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이 넘어 세상이 무서울 게 없어요. 근데 나가 가정을 말하라면 겁나게 복잡해 부려요."
영화 '외박'에 등장한 김금덕(56) 홈플러스테스코노조 조합원이 머리를 긁적이며 영화 관람 후 이같이 소감을 말하자 객석은 웃음바다가 됐다. <외박>은 설거지가 힘들어 죽겠다는 남편 손에 끌려가는 등 가정과 일터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이랜드노조 전 조합원들의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독립영화 단체 인디포럼은 지난 29일 저녁 서울 명동 인디스페이스 극장에서 조합원들과 함께하는 영화 '외박' 상영회를 개최했다.


◇조합원들이 말하는 외박="우리처럼 행복한 투쟁이 또 있을까요?" 정미화(48) 조합원은 외박을 이같이 소개했다. 정씨는 "많은 연대단체의 지원과 관심을 받고 진실의 이면인 다른 세상을 알게 돼 정말 행복했다"며 "덕분에 지금은 잘못된 것에 대해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사실 '행복한 투쟁'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씨는 사회가 부여한 엄마로서의 역할이 내내 마음을 짓눌렀다고 토로했다.

"지방 순회투쟁을 다니느라 고등학생 아들 둘을 챙기지 못했어요. 엄마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지금도 죄책감으로 남아 있어요."
정씨는 "전 변해서 돌아갔는데, 남편·가정·일터·사회는 하나도 변한 게 없어 요즘도 하루하루가 투쟁"이라고 말했다.

이날 영화를 관람한 이랜드노조 전 조합원들은 20명이었다. 한 달 전 미리 정해지는 고정휴무제로 인해 갑자기 시간을 빼기 힘든 탓이다. 20명 중 19명은 뒤풀이에 참석하지 못하고 곧바로 귀가했다. 아침 7시에 출근하려면 늦어도 새벽 4시에는 일어나 아이들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남편 출근준비를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일터에서 투쟁한 것처럼 가정에서도 원더우먼을 요구받았던 우리의 역할과 권리에 대해 정당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해요."
이경옥 전 이랜드노조 부위원장은 외박을 통해 이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일터는 '나'로서 존재하게 만들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며 "영화를 본 여성노동자들이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하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주문했다. 김경욱 전 이랜드노조 위원장은 "투쟁을 하면서도 밥이 어디서 나오고 식사가 어떻게 준비되는지 몰랐다"며 "저도 몰랐던 조합원들의 얘기가 담긴 영화”라고 귀띔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외박=영화는 1박2일의 설레는 외박이 510일의 긴 파업으로 이어진 여정을 담았다. 남편에게 외박을 허락받은 조합원들이 매장 바닥에 누워 수다를 떠는 첫 장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끝날 때까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경쾌한 탱고 음악이 흐른다. 8박자 구호를 제각각 외치고, 중무장한 전경들 앞에서 콩나물을 씻고, 오 선생(관할 경찰)과 방담을 나누고, 경찰력 앞에서 온몸을 떠는 등 예측불허의 모습이 펼쳐진다.
"아줌마가 뭐예요! 같은 동지로서 여성노동자로 불러 주세요."

'노동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무서웠다'는 조합원들은 이석행 전 민주노총 위원장의 '아줌마' 발언에 일침을 놓을 만큼 변해 갔다. 생계비를 버는 것이 주요 투쟁활동으로 전락하는 동안 연대 단위의 다양한 정파, 연대 방법 등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상처를 받는 조합원들의 모습은 향후 노동운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감독이 말하는 외박="처음엔 노동과 자본, 가부장 체제하 여성노동 등의 도식화된 시선으로 접근했다가 변화무쌍한 조합원들을 보며 세상을 보는 다양한 시각을 배웠어요. 그저 '가슴 아프다'는 정도의 감상을 넘어 외박으로 끝날 수밖에 없던 구조에 대해 토론이 시작됐으면 해요."

김미례(45) 감독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 노동자가 안고 있는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현 노동운동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며 "여성들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알고 행복해지는 만큼 가정이 힘들어지는 구조에 대해 사회적 고민이 시작됐으면 한다"고 주문했다. 영화 '외박'은 '노동자다 아니다'·'노가다'에 이은 김 감독의 세 번째 영화다. 이달 10일과 15일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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