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치금융’은 말 그대로 정부가 금융기관에 개입해 돈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70~80년대 산업화 시대에 관치금융은 돈을 효과적으로 집중·분산시켜 압축성장을 이뤄 내는 역할을 했다. 반면 관치금융은 재벌기업 중심의 불균등한, 불공정한 성장을 이끌어 경제의 암적 요소가 됐다. 대마불사를 외치며 금융기관 돈을 물 쓰듯이 써 댔던 재벌기업과 결탁한 정부관료들은 우리 경제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관치금융은 외환위기를 촉발시킨 원흉이었다. 문어발식 중복투자를 벌인 재벌기업에 돈을 댔던 금융기관들은 결국 퇴출되는 운명을 맞았다. 살아남은 금융기관도 혹독한 구조조정을 감내해야 했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은행의 독립성 강화, 금융감독원과 금융위원회의 분리, 기획예산처와 재경부의 분리가 이뤄졌다. 견제와 균형 원리, 자본시장의 독립성 강화와 시장개입의 최소화가 추진된 것이다. 퇴출을 경험한 금융기관은 저마다 자본건전성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자본시장이 개방되면서 정부가 돈의 흐름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게 됐다.

물론 관치금융의 행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정권 핵심 실세와 결탁한 일부 금융기관이 일부 기업이나 개인에게 불법대출을 몰아줘 ‘금융 스캔들’을 일으켰다. 재경부로 대표되는 경제관료를 지칭하는 ‘모피아’가 금융기관의 기관장을 차지하는 ‘낙하산 인사’ 행태도 여전했다.

정부가 금융기관의 자율적 노사관계에 개입하는 것도 관치금융의 범주에 포함된다. 최근 금융기관 노사관계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다시 활개를 치는 듯하다. 금융산업노조와 은행연합회는 지난 3월 초임삭감·임금동결·연차사용 확대를 통해 신규채용을 확대하는 잠정합의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기존 직원 임금삭감을 추진해 온 국책금융기관의 반대로 잠정합의안은 휴지 조각이 됐고, 협상은 결렬됐다.

이후 금융권 노사는 협상을 거듭했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끝내 결렬을 선언했다. 지난 8월20일 산별교섭이 결렬된 후 신동규 은행연합회 회장은 위임받은 교섭권마저 개별 금융기관에 반납했다. 금융권 노사가 2000년 이후 10년 동안 이뤄왔던 산별교섭이 하루아침에 실종돼 버린 것이다.

금융기관 산별교섭의 파행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정부의 개입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유력하다. 국책금융기관의 강경한 입장 배후에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금융기관을 감독하는 금융위원회의 행태가 대표적이다. 금융위는 8월27일 금융공기업 부기관장 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임금 5% 1년 삭감, 연차수당 50% 의무사용을 종용했다. 임금협상 결과는 경영평가에 반영하고, 타결이 지연될 경우 불이익을 주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금융감독원과 감사원도 본연의 직무와 관계없이 금융기관 임금협상과 노사관계에 개입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금융공기업에 협상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강요하는 한편 단체협약과 복리후생제도까지 감사했다.

최근에는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된다. 금융노조는 “청와대 비서관이 금융감독원·은행연합회·금융위 관계자를 소집해 임금삭감·초임삭감·연차휴가 의무사용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금융권 노사의 자율교섭 파행에 청와대가 그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와 금융감독당국이 금융기관에 재정 건전성과 솔선수범을 요구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국민의 혈세를 지원받은 금융기관이 위기 극복에 앞장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방식이 구태에 머물거나 노사관계에 불법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이라면 곤란하다.

금융권 노사는 신규채용 확대를 위해 임금동결·초임삭감·연차휴가 사용 확대에 합의하지 않았나. 금융노조 입장에선 지난해 이어 올해까지 2년 동안의 임금동결을 감수하는 것이며, 반대했던 초임삭감마저 수용한 것이었다.

금융감독당국이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임금협상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강요한다면 금융권 노사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우리 노사관계는 정부 입김이 효과를 봤던 종전과 다르다. 금융기관 노조도 산업별노조로 조직화돼 있어 개별기관 노사가 협상을 타결하더라도 법적인 실효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다. 공식적으로 산별노조로부터 교섭권을 위임받은 노조만이 협상타결의 법적 실효성을 얻을 수 있다. 금융감독당국과 은행연합회측은 이 점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로선 결렬된 산별교섭을 통해 대타협을 이뤄 내는 것만이 금융권 노사관계 파탄을 막는 유일한 길이다.

청와대와 금융감독당국은 더 이상 금융권 노사 협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10년간의 금융권 노사의 산별교섭 성과를 무력화시키는 위험한 발상을 버려야 한다. 금융권 노사관계에 대한 노골적 개입은 ‘관치금융의 망령’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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