 역시 20개가 넘는 안건을 박수로 한꺼번에 통과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느끼던 바였다.
대의원대회 전에 도시락을 넉넉하게 준비시켰다. 도시락까지 준비해 놓고 장시간 토론 준비에 들어가자 그동안 대의원대회에 와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어도 발언 한번 하지 못하고 돌아갔던 대의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안건을 일괄처리하지 않은 최초의 대의원대회에서 대의원들은 할 말을 다 했고, 집행부의 안은 원안대로 통과됐다.
대의원대회가 길어지는 것을 가장 염려했던 이들은 황당하게도 기관원들이었다. 금속노련을 출입하던 직원들은 “대의원들이 할 말 다 하면 집행부 안대로 사업계획이 통과되지 않고 아주 시끄러워질 것”이라고 오히려 자기들이 더 걱정을 했는데, 이들의 우려와는 달리 대의원대회는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욕하몬 들어야지 뭐”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노동조합들이 많이 생겼다. 이들은 스스로 ‘민주노조’라 부르며 1970년대부터 있었던 노동조합들과 자신을 구별하려 했다. 직선제로 당선된 집행부일수록 그랬다. 이들은 ‘개혁’을 인정하지 않았다.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1988년 임금협상에서 이영복 위원장이 직권조인을 해 버렸다. 이 위원장은 금속노련 부위원장이기도 했는데,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 차원에서 벌인 현대중공업 구속자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에도 불참했다. 이 위원장은 노동자들에게 어용으로 몰렸고, 결국 1989년 자타가 공인하는 ‘민주파’인 이상범씨가 위원장에 당선됐다.
“연맹이 꼭 참여해야 되는 자리는 아니니까 안 가셔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대자동차노동조합 위원장 이·취임식이 열렸는데, 금속노련 위원장에게도 초청장이 왔다. 참모들은 의례적으로 초청을 했을 수도 있으니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어쩌면 망신을 당할 수도 있는 자리였다.
“욕 하몬, 욕 들어 묵어야지 뭐.”
부위원장 한 명과 단 둘이서 현대자동차노동조합으로 갔다. 단상에 앉아 둘러보니 한국노총 산하 노조나 대표자들은 한 명도 없었다. 내빈 소개 순서가 됐다.
“한국노총 금속노련 박인상 위원장 오셨습니다.”
조합원들이 야유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별일 없었고, 금속노련 위원장이 한마디 하는 순서가 됐다.
“지금 여러분들은 현대자동차노조의 투쟁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대자동차 공장 바깥에는 20만명이 넘는 자동차 부품업체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노동자는 하나입니다. 그 사람들도 대우받는 노동자가 돼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게 제대로 된 노동운동입니다. 그렇게 할 때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의 위력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하청업체 노동자와 함께 투쟁하세요”
내 말이 끝나자 2만여명의 조합원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내 뒤를 이어 마이크를 잡은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 단병호 의장도 “박인상 위원장께서 좋은 말씀을 해 주셨다”며 공감을 표시했다. 기아자동차노동조합에서도 비슷한 자리가 있었다. 그때는 권영길씨와 마주쳤다. 현대자동차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동차산업의 특성상 하청업체 노동자들과 공동투쟁을 해야 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대한조선공사와 금속노조 철공분회에서 잔뼈가 굵은 나는, 노동조합조차 만들 수 없는 하청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대기업 노동조합이 먼저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금속노련 위원장이 된 뒤 현장을 돌면서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었다. 노동자대투쟁으로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이 오른 반면에 하청업체는 단가가 깎이게 됐는데, 그것 때문에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의 ‘임’자도 꺼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속노련에서 지역별로 대기업 노동조합 간부와 하청업체가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다. 하지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대기업 노동조합에서 발을 뺀 것이다. 하청업체의 실정을 들은 대기업 노동조합 간부들이 회사에 문제제기를 했는데, 회사로부터 돌아온 답은 ‘당신들한테 득 될 게 없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실 제대로 된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도 힘이 부치는데, 하청업체 문제까지 안고 가자면 얼마나 벅차겠는가. 금속노련에서도 이 문제를 집요하게 추궁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10년, 20년이 흐르면서 대기업 노동자와 하청업체 노동자 간 임금격차는 엄청나게 벌어졌다. 상대적으로 돈을 많이 받는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가난한 노동자가 생겨난 것이다. 돌이켜 보면, 대기업 노동조합이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 전체 노동자들을 위해, 우리나라 산업의 고질적인 병폐를 고치기 위해 싸웠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대기업 노동조합들이 비난과 질시, 그리고 외면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하청업체 노동자들과 공동투쟁을 해야 한다는 내 연설에 공감을 하며 발을 구르던 현대자동차노동조합 조합원들의 박수소리를… 그 노동자들의 용기와 정의를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이라고 믿는다. <계속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