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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40년, 박인상 회고록 (23)[제8부]‘개혁’의 선봉장으로 [제2편] “금속노련 위원장 박인상입니다”
1988년 5월, 나는 금속노련 위원장이 됐다. 노동자를 둘러싼 상황은 1970년대와는 전혀 달랐다.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민주화’가 이뤄졌고, 노동조합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88년 한 해만 무려 2천56개의 노동조합이 생겼다. ‘개혁’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됐다.
개혁은 어떤 점에서는 혁명보다 더 고통스럽다. ‘파괴’ 없는 ‘건설’이란 여간한 인내와 끈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금속노련 위원장이 되면서 내가 결심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정정당당한 싸움은 끝까지 지원한다. 둘째, 부당노동행위가 일어난 현장에는 반드시 조직을 붙인다. 셋째, 현장중심주의, 다시 말해 조합원과 유리된 노동조합은 개선시킨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개혁의 요체였다.
그러나 정세는 이미 ‘복수노총’ 시대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것은 한국노총이 이제까지 누려 오던 독점적 지위를 잃는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금속노련 내부에서도 엄청난 혼란이 연출됐다. 하지만 역사는 갈라졌다 뭉쳤다를 반복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조직이 분열되는 아픔은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나는 개혁의 기회로 삼았다.
한국노총은 ‘조직 이탈’을 겪으면서 거듭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드는 생각이 있다. 만일 전노협이 민주노총으로 가지 않고 한국노총에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렇게 볼 때 민주노총이야말로 한국노총의 개혁을 가장 많이 도운 ‘우군’이었다. 그 민주노총이 벌써 몇 년째 ‘혁신’이라는 화두와 씨름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자리가 자리이니만치 동지들의 뜻을 받들겠다고 말하고는 부산에 돌아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먼저 김장선 동지가 눈에 밟혔다. 공교롭게 건강도 좋지 않았고, 부산시협 의장이 공석이 돼 부산에서는 나를 의장 물망에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번복을 했더니, 경인지역 개혁파들은 아예 ‘후보추대대회’라고 판을 벌이고는, 이석행과 한독노동조합의 정영숙 위원장 같은 후배들까지 총출동시켜 나를 조였다.

“이날을 위해 3년을 기다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울로 왔더니 김성문 동지가 혼자 나와서는 근처 다방으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김성문은 나랑 한 살 차이로 동지이자 친구 사이였다.
“차라리 노동운동 끝내자. 나도 그만하고, 너도 끝내고.”
“….”
“내가 이날을 위해 3년을 기다렸다! 금속노련에서 힘이 들어도 버텼는데….”

1985년 선거에서 우리가 고배를 마신 뒤 김성문은 민정식 집행부의 기획실장을 맡았다. 눈총을 얼마나 받았겠는가.
“우리 할 일이 금속 개혁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냐? 이제까지 노총 위원장들이 제조업 출신이 아니니까 제조업이나 작은 노조의 어려움을 실감하지 못한 거야. 금속에서 빨리 기반을 잡고 노총으로 들어가야지!”

이건 설득을 넘어 숫제 ‘공갈’(?)이었다. 김성문의 시야는 이미 금속을 넘어 한국노총을 향해 있었다. 나는 결국 ‘항복’을 하고 말았다.

우리는 1988년 5월 금속노련 임원선거에 다시 도전했다. 현직 위원장인 민정식씨도 출마했다. 지난번 선거와 마찬가지 구도였다. 당시 표 차이는 10표. 노동자대투쟁 뒤 새로 설립된 노동조합과 그 대의원들의 성향으로 미뤄 짐작할 때, 이른바 ‘민주개혁후보’로 불렸던 나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았다.

마침내 움켜쥔 금속 깃발

정세는 확실히 우리에게 유리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노동자대투쟁 이후 설립됐거나, 집행부가 바뀐 민주노조들 가운데 상급단체에 맹비를 납부하지 않는 곳이 많았다. 금속이라고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대의원을 배정받지 못한다. 선거도 하기 전에 표를 날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맹비를 납부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불신이었다. 실제로 마산과 창원의 노동조합들은 1987년 12월 일찌감치 마산창원노동조합연합(마창노련)을 결성해 상급단체인 금속노련보다는 지역연대투쟁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다. 1988년 봄이 되자 ‘한국노총 개혁론’을 훨씬 더 앞질러 가는 ‘제2 노총론’도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민주노조에는 선배들의 권위가 통하지 않았다. 이때 이석행이 나섰다. 대동중공업이 있던 진주와 마산·창원은 가깝다. 이석행은 마창노련에 가입한 노동조합 위원장들에게 이번 금속노련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마창노련은 운영위원회를 열어 금속노련에 밀린 맹비를 납부하고 선거에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마창노련 가입 사업장인 대림자동차·코리아타코마·삼미금속·한국중천·한국스타 등이 결의한 대로 움직였다. 마창노련 가입 노동조합은 아니지만 마창지역의 기아기공·현대정공·오성사·한국중공업도 표를 모아 줬다.

지난 선거 때는 경남에서 고작 4표를 얻었을 뿐인데 이번에는 무려 20표 넘게 불어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선거 때 큰 도움을 줬던 통일중공업은 대의원을 파견하지 못했다. 1985년 문성현 위원장이 구속된 뒤 해마다 큰 싸움을 치르면서 노조 간부들이 줄줄이 해고·구속됐기 때문이다.

울산의 현대 계열사 노동조합들도 함께 움직였다. 울산 역시 따로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을 결성해 금속노련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심상히 넘길 수 없는 일화가 하나 있다. 임원선거 하루 전날, 김성문은 아예 고속버스터미널에 나가 있었다.

‘표심’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승패는 ‘얼마나 많이 투표에 참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서울 영등포 영화여관에 차려 놓은 캠프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김성문이었다.

“현대자동차노조에서 한 차 타고 왔다!”

한 차까지는 아니었다. 현대자동차 대의원은 12명이었다. 단일사업장으로는 금성사 대의원이 37명으로 가장 많았는데, 그 다음이 현대자동차였다. 얼마나 마음을 졸였으면 다짜고짜 ‘한 차 타고 왔다’고 전했을까. 승리는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다음날인 5월27일, 재적 대의원 325명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금속노련 임원선거 1차 투표에서 우리는 181표를 얻어 민정식 후보를 40표 차이로 꺾고 금속노련의 깃발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에 취해 있을 시간은 없었다.

“금속노련 각성하라!”

당선된 다음날 아침이었다. 금속노련 사무실로 들어섰다. 분위기가 싸늘했다. 조합원 20여명이 사무실을 점거한 채 농성을 하고 있었다.

이 일은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떤 문제가 생겨서 그것을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라 금속노련의 각성을 촉구하는 시위였다. 일부러 임원선거에 맞춰 농성을 시작한 것 같았다. 주축은 구로공단 조합원들이었다. 실무자들은 연신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마치 ‘출근 첫날부터 못 볼 것을 보여 드려 죄송하다’는 표정이었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이번에 위원장이 된 박인상입니다.”

농성 중인 조합원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피하는 게 능사가 아니다. 노사(勞使)든, 노정(勞政)이든, 심지어는 노노(勞勞)든, 노동조합운동은 마주 보고 대화를 해야 실마리가 풀린다. 금속노련이 잘못한 게 있으니까 조합원들이 몰려온 것이다.

“그동안 금속노련이 잘한 게 없습니다. 금속노련 부위원장이었던 저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제가 금속을 개혁하겠다고 나서 이번에 당선됐지만 개혁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할 때만이 개혁할 수 있습니다. 저의 의지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요구조건을 내걸어 주십시오. 문제는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조합원들도 일면 수긍하는 듯했다. 조합원들 뒤에 서울지역노동자협의회 단병호 의장의 얼굴이 보였다. 단병호씨에게도 ‘잘하겠으니 지켜봐 달라’고 말했다. 단병호씨는 전날 치러진 임원선거 때 내게 먼저 다가와 “승리하십시오”라고 인사를 전했다. 금속노련 개혁에 관심이 높은 것 같았다. 그 다음날 사무실에 나갔더니 농성 조합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도 깨끗이 청소해 놓았다.

바둑판과 룸살롱

금속노련 위원장에 당선된 뒤 임원과 간부, 상근실무자들에게 첫 번째로 주문한 게 “바둑판은 내다 버리고, 룸살롱이나 요정에 가서 술 마시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당시 금속노련 간부들이 사무실에 앉아 바둑이나 두다가 해가 지면 고급술집에서 술 마시고 놀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바둑은 집중을 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집중은 당연지사고, 그러다 보면 바둑판에 확 빠진다. 조합원들이 어려운 일이 있어 사무실로 찾아왔는데, ‘한 수만 더 두고’ 일어서자며 뭉기적거리는 간부를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바둑유해론’을 펴게 됐는데, 아무튼 바둑이 나쁜 게 아니라 정신상태가 문제인 것이다.

룸살롱이나 요정은 바둑과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금속노련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그 당시 기관원들은 요즘 매일노동뉴스 출입기자들처럼 날마다 사무실로 왔다. 처음에야 경계를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한잔하자’는 청을 뿌리칠 수 없게 된다. 그럼 기관원들은 꼭 비싼 집으로 데려간다. 회사 관계자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이게 노동조합을 잡는 것이다. 사람이란 얻어먹은 만큼 토해 내게 돼 있다.

나는 금속노련 위원장에 출마하면서 결심한 게 있었다. 첫째, 정정당당한 싸움은 끝까지 지원한다. 둘째, 부당노동행위가 일어난 현장에는 조직을 붙인다. 셋째, 현장 중심주의, 다시 말해 조합원과 유리된 노동조합은 개선시킨다. 이 세 가지야말로 개혁의 전제였고, 우리 동지들이 선거운동을 하면서 현장과 대의원을 설득했던 논리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기관원들의 출입을 막고 간부들이 그들과 사사로이 만나는 것 자체를 금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때가 때인 만큼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하실에 탁구대를 들여놓고, 점심시간에 바둑 대신 탁구를 치도록 했다. 기관원과 어쩌다 어울리게 되더라도 막걸리나 소주 이상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소주를 마시면 부담도 덜하고, 청하는 쪽에서도 자주 마시자는 얘기를 못하게 된다. 우리가 술값을 낼 수도 있다. 파고들 틈이 없어지는 것이다. 나 역시 금속노련 위원장을 하면서 기관원들과 술을 마셨지만, 그때마다 사무실 앞 식당에서 소주를 마셨다. 쫀쫀하다면 쫀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혁이란 게 원래 ‘대포’만 쏘아 대서는 되지 않는 법이다.

“인사(人事)는 당신들 소관이 아니지 않소?”

다음 일은 인사(人事)였다. 당연히 개혁파들이 전진배치돼야 했다. 나의 당선을 위해 뛴 참모들이 집행부에 들어왔다.
김장선은 임원으로 상근 부위원장이 됐고, 김성문은 사무처장, 정학균은 기획실장, 최웅길은 조직국장, 정영숙은 여성국장, 이석행은 교육부장을 맡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개혁파들이 ‘숙청’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이 지목한 것은 금속노련에 있던 A씨였다. 그때만 해도 노동조합 신고필증을 받으려면 발기인 30명 이상에 상급단체의 인준이 있어야 했는데, 이 조항을 악용하는 사례가 가끔 있었다.

실제로 1987년 7월 현대자동차의 경우 A씨가 인준서류를 빼돌리는 바람에 노동자들이 추진한 노동조합이 아니라 회사측과 가까운 노동조합에 신고필증이 발부된 적이 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었다. 그러니 ‘개혁파’들이 ‘자르자’고 주장할 만했다.

당사자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런 답이 나왔다. “제가 그렇게 했다면 천벌을 받습니다. 아시다시피 인준서류를 제 마음대로 들고 나가 아무 데나 갖다 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나 역시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배후는 더 먼 데 있었다. 이제 개혁파들을 설득할 차례였다.
“사람은 안 자른다. 설사 잘못을 했더라도 그것은 윗사람의 잘못인데, 밑에서 뛰어다닌 사람을 자를 수는 없다. 사람 내친다고 개혁이 당장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끼리 하는 게 개혁이 아니다. 아는 사람들이 참아 주면 좋겠다.”

사람은 품었지만, 문제가 있는 조직은 과감하게 정리했다. 서울지역지부가 문제였다.
구로공단에 있는 노동조합들은 서울지역지부가 노동조합 활동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지역지부의 간부들이 스스로 해결하도록 여러 차례 설득을 했지만 잘 먹히지 않았다. 오랫동안 활동했던 간부들을 포함해 과감하게 정리를 했다. 중앙위원회를 열어 서울지역지부를 사고지부로 규정하고 이후에 재결성하도록 했다.

거꾸로 ‘개혁적인 인물’들도 문제가 됐다. 내가 당선되자 기관원들은 노진귀 국제부장이 서울대에 다닐 때 학생운동을 했다는 ‘전력’을 들먹이며 “잘라야 한다”고 요구했다.

나는 “사람 쓰고 안 쓰고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지 당신들 소관이 아니지 않소?”라고 거절한 뒤, 오히려 그를 노사대책국장으로 승진시켰다. 그리고 김금수씨의 소개로 피정선을 데려와 국제부장을 맡겼다. 피정선 부장은 서울대 출신으로 한국노총 국제부 차장을 하다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인재로 당시 노동계에 흔치 않은 ‘국제통’이었다. 서울대 운동권 출신인 신은철이 공개채용으로 들어온 것도 이때였다. 그는 홍보부 차장이 됐다.

‘보수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교육부장이 된 이석행을 공격했다. “이석행 말고는 교육부장이 없습니까?” 보수파들 입장에서는 자본과 정권을 비판하는 이석행의 교육내용도 가뜩이나 눈에 거슬리는데, 한술 더 떠 노태우 대통령을 ‘노가리’라고 천연덕스럽게 불러 댔으니, 경기를 일으키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이석행은 그 뒤로도 교육을 계속했다.

“현장으로 가라!”

금속노련 위원장으로 출사표를 던질 때 내 모토는 ‘현장 중심주의’였다. 나는 전국을 돌고, 또 돌았다. 간부들에게도 무조건 현장으로 가라고 했다. 이제까지 내 경험에 비춰 보면, 현장은 노동조합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조직·정책·자금 그리고 민주주의까지…. 이 모든 것들이 조합원들이 있는 현장에서 나왔다.

1988년 5월27일 금속노련 위원장이 된 뒤 7월16일부터 9월26일까지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전국의 11개 지역지부를 다니면서 조합원들을 만났다.
지역별로 단위노동조합 간부들과 현안을 중심으로 회의를 가졌고, 잘되면 잘되는 대로 잘 안 되면 잘 안 되는 대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놓고 머리를 맞댔다.

내가 워낙 술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럴 때만큼은 술을 자제했다. 다음날 일정에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나면 바로 다음 지역으로 이동했다. 한 번은 밤에 광주에 도착해 다음날 아침에 대구로, 그날 오후에 울산으로, 이렇게 강행군을 했더니 운전기사가 코피를 쏟았다. 1989년 말까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내가 승용차로 돌아다녔던 거리만 21만km였다.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이번에는 승용차가 나가 떨어졌다. 구미에 있는 오리온전기를 방문해 대의원대회에 참석한 다음 출발을 하려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대의원들에게 차를 밀어 달라고 부탁을 해서 겨우 출발을 했다.

그 모습이 보기가 딱했던지 오리온전기 대의원들이 중앙위원회에서 ‘위원장 차 바꿔 주자’고 발의를 했다. 그 덕분에 쌩쌩한 새 차가 생겼고, 그 차로 또 전국을 돌았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었다. 김장선 부위원장도 열심히 다녔다. 김 부위원장은 주로 거제와 울산을 맡았다. 그 지역에는 대우중공업·삼성중공업·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등 굵직한 사업장들이 있었다. 김 부위원장이 고생을 많이 했다.

내가 이해를 못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늘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노동조합 위원장이다. 잘났든 못났든, 흠이 있든 없든, 위원장이 현장에 나타나면 조합원들은 반갑다.
눈만 맞추고 손만 잡아도 조합원들은 기뻐한다. 왜 그걸 모를까. 아이들도 자기 형이 나타나면 절로 어깨가 으쓱해진다. 굳이 관리자들에게 큰소리치지 않아도, 조합원들은 위원장이 현장에 나타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의 실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어디를 간들, 누구를 만난들, 이런 환대를 받을 수 있을까. 이게 바로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하는 맛이자, 즐거움이다. 그런데 왜 이런 자리를 외면하고 책상머리에 앉아 혼자 고민할까. 상급단체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단위노동조합 차원에서 풀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급단체 위원장이 현장에서 씨름을 하면, 조합원들은 대통령도 필요 없다고 할 게 틀림없다.
현장의 조합원들과 간부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됐다. 금속노련 조합원은 금속노련이 무엇을 하기를 원할까?

그 답은 우리가 출마했을 때 간직했던 ‘초심(初心)’ 그대로였다. 첫째, 정정당당한 싸움은 끝까지 지원한다. 둘째, 부당노동행위가 일어난 현장에는 꼭 조직을 붙인다. 셋째, 현장 중심주의, 다시 말해 조합원과 유리된 노동조합은 개선시킨다.<계속 이어짐>

박미경 객원 기자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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