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 1년. 경제가 빨리 회복되고 있다는 장밋빛 전망이 대세다. 반면 노동자의 가계부는 여전히 빠듯하다. 금융위기로 반 토막 났던 펀드는 최근 올랐지만 아직 원금을 회복하지 못했다. 물가 수준을 감안하면 한 달에 버는 돈은 크게 줄었다. 금융위기로 허리띠를 잔뜩 졸라매며 고단한 살림살이를 이어왔던 노동자들. 노동시장에서 이탈한 후 재취업의 희망마저 잃어버린 고용취약계층들. <매일노동뉴스>가 금융위기 1년 동안의 그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1. 은행에서 계약직 사원으로 일했던 허유란(가명·51·여)씨는 올해 1월 일자리를 잃었다. 은행에 정규직으로 취직해 외환위기 때 명예퇴직한 후 은행에서 비정규직 사원으로 일했던 허씨. 은행은 계약기간 만료라 했지만 허씨에겐 두 번째 당하는 정리해고와 다름없었다. 비슷한 일자리를 구하려 백방으로 뛰었지만 금융위기로 사람을 구하는 곳이 적었다. 일자리를 잃은 지 6개월이 지나면서 실업급여마저 끊기자 이것저것 가릴 수가 없었다. 최근 시급 4천원을 주는 일자리는 구했다. 무슨 일을 하느냐 물었더니 “창피해서 말도 못하겠다”며 “막노동에 가까운 단순노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답했다.
그는 “기존에 일했던 비슷한 업종에 재취업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고 눈높이를 낮춰도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만은 않다”며 “그나마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도 끊이지 않고 지속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2. 박경호(가명·35)씨는 가구 주문이 들어오면 자신의 차로 가구를 운반하고 설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운반과 설치 수수료가 그의 수입이다. 사업등록증도 있고 직원도 한명 뒀지만, 수수료가 그의 월급과 마찬가지다.
지난해는 그나마 한 달 700만원 정도는 수입을 올렸는데 올해는 400만원으로 줄었다. 직원 1명의 월급을 주고 나면 남는 돈은 200만원 남짓이다. 박씨는 햇볕이 자주 들지 않는 반지하 10평짜리 다세대주택에서 살고 있다. 아이 때문에 습한 곳에서 살 수 없어 이사하려 하지만 수도권에서 전세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는 “은행에서 3천만원 정도를 빌릴까 생각하는데 대출도 쉽지 않고 이자부담도 걱정”이라며 한 숨을 내쉬었다.

#3. 대기업 사무직 3년차인 노동자 김정웅(가명·31)씨. 김씨는 부인과 6개월 된 아이와 함께 서울 외곽의 23평형 아파트에서 월세로 살고 있다. 연봉은 약 5천만원가량. 기본급은 160만원이고 상여금이 나오는 짝수 달에는 300만원을 받는다. 금융위기 이전에는 그나마 살기가 빠듯하지는 않았다. 회사는 올해 상여금 대신 스톡옵션(주식매수청구권)으로 직원에게 300만원 상당의 주식을 나눠 줬지만 3년 뒤에나 팔 수 있는 묶인 돈에 불과했다.
내 집을 마련하고자 부푼 꿈에 들었던 장기주택마련저축과 펀드, 보험에 들어가는 돈만 한 달에 200만원이 넘는다. 상여금 나오지 않는 달에는 생활조차 버겁다. 마이너스 수익률을 달리지만 펀드를 해약하기도 쉽지 않다. 내 집 마련이 꿈인 그는 “주택청약저축으로 일반분양을 받으려면 20년이 걸린다는 데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했다.

금융위기로 정규·비정규 노동자 모두가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월급이 적든 많든 이전 씀씀이를 줄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물가는 오르는데 임금은 하락하면서, 노동자들이 직면하는 생활고는 심각하다.

올해 실질임금상승률은 11년 만에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임금은 동결 혹은 삭감됐는데, 물가는 상승했기 때문이다. 노동부가 100인 이상 사업장 2천451곳을 조사해 집계한 올해 상반기 평균 임금인상률은 1.4%에 그쳤다.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은 3.3%. 실질임금 증가율은 -1.9%였다.

실질임금 줄고, 양극화 확대

외환위기 때인 98년 실질임금 증가율은 -11.9%로 역대 최악을 기록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후 실질임금은 꾸준히 오름세를 보였다. 금융위기가 다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하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해 들어 급등하지는 않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지난해 같은달 대비 2.0%의 상승을 기록하면서 22개월만에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상대적 임금은 더 낮아져 체감물가는 비싸졌다. 공식 통계로 집계되는 협약임금보다는 상여금과 연월차수당, 복지비와 같이 사실상 월급에 준하는 임금이 먼저 축소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이나 특수고용직·자영업자의 상대적 임금수준이 더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최근 발표한 30개국 소득 9분위 계수에서 우리나라는 4.74를 기록해 미국(4.85)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상위 분위의 소득이 최하위 소득의 4.74배에 달한다는 뜻이다. 지난 97년 3.72배에 그쳤던 우리나라의 소득격차는 10년 만에 0.72포인트가 상승해 소득불균형이 갈수록 심해지는 모습이다.

완충지대 없이 벼랑으로 내몰려

엥겔계수도 올해 들어 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가계의 명목 소비지출액 가운데 식료품과 비주류 음료품이 차지하는 비중(엥겔계수)은 12.5%로 지난해 상반기(11.7%)보다 0.8%포인트 높아졌다. 전체 소비·지출 가운데 먹고 사는 부분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곳에 여유를 두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기침체를 거치면서도 외환위기 때와 같은 대규모 정리해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청년과 고령자, 임시·일용직과 자영업자 등 고용취약계층은 심각한 고용불안에 노출됐다. 상용직 취업자 수는 오히려 늘고 있는데 취약계층의 노동시장 이탈은 지속되고 있다.

통계청이 지난 16일 발표한 고용동향을 살펴보면 상용직 취업자는 지난해 8월 910만7천명에서 올해 8월 947만2천명으로 36만5천명(4.0%)이 늘었다. 임시직도 같은 기간 497만명에서 511만7천명으로 14만7천명(3.0%)이 증가했다.

반면 일용직과 자영업주·무급가족종사자는 같은 기간 각각 6.7%(13만7천명)와 4.6%(27만6천명)·6.6%(9만7천명)가 줄었다.

대기업 상용직 고용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지만 일용직과 자영업자와 같은 취약계층은 일자리를 잃고 있는 것이다. 임시근로자 증가도 정부가 추진한 희망근로(32만명)에 따른 일시적인 효과 때문이라는 시각이 많아 안심하기엔 이르다.

청년과 고령자 실업도 심각하다. 20~29세 청년실업률은 지난해 8월 7.0%에서 올해 8월에는 8.2%로 뛰었다. 60세 이상 고령실업률도 정부의 희망근로 프로젝트 시행에도 0.9%에서 1.5%로 늘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정규직이 대거 일자리를 잃은 반면 자영업자나 임시직이 크게 증가했다. 밀려난 정규직이 자영업을 하거나 비정규직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일종의 고용완충지대는 있었던 것이다.

자영업이나 임시직은 밀려나면 곧바로 노동시장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크다. 정규직 진출은 가로막힌 노동시장의 두꺼운 벽 앞에 엄두도 못 내고 비정규직 일자리마저 줄어들면서 재취업을 할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이후 나타난 현상이다. 고용취약계층에게 고용완충지대가 없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최근 ‘우리나라 기업 고용조정 특징’이라는 보고서에서 금융위기에 따른 경기위축에 직접 노출된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등 고용시장의 소외계층을 실질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고용대책 마련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경기 회복 시 부실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본격화할 경우 고용취약계층의 고용불안은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임형석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의 일자리 나누기 정책과 희망근로 프로젝트를 통한 한시적 고용창출대책으로 아직은 취업자 수가 크게 감소하지는 않고 있다”면서도 “이제는 정부가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등 고용안정성을 제고하는 근본적인 고용대책을 수립할 때”라고 말했다.
김봉석·오재현 기자

주식시장 호황의 실체는?
정부 재정확대·외국자본 합작품
금융위기 여파로 수출·소비·고용 등 실물경제 지표가 불안하지만 주식시장은 한때 1천800포인트를 넘으면서 반등했다.
27일 금융권에 따르면 리먼브러더스 파산 직전인 지난해 9월12일의 코스피지수는 1천477포인트였다. 1년 후인 지난 11일 코스피지수는 1천651포인트였다. 금융위기 가운데서도 1년 동안 오히려 11.8%가 상승한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중 주식시장이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한 곳은 한국을 포함해 4개 나라에 불과하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를 겪으면서 9월12일부터 10월29일까지 우리나라 코스피지수가1477.9에서 968.9로 509포인트나 급락했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마저 느껴진다.
전문가들은 주식시장 호황의 실체를 두고 지난해 주가폭락을 주도했던 외국자본을 지목하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기업들의 주가 상승이 주식시장의 상승을 주도하고 있다.
주식시장의 호황은 사상 최대의 개인 금융자산 증가로 이어졌다. 한국은행이 이달 중순 발표한 ‘2분기(4~6월) 자금순환 동향’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현재 개인 금융자산은 1천825조 5천억원이다. 은행 대출금 등 금융부채는 818조4천억원으로 집계됐다.
금융자산에서 부채를 뺀 순금융자산은 1천7조1천억원을 기록했다. 3월 말(927조 2천억원)에 비해 79조9천억원(8.6%) 늘었다. 이는 2002년 말 새 통계 기준이 적용된 이래 가장 높은 증가세다. 늘어난 금융자산은 묶인 돈이라 언제든 주가나 환율 변동 등에 의해 다시 줄어들 위험을 안고 있다.
주식은 호황이지만 한국 금융위기의 뇌관으로 지목하는 가계대출의 증가는 심각한 규모다. 지난달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7월까지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은 사상 최대인 22조6천억원이다. 상반기 경제성장률이 -3.4%로 추락했음에도 주택담보대출을 포함한 예금취급 기관의 가계대출은 7.5%나 늘었다.
연구소가 분석한 가계의 채무능력 추이를 보면 가구당 평균 처분가능소득 대비 금융부채는 지난해 139.9%에서 올해 1분기 142.3%로 늘었다. 지난해 말 기준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금융부채 비율도 전년보다 2.1%포인트 늘어난 78.3%에 달했다.
이한진 진보금융네트워크 실장은 “경기 회복세의 상당 부분은 지난해 말부터 정부가 추진해 온 확장정책의 결과”라며 “수출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특성상 글로벌 경기회복이 수반되지 않을 경우 현재 경기회복은 기술적 반등에 불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오재현 기자

노동자 건강까지 빼앗는 경제위기
경제위기가 노동자의 건강까지 빼앗고 있다. 쌍용자동차 사례는 경제위기로 인한 구조조정이 노동자 건강에 어떤 피해를 주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점거파업을 벌였던 노동자들은 한 달이 지난 지금도 후유증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다.
최근 금속노조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파업 노동자의 42.8%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다. 당장 정신과 진료가 필요한 고도 우울증 환자도 41%에 달한다. 지난 14일 새벽에는 올해 마흔 살인 평택공장 한 해고노동자가 베란다에서 목을 매 자살을 기도했다. 그는 점거농성 후 경찰의 강압수사와 생활고 때문에 힘들어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쌍용차의 구조조정은 4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임상혁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은 “자살을 시도한 조합원이 보인 증세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전형적인 현상”이라며 “마음이 약하거나 강한 것과 상관없이 나타나는 질환이 외상 후 스트레스”라고 말했다.
질 낮은 일자리와 산업재해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정부가 “경제위기를 넘어 국민에게 희망을 주겠다”며 실시한 희망근로사업은 실시 3개월 만에 무려 1천200명의 재해자를 발생시켰다. 조현미 기자
이윤석 민주당 의원이 지난 23일 행정안전부로부터 제출받은 ‘희망근로 참여자 안전사고 현황’에 따르면 6월부터 이달 초까지 1천200명이 출근 혹은 작업을 하던 중 사고를 당했다. 이 가운데 23명이 사망했고, 중상재해자와 경상재해자도 각각 209명과 968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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