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을 하면서 내가 꿈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혁명이었을까. 아니다. 나의 노동운동은 이념에서 출발한 게 아니었다. 그것은 삶의 욕구에서 비롯됐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노동자라는 자긍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노동조합을 하다 보면 피치 못하게 노동자로서 자긍심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과 만날 때가 있다. 타협도 해야 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눈물을 머금고 ‘항복’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노동조합 지도자는 괴롭다. 성질 같아서는 확 뒤집어 버리고 싶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분기(憤氣)만 갖고는 되지 않는다.
자유당 시절 노동조합 조합원이 돼 군사정권 때 노동조합 간부로 노동운동에 입문했고, 유신과 ‘5공’을 거치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패배감과 굴욕감을 맛봤다. 그러나 나는 시간은 결국 우리 편이라고 믿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자는 늘어난다. 파업을 못하게 하면 조직을 했고, 조직을 못하게 하면 교육을 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내가 꿈꿨던 것은 개혁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노동조합이 힘든 때가 또 있을까. 민주화 이후 노동조합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실력 이상의 약속을 너무 많이 남발한 것도 사실이다. 발상의 전환이 지나쳐도 곤란하지만, 노동조합이 자신의 실력도 모른 채 깃발을 흔든다면 그것만큼 위험천만한 게 또 없다. 후배들이 꿈꾸는 게 혁명일까? 그렇다면 나는 해 줄 말이 없다. 후배들이 꿈꾸는 게 개혁일까? 그렇다면 나는 해 줄 말이 있다.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노총 부산시협 사무국장은 화려한 자리였다. 각종 기념식이나 행사·회의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일정이 빡빡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었지만, 내 체질과는 맞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시협 임원들은 근로자가요제 사회까지 보는 나를 ‘팔방미인’이라고 추켜세웠지만, 나는 노동자를 조직하고 쟁의를 지원했던 금속노조 부산지역지부 사무장 시절이 그리웠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1983년 겨울까지 철저한 강압 정책을 폈다. 사회 전체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어 있어 대학가를 제외하고는 다들 숨죽이고 있을 때였다. 신규 노동조합 설립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그러나 1984년 봄 정권이 유화정책으로 선회하자 노동자들도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기대에 못 미친 금속노련의 갈지자 행보

부산에서는 1983년 12월이 돼서야 대우정밀에서 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이 있었다. 어느 날 시협 사무실로 고향 후배가 찾아왔다. 대우정밀에 다닌다고 하면서 내가 노동조합 활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왔다고 했다. 나는 ‘옳다구나’ 하면서 그 후배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이 후배가 겁을 먹고는 다시는 나타나지를 않는 게다.

적잖이 실망하고 있을 무렵, 대우정밀에서 고향 후배와는 다른 팀들이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움직인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금속노련 이성균 사무처장과 이진우 조직부장이 부산까지 와서 노조 결성을 도왔다. 그러나 회사의 회유와 기관의 탄압에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은 어렵사리 만든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말았다.

대우정밀 노동조합은 ‘불발’로 끝나고 말았지만, 정부는 노동조합을 설립해 회사에 맞서려는 노동자들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금속노련은 이 흐름을 타지 못했다.
1984년 9월 서울 구로공단에 있는 유니전이라는 사업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구로구청은 설립신고서류를 트집 잡아 반려했고, 회사는 노동조합 결성을 주도한 여성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금속노련이 노조설립신고필증이 교부될 수 있도록 한국노총에 협조를 구하고 해고 건에 대해 구제신청을 준비하던 중에 회사측에 선 남성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일이 벌어졌다. 구로구청은 즉각 신고필증을 내줬다.

일이 이렇게 되자 유니전의 여성 노동자들은 행정소송비용을 금속노련이 부담해 달라고 요구했는데, 금속노련은 이를 거절했다. 급기야 유니전 노동자들은 금속노련 사무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협진양행에서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는데, 구로구청에서 또 트집을 잡았다. 예고된 수순처럼 회사는 노동자들을 해고했고, 이에 협진양행 노동자들은 금속노련 사무실로 몰려왔다. 상급단체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만 상처가 나고 말았다.

금속노련은 해고된 노동자들에게 복직과 노동조합 결성을 돕겠다고 약속하는 한편, 만약에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농성 노동자들에 대한 신변보호를 경찰에 의뢰했다. 농성 노동자 한 명이 아파서 점거한 방의 문을 연 사이에 금속노련 상근자들이 안으로 들어가 아픈 노동자를 병원에 보냈고, 경찰이 나머지 노동자들을 연행했다.

금속노련 위원장 출사표를 던지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곧바로 대학가와 재야단체에 알려졌고, 민청련 회원들과 노동자복지협의회 소속 노동자들이 금속노련을 항의방문했다. 서울대 학생 수십 명은 금속노련 사무실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기까지 했다.

이 소식을 부산에서 들은 나는 충격을 받았다. 유신 때 동일방직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금속에서만큼은 이런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정도로 추락했단 말인가…. 팽종출 위원장이 당선되는데 내가 약간 기여를 했기 때문에 정말 잘해 주기를 바랐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일은 또 있었다. 1984년 진주의 대동중공업 노동자들이 단체협약 갱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대동중공업 노동조합은 당시 20대 후반의 팔팔한 나이였던 이석행 위원장이 이끌고 있었다. 그때가 어느 때인가. 파업을 한다는 것은 곧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

절박하고 외로운 파업을 지키고 있던 이석행 위원장에게 금속노련의 고위 임원이 전화를 했다. 상급단체의 도움도 받기 힘든 시절이었지만 이 위원장은 ‘혹시’ 하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그 고위 임원은 이 위원장에게 대뜸 “지금이 어느 때인데 파업을 하느냐”며 “당장 파업을 집어치우라”고 펄쩍 뛰었다.

화가 치민 이석행은 대동조선의 정학균 위원장에게 하소연을 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나는 이석행과 인연을 맺게 됐다. 이석행은 젊은 날의 내 친구이자 동지였던 권오덕을 보는 것 같았다. 작은 키에 다부진 몸집, 힘이 한껏 들어간 눈, 물러설 줄 모르는 기질…. 유난히 정이 갔다. 

어쩌면 나는 이 무렵부터 금속노련 위원장으로 출마할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다. 이미 금속노련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금속노련은 독재정권으로부터 버림받기도 전에 조합원들로부터 먼저 외면당할 처지에 놓였다. 특히 금속노련 사무실이 학생들로부터 돌과 화염병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내 결심을 재촉했다.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대동조선의 정학균과 연합철강의 박기식이 출마를 부추겼다. 정학균은 경인지역 ‘개혁파’들에게 나의 출마를 의논했고, 김성문·김장선·이성균·이종복 등은 이를 흔쾌히 수용했다.

“백 가지가 궁해서 백궁장에 모였다”

금속노련 임원선거는 1985년 4월20일 열리는 대의원대회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위원장 후보는 나를 포함해 3명이었다. 팽종출 현 금속노련 위원장과 금성사의 민정식 위원장이 나섰다. 팽종출 후보는 현직이라는 점, 민정식 후보는 금성사라는 ‘전통’의 대기업 노동조합 출신이라는 게 강점이었다. 이에 맞서는 우리측의 강점은 금속노련을 개혁하자는 강렬한 의지를 가진 열성적 동지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선거운동기간은 20여일 정도였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있는 백궁장이라는 여관에 선거캠프를 차렸다. 선거대책본부장이라는 공식적인 직책을 마련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중기의 이종복이 그러한 역할을 했다. 

나는 작은 공장 출신으로 돈이 없었다. 보통 선거캠프에 사람들이 찾아오면 접대를 받고 가는 게 일반적인 경우였는데, 우리 캠프는 방문한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돈을 내놓고 갔다.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백궁장에 있는 우리 캠프는 돈이며 표며 백 가지가 궁하다”며 전의를 불태웠다.

당시 금속노련 재적 대의원은 216명이었다. 3파전이었지만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새로운 인물이 돼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사실상 민정식씨와 나의 2파전이 됐다.

문제는 내가 ‘고정표’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금성사 출신 대의원은 16명으로 한 단위사업장으로서는 최다였다. 여기에 금성 계열사인 금성알프스·금성전기·금성통신·금성전선 출신의 대의원을 더하면 34명이 됐다. 그에 비해 나는 같은 사업장 출신 대의원이 1명도 없었다. 그러니까 민정식 후보가 34표에서 시작한다면 나는 1표에서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내게는 경인지역 개혁파들의 표가 있었다. 1979년 금속노조 선거에서 한달수 후보가 얻은 표가 68표였다. 그동안 시간이 지났으니 변동이 있다손 치더라도 70표 이상은 나올 게 분명했는데, 더 이상 나올 곳이 보이지 않았다.

새 시대를 여는 사람들, 문성현과 이석행

민정식 후보는 자신의 고정표에 경인지역의 기아 계열사와 대우중공업, 여기에 창원과 울산·양산 등지의 경남지역 표까지 휩쓸 기세였다. 당시 금속노련 경남연락협의회 의장은 금성알프스의 최경환 위원장이었다.

민정식 후보측은 자금도 풍부했던 것 같다. 선거 몇 달 전에 이미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선거운동이란 게 대의원들을 모아 술대접을 하는 것이다. 최경환 위원장이 1985년 초 울산에서 경남지역 노동조합 간부들을 불러 모아 ‘한턱’을 냈다.

멋모르고 이 술자리에 갔다가 민정식 위원장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선거운동임을 알아차린 이석행 대동중공업 위원장이 냅다 고함을 질렀다.

‘민정식 위원장을 지지하지도 않는데 내가 왜 일어나서 인사를 해야 되느냐’는 게 이석행의 볼멘소리였다. 결국 이 모습을 눈여겨본 문성현 당시 통일중공업 사무장과 이석행 등이 합세해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민정식 후보측과 개혁파 사이에 결투(?)가 벌어졌다. 결투라고 해 봤자 실은 ‘뽕짝’ 대 ‘노동가요’ 노래대결이었지만. 아무튼 이렇게 돼 민정식 후보의 사전선거운동은 안 하느니만 못한 것으로 끝이 났다. 개혁파는 경인지역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나중에 민주노동당 대표라는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는 문성현을 만난 것도 선거운동 때였다.

이석행이 소개를 해 창원에 가서 문성현을 만났다. 그때는 문성현이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현장에 뛰어든 이른바 ‘위장취업자’라는 사실은 몰랐다. 문성현 같은 학생 출신 노동조합 간부는 당시 금속노련을 어쩌면 ‘타도 대상’으로 여겼을 법도 한데, 선선히 약속에 응해 창원버스터미널로 나왔다.

창원은 허허벌판이었다. 마땅히 들어갈 곳이 없어 만난 자리에 서서 내가 살아온 이야기며, 금속노련 위원장이 되면 무엇을 할 것인지 설명했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문성현은 내가 혼자 뛰어다니는 게 안쓰러워 보였던지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만 원짜리 한 장을 내 손에 꼭 쥐어 줬다. 뒷날 들으니, 문성현은 내게 돈을 주고 자신은 차비가 없어 30분을 걸어 기숙사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석행과 문성현의 말에 따르면, 경남에서 ‘박인상 표’는 통일중공업의 2표, 대동중공업의 1표, 범한금속 1표로 4표만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4표가 문제가 아니었다. 두 젊은 친구들을 알게 된 게 너무 기쁘고 좋아서 4표가 아니라 40표, 400표를 얻은 기분이었다. 

호남지역에서는 화천노조의 정기춘 위원장이 뛰었다.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 나의 의견에 동감해 자기 일처럼 뛰었다.

20년 지기이자 동지였던 정학균은 과거 조선지부에 있던 대의원 한 명의 표를 얻기 위해 속초까지 다녀올 정도로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돈도 없고 조직도 약했지만 대의원들을 만나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현장의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밑바닥이 바뀌고 있다. 어쩌면 이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 그런 표 필요 없다!”

선거가 있기 하루 전날 좋지 않은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 표라고 세어 놓았던 대우자동차의 7표가 우리 게 아니었다. 김영만 대우자동차 위원장은 전임 위원장이었던 이성균의 고향 후배로 절친한 사이였다.

이성균은 우리 캠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대우자동차 표는 당연히 우리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들리는 첩보에 따르면 그렇지 않았다.

부랴부랴 밤늦게 인천으로 가서 김영만 위원장을 만났다. 이때 공교롭게도 이성균은 다른 급한 일이 있어 동행하지 못했다. 만나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
 
“대우자동차에서 나를 찍어 주면 나는 당선이 되고, 안 찍어 주면 떨어진다.”
“형님에게 다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성균 선배를 한국노총에서….”
 
당시 이성균은 한국노총 사무차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김영만 위원장의 말인즉 내가 금속노련 위원장이 되면 그 힘으로 이성균을 한국노총에서 내쫓아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둘 사이를 잘 아는데 김 위원장이 이래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는 그런 표 필요 없다. 차라리 낙선하고 말겠다.”
 
긴 말 하지 않고 나와 버렸다. 사실 대우자동차의 이성균과 김영만은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다. 이성균이 고향 후배인 김영만을 알뜰하게 보살펴 줬고, 김영만도 이성균을 선배로 깍듯하게 대했다.

이성균이 한국노총 사무차장으로 가고 난 뒤 김영만이 위원장이 되자 학생 출신 활동가들인 홍영표·송경평이 ‘노동조합 위원장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비판을 가했다. 그러자 김영만은 이성균이 이들과 손을 잡고 자신을 몰아내려는 것으로 오해했다.

이 오해는 이성균이 김영만에게 홍영표·송경평의 지적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김영만을 타이르다가 언성이 높아져 나무라면서 생긴 것이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이성균과 김영만은 화해를 하고 서로 잘 지내고 있다. 노동조합 활동을 오래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다.

‘10표차’, 개혁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드디어 대의원대회가 열리고 임원선거가 치러졌다. 1차 투표에서 민정식 후보는 96표를, 나는 95표를 받았다. 팽종출 후보는 25표를 얻었다. 민정식 후보가 1표를 더 얻었지만 과반수가 되지 않아 2차 투표까지 가게 됐다.

팽종철 후보의 25표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승부가 판가름 나게 됐다. 팽종출 후보가 위원장이 되는 데 나와 경인지역 개혁파들이 나름대로 힘을 보탰다고 앞에 쓴 적이 있다.

나는 당연히 팽종출 후보에게 간 25표가 내게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동조선 정학균 위원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절대로 내게 안 온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쉬는 시간에 조선공사 대의원 얘기를 들어보니 “2차 투표에서는 민정식 후보를 찍어라”는 지시가 내려갔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졌다. 10표차였다. 참모들은 결과에 실망하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캠프의 막내인 이석행은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주먹을 쥐고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고생한 거 안다. 너무 실망하지 말자. 길게 보자.”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하는 얘기였다.

그리고는 나는 단상 위로 올라가 민정식 후보의 손을 번쩍 들었다. “여러분이 선택한 후보입니다. 오늘 당선되신 민정식 위원장을 중심으로 앞으로 3년 동안 열심히 해 나갑시다. 저도 금속노련 부위원장으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정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대의원대회가 끝난 뒤 대회장을 나오면서 캠프의 누군가 한마디 했다. “선거에서 졌는데 박수는 우리가 더 많이 받았다.” 처연한 목소리였다. 

사실 결과에 승복하는 게 말이나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다. 선거캠프를 차렸던 백궁장에 돌아오자 다들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 큰 남자들이 소리 내어 울기까지 했다. 경인지역 개혁파 동지들의 좌절감은 어쩌면 나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이번이 벌써 두 번째다.

선거캠프 참모들 가운데 한 명은 대우중공업 대의원들의 상당수가 자격에 하자가 있으니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노동부에 이의신청을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에 빨리 승복을 해야 선거에서 진 자나 이긴 자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갖고 관청이나 법원에 뛰어가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동지들을 설득했다. 그게 선거에 패배한 후보로서 내 임무이기도 했다.
선거 다음날 민정식 위원장을 만나 점심을 같이 하며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인사를 전한 뒤, 선거운동기간 동안 핵심참모로 뛰었던 김성문 사무처장을 부탁했다. 당신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개혁파의 젊은 동지들을 키워 달라고 했다.

김성문은 그 후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민정식 위원장을 정말 열심히 도왔다. 집행부의 노선이나 처세에 문제제기를 하는 노조 대표자들이나 간부들을 주저앉혔다. 모두가 한국노총 금속노련 멤버들 아닌가.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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