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전 선동 vs 소통과 공감
 
지금까지 노동운동은 선전 선동을 매우 중요한 활동으로 생각해 왔다. 노조간부나 활동가들이 반드시 배워야 했다.
일반적으로 선전은 어떤 사물의 존재나 효능 또는 주장 등을 남에게 설명해 동의를 구하는 일 또는 그 활동을 의미한다. 선동은 문서나 언동으로 대중의 감정을 부채질해 일정한 행동대열에 참여하도록 고무·격려하는 행위를 뜻한다.
한 진보운동 단체에서 나온 설명은 이렇다.
 
“선전은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복잡한 사건과 사상, 이론·정책 등을 대중에게 논리적이며 체계적으로 교양·해설해 줌으로써 현실 문제와 지향을 원리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하게 하는 사상사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전은 주로 글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선동은 정책과 노선·목적 등을 수행하도록 대중의 감정에 강한 충격과 자극을 줘 그들의 변혁적 기세를 돋워 주면서 실천으로 나설 수 있도록 불러일으키는 정치사상 사업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동은 사실을 생생하게 눈앞에 보는 듯이 말이나 영상·이미지로 표현함으로써 청중의 마음속 깊이 잠재해 있는 생각까지도 심층 내부에 파고들어 가 거기에 잠재돼 있는 인간의 본성을 일깨워 준다. 선동은 대중들에게 감흥과 격동은 줄 수 있지만 체계적이고 완벽한 이해를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선전 선동은 과거 운동이론에서는 대중보다 앞서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전위’ 또는 ‘활동가’들이 사건·사상·이론·정책에 대해 상대적으로 뒤처진 대중을 상대로 하는 활동이다.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면 ‘아는 내가 모르는 다수를 깨우치고 가르치는 계몽주의적인 활동’의 하나인 셈이다.

여기에는 전위 또는 활동가와 대중이라는 전달자와 전달받는 자, 교육자와 교육받는 자와 같은 도식이 깔려 있다.

반면에 최근 들어 사회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소통이라는 얘기는 말 그대로 막힘없이 잘 통한다는 뜻이다. 소통은 특별히 더 아는 자와 더 모르는 자와 같은 전제가 없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감이라는 것은 타인의 사고(?考)나 감정을 자기의 내부로 옮겨 놓고, 타인의 체험과 동질(同質)의 심리적 과정을 만드는 일, 즉 남의 감정·주장·의견에 대해 나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다.

소통을 통해 공감하고 공감을 통해 함께 상황에 대응하고 행동을 하는 것과 선전 선동을 통해 대중이 움직이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같다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선전 선동에는 앎과 모름이라는 구분이 있고 아는 자와 모르는 자라는 수직적인 관계가 스며들어 있다. 소통과 공감이라고 하는 것은 수평적으로 서로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다.

선전 선동이 전위나 활동가 또는 간부가 대중과 조합원을 향해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면 소통과 공감은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쌍방의 의견·감정·주장을 나누는 관계다. 

선전 선동이 내 의견·주장·감정·사상에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도록 하는 성격이 강하다면 소통과 공감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의견·주장·감정을 교류함으로써 내가 타인에 동의하거나 타인이 나에게 동의하거나 혹은 서로가 교류를 통해 보충해 새로운 공동의 의견·주장·감정을 생산하는 과정이다.

공장의 남성성, 위계성, 수직성, 권력성과 선전 선동이 가깝고 여성성, 수평성, 비권력성이 소통과 공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공감? 무슨 운동권답지 않은 소리야?”

2007년 1월 금속노조 선거에 출마한 한 후보가 내건 슬로건을 본 노조간부들의 대화 속에서 나온 얘기였다. 노동조합의 선거구호라고 하면 투쟁이나 쟁취와 같은 강력한 메시지가 상식적인데 ‘공감’이라는 표현은 역시 낯설 수밖에 없었다.  

요즘엔 소통이라는 말뿐만이 아니라 시대공감, 공감 특별한 세상, 여성공감, 스페이스 공감 등 미디어의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변호사모임이나 심지어 정부의 정책선전지도 공감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다.

그런데 노동조합에서는 아직도 “한다면 한다”와 같은 구호가 등장한다. 마치 특전사나 해병대에서 내거는 구호를 연상케 한다. 2008년 초 한 노조에서 위원장과 사무처 간부들이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오늘 자리에서 허심탄회하게 논의했으면 한다. 누구든 어떤 이견이든 기탄없이 얘기했으면 한다.”
위원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자 간부 가운데 몇 명이 그동안의 사업에 대해 비판과 이견을 쏟아 냈다. 그러자 위원장이 답변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집행부의 방향과 전혀 다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 집행부의 결정을 따를 수 없다면, 그런 사람 필요 없다. 차라리 그만둬라.”

정말 어이없는 소리다. 이것은 소통이 아니고 호통이고 고집불통이다. 노동운동 안에서도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없지는 않다. 민주노총에서도 강사가 일방적으로 조합원에게 하는 교육이 아닌 다양한 참여형 교육을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부분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전 선동 위주의 활동방식은 바뀌지 않고 있다.

노동조합 안에서 소통의 부재를 넘어 소통이 불가능함을 극단적으로 보여 준 것이 바로 2005년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폭력사태다.(위 사진)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만이 아니다. 민주노조를 자처하는 상급단체의 대의원대회나 혹은 대공장 노조들의 대의원대회는 의견을 교류하면서 상호 인식의 폭을 넓히는 자리가 아니라 단순히 주장을 끝없이 반복해 자기주장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공간이다. 이 때문에 대의원대회가 점점 길어진다. 끝내는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와 같이 극단적인 폭력사태가 불거진다. 

누가 더 나을까

선전 선동이 불필요하고 소통과 공감만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선전 선동이라는 것이 과연 현재의 노동운동이나 노동조합운동에서 제대로 실현될 수 있는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에서 선전 선동이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간부나 활동가들의 지적능력이나 정보력이 조합원보다 앞서야 한다. 과연 그럴까?

최근 노동조합의 간부나 활동가들이 독서나 학습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곳곳에서 제기된다. 노동조합의 간부나 활동가들은 매년 다가오는 임단협이나 각종 작업장 내의 문제들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고 어떤 조합원 못지않게 잦은 술자리를 가진다. 스스로 학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책 한 권을 읽기도 어렵다.

대다수의 노조간부들이 과거의 활동경험으로 문제를 풀어 나간다. 그러나 노동운동 자체가 낡은 프레임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그런 식의 활동으로는 지식의 확대나 혹은 새로운 창조의 능력을 높일 수 없다.

우리는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다.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사업장의 경우 조합원들은 실시간으로 정보를 접한다. 간부들보다 빨리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 경우도 많다. 반면에 조합간부들이 조합원들보다 빨리 얻는 정보라고 해 봤자 상급단체나 혹은 전국적인 노동조합운동의 내부사정에 관한 것들뿐이다.

노동운동이 정체하고 위기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그 정도를 가지고 조합원들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조합원들은 민주노조운동 안에서 20년간 반복돼 온 노동조합운동의 패턴을 이미 알고 있다.

매년 반복되는 임금협상의 경우 대다수 조합원들이 노조에서 요구하는 금액이 얼마인가와 회사는 얼마를 내놓을 것이며, 어느 수준에서 어떤 시기에 어떤 과정을 거쳐 타결될 것인지를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통설이 돼 있다. 

지식이나 정보에서도 앞서지 못하는 노조간부나 활동가들이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 우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수년간 발생한 노조간부들의 비리사건들이 이미 답을 내렸다.

노조간부나 활동가들이 지적·도덕적·정보적 측면에서 아무런 선도적 내용을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선전 선동이란 것은 신규노조나 혹은 특수한 경우의 노조를 뺀다면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조합원들이 노선이나 이념을 중심으로 위원장을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크게 보면 강성이든 온건이든 같은 프레임 안에서 작은 차이에 불과한 ‘그놈이 그놈’인 셈이다.

대공장노조들의 선거에서는 연임되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 강성과 온건이 번갈아 당선된다. 이를 보면서 조합원들의 영특함을 얘기한다. 조합원들은 강경만 선택하거나 온건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선택하는 것은 조합원이다. 일반적으로 현장조직의 인물이 위원장에 출마하는 제조업의 경우 선택되는 현장조직은 늘 강경노선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늘 온건노선을 가지고 있다. 현장조직이 두 눈이 아니라 강경이나 혹은 온건 중 하나의 눈만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면 조합원은 양쪽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취사선택을 하는 셈이니 한쪽 눈의 현장조직과 양쪽 눈의 조합원 중 누가 더 현명한 것인가는 자명하다.

선전 선동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선전 선동이라는 프레임을 넘어 소통과 공감의 프레임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희망은 없다.<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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