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실장
노동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직업성 암 때문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온 바 있다. 2007년 미국 산업의학회지에 실린 한 논문에 따르면 세계 노동자 사망의 32%는 직업성 암 때문이었다. 순환계질환(26%)와 업무 중 사고(17%)가 그 뒤를 이었다. 이 결과에 따르면 세계에서 매년 약 60만명의 노동자가 직업성 암으로 사망하는 것으로 매 1분마다 한 명의 노동자가 죽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유독 한국에서 직업성 암은 큰 관심거리가 아니다. 매년 극히 소수만이 산업재해로 인정되고 전체 산재인정 건수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매우 낮다. 우리나라와 경제활동인구규모가 비슷한 유럽 주요 국가에서는 매년 1천~2천건이 인정되는 데 반해 한국은 수십 건에 불과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노동자들이 어떤 물질이 발암물질인지 모르기 때문에 현직 또는 퇴직 후에 암이 생겨도 산재신청이 불가능하다. 다음으로 정부의 발암물질 규정과 직업성 암 인정기준이 지나치게 협소한 것을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외국은 발암물질, 우리나라는 아냐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미국보건복지부 독성프로그램(NTP)·미국정부산업위생전문가협의회(ACGIH) 등 다수의 기관에서는 발암물질을 주기적으로 평가하고 확인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식의 발달로 물질의 발암성이 새롭게 확인되면 이를 반영해 정보를 제공한다. 기관에 따라서는 수백 가지에서 천 가지가 넘는 물질을 발암물질로 공표하고 있다.

불행히도 한국은 이와 같은 노력이 부족하다. 외국의 최근 연구결과를 반영해 제도를 정비하고 정책을 수행하려는 의지도 부족하다. 이런 탓에 외국에서는 이미 발암물질로 인정됐는데 국내에서는 여전히 발암물질이 아닌 것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필자가 방문한 한 자동차 부품 사업장의 노조 간부는 다음 사례를 들려줬다.

“현장에 가스가 심하고 환기장치도 없어 노동자들이 숨 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노동부에 현장을 지도·감독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쭉 둘러보더니 한 개 공정에만 국소배기장치를 설치하라고 얘기하고 가던데요?”

해당사업장에서 사용하는 물질을 검토해 보니, 총 5개 물질이 외국에서 인정하는 발암물질이었다. 국내 기준으로는 한 가지만 발암물질이었다. 노동부 직원은 국내에서 인정하는 발암물질을 사용하는 공정만 시정지시하고 끝난 것이다. 회사 안전관리자와 노조 간부들도 나머지 4가지 물질이 발암물질이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올바른 정보 생산과 유통 절실

직업성 암 예방의 최선책은 ‘사전예방 원칙’을 도입하는 것이다. 잠재적으로 암을 일으킬 수 있는 물질을 노동현장에서 근원적으로 제거(대체)하거나 부득이한 경우 노출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발암물질에 대한 올바른 정보가 생산되고 노동자와 사업주 모두에게 전달돼 소통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4월 노동조합·시민환경단체·전문가 등 100여명이 참여해 발족한 발암물질감시네트워크는 발암물질 감시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발암물질의 최근 자료를 종합해 사회에서 우선 관리해야 할 물질목록을 작성 중이다. 노조와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7월부터 두 달간 전국 약 30개 사업장의 발암물질 진단을 실시하고 있다. 결과는 올해 안에 노동자·시민에게 소개될 예정이다.

우리 사회에서 발암물질 감시운동이 성공할 수 있을까. 답은 현장노동자에게 있다. 민간 차원의 발암물질 감시운동에서 노동자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노동자는 일반 시민에 비해 훨씬 높은 농도와 잦은 빈도·장기간 동안 발암물질에 노출됐다. 그리고 노동자 역학조사 결과를 통해 많은 물질의 발암성이 확인됐다. 암의 최대 피해자가 노동자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문제해결은 노동자 자신이 취급하는 물질을 의심하고 확인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것에서 시작돼야 한다. 현장에서 발암물질을 적극 감시하고 관리하는 것은 시민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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