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라는 게 참 묘하다. 주는 것 없이 괜히 미운 경우가 있는가 하면, 뺏기면서도 밉지 않은 경우가 있다. 다른 일도 그렇겠지만, 노동조합운동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금속노조 부산지역지부 사무장을 맡게 되면서 내 수첩에 적힌 사람들의 숫자는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못 만나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그리운 ‘동지(同志)’들이 있었는가 하면, 개중에는 정말 ‘나쁜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좋은 사람들’만 모아 노동조합을 해야 하는가. 세상에 노동이 좋아서 노동자가 된 사람은 없다. 그것은 그들의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아니었다. 노동자가 되기까지, 그리고 노동자가 되고 난 뒤에 사회가 그들에게 ‘베푼’ 대접은 노동자의 성정(??)과 인격(人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흔히 1970년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말한다. 확실히 그랬다. 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그 숫자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동료를 팔고 돌아섰다. 그러나 공장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환하게 켜진 그 불빛이야말로 노동자들의 희망이었고, 노동조합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노동자가 노동자를 핍박할 때면 대학생이 되려고 몸부림치던 젊은 날을 떠올리며 마음을 잡았다. 누가 뭐래도 노동조합이야말로 노동자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학교가 아닌가.

 

1974년 연말, 나는 권오덕의 집을 찾았다.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소식은 우리의 동지애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신경 쓰지 마라, 내는 이미 제명이 됐다 아이가?”

“며칠 전에 대의원대회가 열렸다. 정남수씨가 지부장이 됐다.”
“….”
“내 정권(징계)은 풀어준다고 하는데, 조건을 붙였다더라.”
 
금속노조 부산지역지부는 우여곡절 끝에 그해 12월22일 대의원대회를 열고 정남수씨를 지부장으로 다시 선출했다. 정 지부장은 일찍 징계가 풀린 덕분에 출마가 가능했다. 본조에서는 정 지부장이 자리를 되찾은 것으로 지부가 정상화(?)됐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본조의 강준석 부위원장이 내 복권 문제를 끄집어냈다.

강 부위원장은 한국베아링지부 지부장으로 경남 사천 출신이라 나와 고향이 같았다. 시시비비 이전에 고향 후배 한 명 살려 주자는 마음으로 나섰다고 한다. “박인상이는 지부장에 출마하지 않았는데 풀어줘야 하지 않느냐”는 논리로 김병용 위원장을 설득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도 수긍을 했는지 김영태 부산시협 의장과 정남수 지부장에게 “정권을 받은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복권이 됐는데 다른 한 명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지 않느냐”고 설득했다. 그쪽에서는 권오덕의 제명은 절대로 풀 수 없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했다. 나는 있던 그대로 권오덕에게 다 알려 줬다.
 
“신경 쓰지 마라. 내는 이미 제명이 됐다 아이가. 니가 몬 받아들인다 캐도 언젠가는 내 제명을 풀어 준다고 할 것도 아인데 뭐. 나는 마음을 확실히 접었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지부장이 되더라도 제대로 일도 못할 것 같다. 관권이 개입해 회사 편들어 주면 우리가 아무리 날고뛰어도 대책이 없다 아이가?”
 
“….”
내가 복권이 되려면 권오덕의 제명을 인정해야 하는 형국이었다. 아마 권오덕이 ‘끝까지 싸우자’고 했다면 나는 두 말 않고 그와 함께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이날 이후 권오덕은 몇 달 동안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노동운동을 정말 포기했다는 것을 내게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다시 부산지역지부로

 전쟁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전쟁터에서 함께 사선을 넘나들던 두 병사가 적군에게 쫓기던 중 한 명이 중상을 입는다. 함께 가면 둘 다 죽는다. 중상을 입은 병사는 친구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눈앞에서 전우의 죽음을 봐야 했던 병사는 울부짖을 겨를도 없이 그 자리를 벗어난다.

그와 나의 상처를 이 글에서 밝히는 이유는 그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을 칭송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 평생 마음의 빚을 털고자 함도 아니다. 금속노동운동 역사에 권오덕이 있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앞으로도 ‘기성(旣成)’과 ‘기득권(旣得權)’에 맞설 수많은 ‘권오덕들’을 위함이다.

2003년 민주당 국회의원이 됐을 때 동료와 후배들이 나의 노동운동 40년을 기념하는 문집 <영원한 위원장>을 만들어 줬다. 40년을 상징해 40명의 필자가 나와의 인연을 글로 썼다. 그 맨 앞에 권오덕의 글이 있다. 그는 나의 ‘영원한 동지’다.

1975년 1월25일 복권이 된 나는 조선기계분회 분회장이 됐다. 영도철공분회는 한 해 전에 조선기계분회로 이름을 바꿨다. 1970년 가을 영도철공분회에 들어가 2000년 4월 국회의원으로 출마할 때까지, 나는 30년 동안 이 조기분회의 조합원이었다.

조기분회 사무실은 대평동 철공소들 사이에 있었는데 사무실은 그야말로 ‘코딱지’만한 크기였다. 셋만 들어가도 앉을 수가 없어 회의를 할라치면 서서 해야 했다. 그런데 이 작은 사무실로 지부의 분회장들이 자꾸 찾아왔다. 번듯한 노동회관 건물 안에 있는 지부 사무실로 가지 않고. 사업장에서 생긴 일을 의논한다는 이유로, 노동관계법을 물어본다는 이유로, 막걸리 한잔 하자는 이유로.

봄이 되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정남수 지부장이 답답했던지 나를 불렀다. 일을 할 사람이 없다고 다시 사무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전우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의식화’

지부 사무장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전국의 금속 동지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1976년 6월에 전국금속노조 사무국장 교육이 있었다. 기업별지부와 지역별지부 사무국장만을 대상으로 경기도 국제승공연합회 건물에서 2박3일 동안 진행됐다. 전국에서 모인 40여명의 사무국장들이 서로 안면을 트고 앞으로의 비전을 나누는 기회였다.

당시 교육내용 중 외국인 신부님이 쓴 <노동자의 길>이라는 책에 나오는 그림을 보고 평가하던 게 기억에 남는다. 노동자는 물이 잘 나오지 않는 수도꼭지 밑에 컵을 받쳐 놓고 물이 차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사장은 물이 흘러 넘치는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는 그림이었다.

사무국장들의 평가는 비슷했다. ‘사용자의 본질을 알고 달콤한 말에 속지 말자.’ 이 ‘의식화’ 교육을 야심차게 기획한 이가 동양강철분회 사무국장이면서 그해 금속노조 교선부장이 된 최웅길이다.

1972년 유신, 1974년 긴급조치 등으로 정치가 살벌해지고 있었지만, 노동자들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던 때였다. 1970년대 중반이 되면 경인지역 금속노조의 젊은 노동조합 간부들 가운데 크리스찬아카데미의 ‘세례’를 받아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 활동을 해 보자는 의지를 가진 동지들이 꽤 됐다. 최웅길은 자신이 받았던 교육을 금속노조 사무국장 교육에 적용했다.

이 동지들은 뒷날 1980년대 초반 금속노조 개혁의 선봉에 서서 주력 역할을 했고, 그 진가는 1985년 위원장 선거에서 드러나게 된다. 나로서는 이 사무국장 교육 덕분에 ‘평생동지’들을 만난 셈이었다.
 
‘눈칫밥’들의 동병상련

그런데 이런 ‘의식화’ 교육만큼이나 우리 사이를 단단하게 묶어 줬던 게 있었으니, 바로 우리 사무국장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인 ‘눈칫밥 신세’였다. 노동조합에 40대 지부장과 30대 사무국장이 있다면, 조합원과 나이 차이가 적은 사무국장이 조합원들과 교감을 하기가 더 쉽다. 지금과는 달리 신입사원이 속속 들어오던 때라 젊은 조합원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날 때가 아닌가.

지부장들과 사무국장들은 나이 차이도 차이지만, 체질이 달랐다. 명확히 드러난 것은 아니었지만 운동 노선도 달랐다. 그러니 자기가 지명한 사무국장에게도 ‘눈칫밥’을 먹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제약이나 제한도 많았다. 지부장들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지역지부의 권오덕이 지부장 선거에 출마해 비록 제명을 당했지만, 실제 선거에서는 이겼으니 이 소식을 접한 지부장들은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이 교육을 통해 가까워진 동지들이 많다. 대한전선의 김성문 사무국장은 차분한 성격에 노동조합 실무에 밝았다. 내가 조선공사 파업으로 구속된 경력을 알고 있어 그랬는지 그는 나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시집살이에서 잠시 해방된 며느리가 된 심정의 금속노조 사무국장들은 교육이 끝난 뒤 헤어지기가 아쉬워 2차로 밤새 술을 마시는 객기를 부렸다. 고주망태가 된 우리들이 무슨 ‘장광설’을 늘어놓았는지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이 술자리가 나중에 지부장님들의 정보망에 걸렸는데, 칭찬은 듣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노동자도 새마을교육을?

이 시절 ‘교육’ 하면 새마을교육을 빼놓을 수 없다. 1976년 5월 말 부산시에서 주관한 새마을지도자교육을 2박3일 동안 받았다. 새마을교육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금속노조 부산지역지부로 협조공문을 보내왔는데, 말이 ‘협조공문’이지 당시 분위기로 보면 ‘입소 명령서’나 다름없었다.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 국장이 있던 시절이었다.

담당 공무원이 보기에는 노동조합 간부에도 ‘급’이 있다고 생각했던지, 부장이나 차장을 교육에 보내면 노조로 ‘경고성’ 전화가 왔다. ‘새마을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느냐, 지부장이나 사무장이 와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지부장은 여러 핑계로 빠지고 결국 내가 가게 됐다. 그때 교육생이 100여명 정도였다. 주로 교사들이었고, 목사와 노동조합 간부도 포함됐다.

어느 대학 교수님이 ‘새마을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고 새마을지도자들의 성공사례를 들려줬다.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일이라도 강제성을 띠게 되면 효과가 떨어지기 마련이라 아쉽기는 했지만 완전히 시간을 허비한 것은 아니었다. 한 강사가 공장새마을운동을 소개하면서 “작업장 정리정돈을 잘하자”고 말했는데, 산업재해 예방 차원에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얘기 아닌가.

이 교육이 끝나고 난 뒤 부산시는 수강생 가운데 30여명을 선발해 중앙정보부로 견학을 보냈다. 선발기준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도 뽑혔다. 아마도 수강 태도가 좋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함께 선발된 교사들과 말로만 듣던 무시무시한 서울 이문동 중앙정보부 본부 지하로 들어갔는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들이 놓여 있는 방이 있었다. 평양방송과 일본NHK 방송이 수시로 녹음되고 있었고, 그것을 타이핑하고 정보를 분류한 뒤 높은 사람들에게 보낸다고 했다. 큰 벽보판에는 평양에서 나오는 방송이나 신문에 인용된 남한 신문과 방송들의 인용 횟수가 정리돼 있었다.

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당시 호남의 어느 신문이 가장 많이 인용된다고 우리에게 설명해 줬는데, 그 뒤 얼마 안 돼 임자도 간첩사건이 발표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요컨대 겁주려던 게 아니었을까.
    
“아니, 노동자는 대통령 하지 말라는 법이 있소?”

징계가 풀려 다시 부산지역지부 사무장이 되면서 가장 열을 올렸던 일은 조직사업이었다. 1977년 박정희 정권이 ‘대망’의 100억달러 수출을 달성하면서 노동자들의 요구도 터져 나올 때였다.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스스로 지부를 찾아왔다. 나는 이들을 맞아 노동조합 설립을 지원하는 한편, 지부로 찾아올 형편이 안 되는 노동자들이 있는 곳, 다시 말해 중소·영세 규모의 작은 공장 노동자들을 만나러 사상공단 일대를 돌기 시작했다. 유임종 조직부장·박재훈 후생부장·문홍민 총무부장·김상관 조직차장·황장호 차장이 열심히 뛰었다.

의외로 큰 공장보다는 작은 공장에서 분회를 만들기가 쉬웠다. 부산제철이나 한일제관분회·부국제강분회의 경험을 떠올리면 이해가 되는 것이, 이런 곳은 사용자들의 힘이 약해 관과 그다지 밀착돼 있지 않았다.

사용자들이 악을 쓰며 분회 결성을 방해하러 오지도 않았고, 관을 동원해 횡포를 부리지도 못했다. 사용자들이야 항상 경기가 나쁘다고 엄살이지만, 이때는 돈벌이가 될 때였다. 일거리가 많아 노동자들은 잔업 철야를 밥 먹듯이 하고 있었다.

사상공단에서는 기술을 가진 노동자 한 명이 ‘씨앗’ 역할을 했다. 그 기술자가 있는 공장에서 분회를 결성해 필증을 받은 뒤 단체교섭을 하고 나니까 공단 일대에 소문이 쫙 퍼졌다. 이웃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우리도 해 보겠다’고 씨앗이 된 노동자에게 나를 소개시켜 달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분회 결성에 또 성공하니, 계속해서 ‘소개’(?)가 들어왔다.  

분회 결성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까 머릿속에 매뉴얼이 만들어졌다. 오늘 밤 노동자들을 만나면 내일 아침 분회 하나가 뚝딱 나오는 식이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요구를 제대로 담은 번듯한 단체협약을 맺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노동3권을 극도로 제한한 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금속노조의 임금협상 요구안 수준에서 따낸 협약이었다.

분회는 늘어났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내심 속이 타던 중, 어느 날 정아무개 기관원이 나를 찾아왔다. 얘기인즉 ‘왜 이렇게 노동조합을 많이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말끝에 가서는 아예 ‘이런 식으로 노동자들 조직하면 노동자가 대통령이 되겠다’며 공갈 반, 비아냥 반의 표정으로 나를 골렸다. 나도 웃으며 맞받았다.
 
“아니, 노동자는 대통령 하지 말라는 법이 있소? 노동조합 만들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것도 이상한 일 아니요?”
이렇게 조직사업을 열심히 한 덕분인지, 1974년까지만 해도 9개였던 분회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산업별 노동조합이 해산될 때까지 40여개로 늘어났다.
 
노동자 ‘자주관리’ 현장에서 맞은 ‘10·26’

1979년 8월17일,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하던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이 구속됐다. 이때 나는 금속노조 부산지역지부 미진금속분회에 있었다.

당시 부산 지역사회의 톱뉴스는 미진금속의 부도였다. 미진금속은 건축용 자재인 관 이음쇠를 만드는 업체였는데, 부산과 창원에 공장을 두고 있었다. 두 공장을 합쳐 노동자가 740명이었고 부산에서는 ‘알짜기업’이었다. 그런데 무리한 투자에다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중동수출이 막혀 부도가 난 것이다.

미진금속분회는 내가 징계를 받아 부산지역지부를 떠나 있을 때인 1975년 10월 결성돼 사업장 사정이나 분회 간부들을 잘 아는 편은 아니었다. 미진금속 노동자들은 체불된 두 달치(6~7월) 임금과 8월분 임금을 받아야 하는데 싸울 대상이 없었다. 사장은 도망가고 관리자들만 남아 있었다. 노동자들은 화가 나 죽겠다는 표정으로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나 역시 답답했는데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공장 안을 ‘체크’했다. 원자재가 남아 있었다. 달포 가량 공장을 가동할 수 있는 물량이라고 했다. 또 1천500만원어치의 완제품도 있었다. 관리자들의 협조를 받아 계산을 해 봤더니, 석 달 정도 공장을 가동하면서 생산한 제품을  팔아 현금으로만 대금을 받고, 부자재 부품을 살 때는 업자들에게 현금으로 주는 대신 싼값으로 사면 체불임금과 퇴직금은 어떻게 해결이 될 것 같았다.

분회원들에게 이 계획을 보고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토론에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가동하는 것은 좋지만 관리자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 것이며, 부도난 회사 통장으로 돈이 들어오면 회사 빚 청산하는 데 쓰일 것 아니냐고 염려했다. 그래서 원자재와 부자재, 생산된 제품을 체불임금 및 퇴직금의 질권으로 설정해 분회장 명의로 공증을 받아 놓고, 분회장 명의로 통장을 개설해 판매대금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공장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과연 ‘주인의식’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던가 할 정도로 노동자들은 평소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했다. 생산량이 확 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빚 받으러 온 사채업자들과 채권 확보를 하기 위한 법원 ‘집달리’(집달관)들이 생산제품에 눈독을 들이고 빨간 딱지를 붙이려 할 때마다 공증증서를 내밀며 물리치는 게 내 일이었다. 전기요금이 체납돼 한국전력에 사정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9월부터 미진금속 노동자들은 밀린 임금의 일부를 가져갈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하기를 6개월, 미진금속은 1980년 3월 법정관리에 들어가 재기하게 된다. 이 6개월 동안 나는 미진금속에 붙어살다시피 했다. 공장이 정상화되고 조합원들이 밀린 임금을 다 받을 때까지 한시라도 한눈을 팔 수 없었다. 나는 공장 재산관리인이나 다름없었고,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망한 회사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미진금속에서 조합원들과 ‘자주관리’를 실험하고 있을 때 부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며칠 뒤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유신체제도 끝이 났다. 이제 민주화가 되는 것인가. 노동자들에게도 공평한 법이 생겨 마음 놓고 노동조합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그해 겨울은 길었다. 봄은 생각처럼 쉽게 오지 않았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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