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와 시장독재

군사독재는 ‘군대의 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군대라는 물리적 힘을 근거로 권력을 잡고 그 권력의 힘으로 모든 것을 제압하는 체제다.
시장독재는 ‘시장의 원리’를 핵심으로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형식적으로 자유와 경쟁을 보장하지만 사실은 ‘정글의 생존법칙’을 강요한다. ‘군대’라는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돈’이라는 새로운 폭력을 사용한다.

군사독재는 권력을 쥔 독재정권에 협력하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권력으로부터 배제하면서 민주주의를 말살했다. 국민은 대통령을 뽑는 투표권도 가지지 못했다.
시장독재는 시장의 경쟁 속에서 돈을 가진 사람을 제외한 모두를 배제하고 생존권을 박탈했다. ‘중산층의 몰락’이나 ‘사회 양극화’는 시장독재에서 비롯됐다.

‘시장만능시대’라고 하는 정도면 모를까 서슬 퍼런 군사독재와 비교해 ‘시장독재’라고 하는 것은 너무 과도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군사독재에 의한 재야인사 탄압과 투옥, 시민에 대한 학살에 못지않게 시장이라는 독재자도 학살을 일삼아 왔다.   

대한변호사협회는 ‘2003년 인권보고서’에서 300만명이 넘는 실질빈곤층이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고, 생계형 자살이 2000년 786건, 2001년 844건, 2002년 968건, 2003년 상반기 408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고 밝혔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07년 국내 자살 사망자수는 1만2천174명으로 하루 평균 3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어렵다는 IMF 때보다 두 배나 많다.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2008년 3월 언론들은 자살보험금이 한해 수백억원이나 돼 보험사가 골치를 앓고 있다고 보도했다.

2008년 생계형 자살이 늘어나 ‘외환위기 때보다 더 위험하다’는 언론보도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08년 10월8일 광주 광산구 신창동 모 원룸 2층 창고에서 자식에게 신발도 사 줄 수 없는 현실을 비관한 주부 이모(27)씨 자살, 이어 22일 충남 공주 모 보험회사 지점장 자살, 23일 남편이 부도를 내고 끌어다 쓴 사채 4천만원마저 날린 서울 신림동 주부 자살, 25일 광주 북구 모 아파트 A(47)씨 집 화장실에서 A씨가 목을 매 자살, 같은해 12월10일 빚을 갚지 못한 부산의 고물상업주 자살, 1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여행업체 사장(38) 자살 등 생계형 자살에 대한 보도가 줄을 이었다.

2009년 3월2일 ‘시사IN’은 ‘죽음의 행렬 막을 안전망이 없다’면서 2월14일 김아무개(40)씨가 생활고로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 사건을 비롯해 서울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서 서른이 넘도록 취업을 못해 비관자살한 대학원생 이아무개(33)씨, 4호선 한성대입구역 선로에 뛰어든 허아무개(56)씨 등의 자살을 보도했다. 특히 2009년 초부터 2월15일까지 지하철에서 목숨을 끊은 사람이 11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언론은 자살에 대한 충동이나 심리치료만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사회안전망’이 시급하다고 얘기한다. 생계형 자살은 ‘정글의 생존법칙’이라는 시장의 논리, 경쟁의 논리가 낳은 사회적 타살이기 때문이다.

시장이라는 독재자는 폭력적인 정리해고를 통해 노동자와 사회 전체를 ‘고용불안증’에 빠뜨렸다. 더 큰 아파트와 더 많은 사교육비를 요구함으로써 노동자들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한 잔업·특근으로 내몰았고 ‘공장감옥’의 프레임을 만들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분리해 서로 갈등과 반목을 불러일으켜 ‘1등보다 미운 10등의 법칙’을 정착시켜 독재자인 자신에 대한 도전을 막아 왔다.

2009년에도 시장의 힘은 막강하다. 경제위기 속에서 “기업이 살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며 ‘정리해고 반대’를 외치는 노동자들을 짓밟고 있다. 

‘시장의 힘’은 반독재·민주화 세력이라고 했던 김대중·노무현과 같은 사람들을 자신의 독재체제에 협력하도록 만들었다.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을 ‘좌파정권’이라고 하는 것은 난센스 중의 난센스다. 민주화운동 세대라고 하는 386정치인들도 상당수가 돈의 힘에 굴복해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등 새로운 독재에 협력했다. 시장이 지배하는 세상은 한때 투사였던 노동조합의 간부와 활동가들까지 흡수해 입사비리를 비롯한 돈의 마법에 빠져 들게 하였다.   

군사독재든 시장독재든 독재라는 점에서는 같다. 구체적인 원리가 다르다고 주장한다면 그에 맞서는 대응전략과 대응주체의 모습도 달라야 할 것이다.
 
공장적 전략 vs 사회적 전략

군사독재를 뚫고 민주노조를 만들면서 정착된 공장적 전략과 시장독재에 맞서기 위한 사회적 전략은 발상에서부터 실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서로 다르다. 공장은 생산하는 곳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공장을 지배해 온 생각은 ‘더 많은 생산’ ‘더 빠른 생산’이다.

공장적 사고방식에서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일단 ‘늘려야’ 한다. 생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소비를 늘려야 한다. 과잉소비, 사치와 낭비는 미덕이다. 반면에 소비를 책임지는 하나의 단위로서 가계는 경제위기가 오면 ‘줄이기’부터 시작한다. 기업도 물론 줄인다. 비용절감을 외치고 나아가서는 구조조정을 통해 일부를 잘라낸다.

가계는 줄이되 나눈다. 집안이 어렵다고 자식을 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고 나눈다. 실직한 형제가 있으면 도움을 주고 나누면서 버틴다.
‘구조조정 반대’라는 구호는 공장 안에서의 저항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노조가 내건 ‘함께 살자’는 주장은 공장을 넘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된다.

생산라인의 공장조직은 권력 중심의 수직적·위계적·남성적인 문화를 갖고 있다. 자본이 유연생산체제를 목 놓아 부르짖지만 실제 유연생산체제는 시장의 변화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훨씬 강력한 권력적 생산방식이다.
사회는 꾸준하게 변화하고 있다.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권력은 공격받는다. 소통하지 못하는 남편은 버림받는다.

최근 온라인에서 소통의 흐름이 커지고 있다. 공장적 집회와 시위문화는 식상해 지고 있지만 공장 밖에서 흘렀던 촛불은 이 시대 새로운 저항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공장의 힘에 의존한 투쟁은 사회적으로 고립돼 공격받고 있지만, 거리로 흐르며 소통의 장벽을 넘고 부수며 만들어 가는 사회적 힘은 더 강력한 희망을 만들고 있다.

경제성장의 시대에 가졌던 파업의 힘은 경제위기 시대에 과거만큼 힘을 가질 수 없다.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와 비정규직, 청년실업자 등 이미 거리로 내몰린 수많은 노동자와 민중이 있다. 높은 성을 쌓고 살다가 대공장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벌이는 구조조정 반대투쟁은 예전만큼 지지를 받지 못한다. 

파업은 공장을 넘어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사용돼야 한다. 만약 파업이 공장 밖의 노동자와 민중들과의 소통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은 목적을 상실한 파업이다. 그런 파업은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이제 ‘공장이라는 성 안에 갇히는 전략’은 버려야 한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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