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인플루엔자 환자가 급증하면서 온 나라가 비상이다.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최근 신종플루 감염 사망자 소식이 끊이질 않는다. 신종플루를 계기로 공공의료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다. 정부의 지침에 따라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공공병원에 시설만 제대로 갖춰져 있었더라도 신종플루 확산을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많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0일 대표적인 공공병원인 지방의료원 가운데 신종플루 격리병동을 운영하고 있는 수원시 정자동 경기도의료원 수원병원 야간병동을 찾았다.


밤 10시 수원병원 6층 병동. 마스크를 낀 최보미(24) 간호사가 빠른 손놀림으로 환자들의 차트를 확인하고 있다. 여유가 없어 보여 말 붙이기가 쉽지 않다.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 일하는 ‘나이트’근무(야간근무) 때는 간호사 두 명이 한 층(30~45병상)을 책임진다.

“인력이 부족하니까 간호사가 커버해야 하는 업무가 너무 많아요. 물 마실 시간도 별로 없어요.”
전산화가 아직 덜 돼 있어 손으로 해야 하는 서류작업이 한두 개가 아니다.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는 간호사들에게 방광염은 한 번쯤 거쳐 가는 통과의례가 됐다. 6층 한쪽은 신종플루 환자들만 입원해 있는 격리병동이다.

수원병원은 수원지역에서 처음으로 신종플루 환자를 받았다. 외부인은 물론 보호자의 면회도 철저히 금지된다. 환자도 외부로 나올 수 없다. 격리병동에는 3명의 확진환자가 입원해 있었다. 이날도 신종플루 의심증세를 보인 환자 한 명이 추가로 입원했다.
“처음에는 환자도 의료진도 정보가 별로 없는 상황이어서 당황스러웠어요. 보건소 직원과 함께 병원에 온 환자들은 격리병동에 입원시키니까 ‘왜 자기를 가둬두냐’고 항의하고….”

최보미 간호사는 “보건소에서 병원으로 오는 과정에 신종플루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듣지 못한 환자들이 격리입원을 시키자 기분을 나빠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거점병원이기 때문에 환자들이 와서 치료받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해요. 다만 신종플루는 정부 차원에서 관리해야 하는 병인데도 그에 상응하는 공공병원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것은 아쉬운 점이죠.”

‘엄마’ 간호사들의 고민

밤 11시 2층 중환자실 앞. 박혜진(36) 간호사의 남편이 아들(4)과 딸(2)의 손을 잡고 중환자실을 찾았다. 아내에게 야참으로 샌드위치와 커피를 건네기 위해서다. 돌봐 줄 사람이 없어 시댁에 맡긴 아들을 일주일 만에 봤지만 엄마는 아들을 안아 줄 수가 없다. 병원균에 감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엄마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병원 밖으로 나섰다.

“아이를 둔 간호사들은 3교대 근무하기가 참 힘들어요. 저녁 6시 이후에는 아이들을 맡아 주는 곳도 거의 없고…. 우리 아들은 엄마랑 같이 사는 게 소원이래요.”
중환자실에서는 박 간호사와 주정희(27) 간호사가 9명의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대부분 보호자가 없는 70~80대 노인들이다. 주로 국가유공자나 의료급여·시설보험·요양급여 환자들이다. 중증 환자들이기 때문에 환자들의 침대 위에 달린 모니터와 중앙모니터를 보며 심장박동수와 혈압·산소포화도를 꼼꼼하게 체크한다.

“머리도 잘 돌아가고 일을 잘하는 3년차”라는 선배의 칭찬을 들은 주정희 간호사가 능숙한 솜씨로 환자의 가래를 뽑아냈다.
“폐에 염증이 있는 분이신데 기침을 못하시니까 계속 가래가 생겨요. 다른 병동에 비해 감염 위험이 높은 편이죠.”

중환자실 업무는 ‘체력전’이다. 욕창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90킬로그램이 넘는 환자를 계속해서 체위를 바꿔 줘야 한다. 중환자실에 근무하는 간호사 가운데 허리 통증이 없는 사람이 드물다.
“담배를 못 피워서 금단증상이 일어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환자들도 있어요. 간혹 환자에게 맞기도 해요.”

중환자실은 환자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살펴야 하기 때문에 밤에도 불을 끄지 않는다. 낮과 밤이 따로 없는 것이다. 그때 치매가 있는 정아무개(87) 할머니가 연신 뭐라고 손짓을 하며 말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어렵다.
“뭘 원하시는 지 모르니까 저희도 답답하네요. 그런데 중환자실에는 오래 계시는 분들이 많으니까 환자들과 유독 정이 들죠.”

3층 소아과·외과 병동에서 만난 박유진(36) 간호사와 백미정(34) 간호사 역시 아이의 엄마였다. 4살·6살 아이를 둔 박 간호사는 “아이들이 어린데 같이 있어 주지 못하니까 정서적인 문제가 가장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나마 위층에 언니가 살아 다행이라고 했다. 남편이 있지만 밤에는 유독 엄마를 찾는 것이 아이들의 특징. 3살 아이를 둔 백 간호사는 “갓난아기 때는 남편이 아기를 잘 못 봐서 24시간 어린이집에 맡기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민이 가장 먼저 찾는 지방의료원

이튿날 새벽 2시 응급실. 인수인계가 끝나지 않은데다 환자들로 북적여 취재가 쉽지 않았던 전날 밤 10시와는 달리 다소 한산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 듯 신연덕(36) 간호사의 목소리는 잠기다 못해 쉬어 있었다. 눈은 충혈됐다. 서수원 지역에서 응급실 환자가 가장 많이 찾는 병원 중 하나가 수원병원이다. 이 시간까지 172명의 환자들이 응급실을 찾았다. 그런데 야간시간에 근무하는 간호사 역시 단 두 명. 그나마 응급센터 개소를 몇 달 앞두고 지난주에 간호사 1명이 충원돼 트레이닝(훈련)을 받고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개소하기 전에 미리 채용해 훈련을 시키는 경우는 이례적이라고 한다.

“주말에 근무할 때는 아예 밥 먹을 생각은 안 해요. 화장실도 잘 안 가고요.”
생리량이 많은 날 응급실에서 일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모른다. ‘사고가 터지기 직전’에야 어쩔 수 없이 화장실로 달려간다.
추석 연휴에는 이른바 ‘도떼기 시장’을 방불케 한다. 민간병원들이 문을 닫기 때문이다. 주말엔 술에 만취해 119 구급차에 실려오는 환자들이 많다.

“응급환자가 아닌 행려환자가 오기도 해요. 추석 때 119 대원이 거의 매일 오다시피하는 행려환자를 데려왔는데, 응급실에 사람이 너무 많아 도저히 진료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어요. 노숙인보호시설로 데려가 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렸는데, 진료거부하는 거냐고 말씀하셔서 속상했죠.”

현재 10개 병상만 있는 응급실은 조만간 20개 병상의 응급센터로 확장된다. 수원병원에서 근무한 지 12년째라는 신 간호사는 “항상 정체된 모습만 보였던 병원이 최근 증축하는 걸 보면서 마치 우리집이 리모델링하는 것처럼 뿌듯하다”고 기뻐했다. 강정아(33) 간호사에게 열심히 트레이닝을 시키고 있던 김명선(29) 간호사도 “센터로 가서 공간을 넓게 쓸 것을 생각하니 너무 기대된다”고 말했다.


낮과 밤이 뒤바뀐 노동자들

원무과에서 접수·수납 업무를 보는 김진섭(28)씨는 이날도 병원 앞 편의점까지 뛰어갔다왔다. 술에 취한 환자가 돈을 내지 않고 그냥 가 버렸기 때문이다. 남들과는 달리 야간근무를 하는 그에게 힘든 점은 무엇인지 물었다.

“3년 동안 차례를 못 지냈더니 아버지께서 호적에서 파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예상보다 ‘센’ 대답이 돌아왔다.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야간근무를 하는 노동자들의 고충이 그대로 묻어난다.

야간병동 하면 주로 응급실에 있는 의사와 간호사가 떠오르지만 알고 보면 많은 노동자들이 밤을 낮 삼아 일하고 있다. 응급환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엑스레이를 찍는 방사선과와 혈액검사실·약제과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그렇다. 1층 현관을 지키며 응급환자들의 이송을 돕던 김형배(49)씨는 용역업체 소속이다. 환자를 안내하고 술 취한 환자들을 통제하기도 하고 순찰도 해야 한다. 사업·장사·경비 등 안 해 본 일이 없다는 김씨는 수원병원에서 일한 지 두 달이 됐다.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20분까지 만만찮은 노동을 해야 한다. 그는 “급여가 좀 적긴 하지만 병원 직원들이 잘 대해 줘 일은 할만 하다”고 말했다.

응급차를 운전하는 남기윤(45)씨 역시 멀티플레이어다. 운전뿐만 아니라 병원 건물에 비가 새면 수리도 하고 매주 목요일 수원역에서 하는 무료진료 업무도 돕는다.
“아무래도 공공병원이다 보니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요. 응급 치료를 마치면 집에 데려다 주기도 하고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은 공익근무요원하고 같이 목욕을 시켜드리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람을 느끼죠.”

업무 특성상 노숙자를 자주 본다는 남씨는 “치료를 마치고 다시 길거리를 헤매는 노숙자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병원 행정업무를 하다가 환자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간호대학에 다시 들어갔다는 임은순(35) 간호사는 “나이가 들었을 때도 남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남들이 모두 잠든 시각 공공병원 최전선에서 노동자들이 눈코 뜰 새 없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병원 주위의 아파트 사이로 새벽의 푸른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공공병원도 일반 대학병원들처럼 진료를 본다면 적자를 보지는 않을 거예요. 같은 질병이어도 민간병원과 공공병원의 1인당 진료비는 확연히 차이가 나죠.”
지방의료원이 있는 지역의 병원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싸다는 말이 있다. 과잉진료를 하지 않는 지방의료원이 진료비의 표준을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 10일 밤 경기도의료원 수원병원 지부 사무실에서 만난 윤지숙(36·사진) 지부장은 “공공병원이 의료의 표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방의료원은 민간병원보다 의료급여환자·행려환자 등 서민층이 많이 찾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과잉진료를 하기 어렵다. 불가피한 적자가 발생하는 것이다. 지방의료원은 기본적으로 자체 수익으로 운영되지만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일정 정도 지원을 한다. 중앙정부가 10억원을 지원하면, 해당 지자체도 10억원을 지원하는 구조다. 하지만 시설은 여전히 역부족이다.
“처음 신종플루 환자를 받을 때 격리병동이 없었어요. 환자 3명을 받기 위해 병동 한 층을 비워 둬야 했죠. 신종플루 환자를 치료한 비용에 대해서는 정부가 지원을 해 준다고는 하는데 병동을 비워 발생한 손실은 지원해 준다는 얘기가 없네요.”
신종플루와 관련해 정부의 의료인에 대한 특단의 대책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가 있는 의료인은 속수무책이죠. 신종플루에 감염됐을 때 병원에서는 집에서 쉬라고 하는데, 집에는 아이들이 있잖아요. 독감 백신의 경우도 일선에서 일하는 의료인이 우선 접종받아야 하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하고요.”
윤 지부장은 “공공병원에서 일하는 가장 큰 장점은 환자를 돈으로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라며 “조금만 시설을 제대로 갖춘다면 지방의료원이 다른 병원에 모범이 되는 의료의 표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미 기자


우리나라에는 34개 지방의료원과 6개 적십자병원이 있다. 이를 ‘지역거점공공병원’이라 부른다. 공공병원은 채산성이 없는 전염환자와 행려환자, 재활·요양환자를 치료한다. 현행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공공병원은 채산성 때문에 민간이 기피하는 서비스나 공공보건의료사업을 해야 한다. 하지만 중앙·지방정부의 재정보조는 미약하다. 이주노동자와 새터민, 오갈 데 없는 행려환자를 치료해 주는 곳은 그나마 공공병원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안전망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스대란’의 교훈은 어디로=공공병원이 없을 경우 정부정책 집행은 용이하지 않다. 지난 2004년 사스대란을 겪은 정부가 공공병원에 대한 지원과 육성사업을 제대로 했다면 신종플루를 겪으면서 우왕좌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부가 신종플루 치료 거점병원을 지정할 당시 일부 민간의료기관들은 지정을 거부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지방의료원의 경우 예산부족으로 인해 전염환자 치료를 위한 음압시설을 갖춘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민간병원에서 치료를 거부당한 환자들은 지방의료원으로 몰려들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공공의료 병상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인 11%에 불과하다. 공공병원 비율이 최소 30% 수준이 되고, 제대로 된 지역거점병원이 정부의 체계적인 예산지원을 받으며 운영됐다면 초동대응을 통해 신종플루 확산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정부, 내년 예산 대폭 삭감=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내년 지방의료원 지원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정부의 내년 예산을 보면 지방의료원과 적십자병원 기능강화 지원을 위한 예산은 올해 448억원에서 내년 259억원으로 42.2%나 감소했다.
보건의료노조가 소속 27개 지방의료원에 대한 경영분석을 실시한 결과 현재 상태에서 민간병원 수준으로 의료급여환자를 받고 민간병원 수준의 진료비를 받으면 대부분 흑자로 전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병원이 과잉진료를 하지 않고 공공의료 역할을 했다는 증거다.
따라서 공공병원이 공공의료를 수행하면서 발생한 적자는 정부의 몫이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예산지원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부자 감세와 4대강 정비사업으로 구멍난 예산을 서민복지 예산삭감으로 메우려 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배경이다.
전혜숙 민주당 의원은 지난 8월 ‘지역거점의료기관 지정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발의했다. 주요 내용은 우리나라 248개 시·군·구별로 1개 이상의 의료기관을 지역거점병원으로 지정해 만성질환·응급환자 관리뿐만 아니라 신종플루와 같은 전염병 예방 같은 공익적 보건의료서비스를 공급하자는 것이다. 조현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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