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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40년, 박인상 회고록 (15)[제5부]노동자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제3편]금속노조 직할 영도철공분회 사무장
총아(寵兒)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라는 뜻인데, 이 뜻대로라면 나는 확실히 ‘총아’였던 것 같다. 자랑이라기보다는 정말 고맙고 두려워서 하는 말이다. 40년 동안 노동운동을 하면서 많은 분들의 아낌과 키움을 받았다. 마치 꽃나무에 물을 주고 가꾸듯 그분들께서는 나를 보살펴 주셨다. 조선공사에서 해직된 뒤 한동안 실의에 빠진 나를, 친구 권오덕과 영도철공분회의 선배들이 다시 일어나게 해 줬다. ‘하방’이라는 말은 알지도 못했다. 그저 일할 수 있는 현장이 있다면, 노동조합을 함께할 동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는 마음이었다.
만일 그때 내가 본조 간부로 올라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나를 불러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총아에는 “시운을 타고 입신하여 출세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는 당시 노동운동을 주름잡던 노동조합 ‘오너들’의 총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던가.



“철공소?”
권오덕의 말에 놀라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당시 영도 대평동에는 선박 엔진이나 부품을 제작하고, 수리하는 작은 사업장들이 몰려 있었다. 한 사업장마다 적게는 5명, 많게는 20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대부분 기술자들이었다.

“노조 키워 보라”는 사장님들

영도의 철공소 노동자들은 일찌감치 금속노조 직할 영도철공분회로 조직돼 있었다. 철공분회를 조직한 사람들은 신민당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상진씨의 동생 김상원씨, 그리고 남정근·오성진·이정태·김지갑·이시우씨 등이었다. 50년대부터 철공소 기술자로 ‘기름밥’을 먹던 이들은 1968년 영도철공분회를 조직해 금속노조 직할로 편제됐다.

실은 철공분회의 뿌리는 이보다 더 깊었다. 일제시대 말기 일본인들로부터 기술을 배워 영도 철공업계의 주력으로 성장했던 노동자들은 1950년대 중반 중소영세사업장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복수의 사업장을 묶어 부산지구 철공노동조합을 만들었다. 1959년, 이들은 최초의 금속산별노조라고 할 수 있는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을 결성했으나, 전국적인 규모를 갖추지는 못한 상태였다.

한편, 4월 혁명으로 조성된 민주화 분위기에 힘입어 조선공사노동조합이 혁신된다. 직선제로 당선된 임한식 위원장은 한국금속노동조합연맹을 결성해 산별노조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철공노조에도 관심을 갖고 대공장부터 영세공장까지 모두 아우르는 명실상부한 노동조합운동을 모색했다. 이처럼 영도의 철공분회는 우리나라 금속노동운동사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금속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1960년대 말부터 철공분회는 세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원-하청 관계는 ‘주종관계’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던 대기업 노동자와 철공소 기술자 사이의 임금격차 역시 현저해졌다. 기술이 우대받던 시대는 지났다. 이 과정에서 터줏대감 격이었던 김상원·이정태씨는 각자 작은 철공소를 인수해 사장이 됐다.

권오덕은 금속노조 본조 법규부장으로 있으면서 전국의 노동운동 사정에 나보다 밝았다. 감옥에서 나오면서 앞날을 고민하던 차에 철공분회에 눈을 돌린 것이다. 권오덕은 김상진씨를 통해 김상원씨를 소개받았고, 그와 만나 철공분회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다고 한다.


1970년 가을, 다시 노동자가 됐다. 나의 직장은 초기 철공분회를 조직하다 사장이 된 이정태씨가 운영하는 대평철공소였다. 노동자가 15명 정도였고, 주로 선박의 엔진을 수리하는 일을 했다. 조선공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사업장이었지만 기가 죽을 우리가 아니었다. 영도의 철공소는 50여곳으로 노동자들은 모두 400명쯤 됐던 것 같다. 철공분회에는 30여곳의 철공소에서 일하는 200여명의 조합원들이 가입해 있었다. ⓒ 매일노동뉴스

“철공분회에서 시작해 지역지부로 가자”

마침 사장이 된 김상원·이정태씨도 자신들의 청춘을 바친 철공분회 돌아가는 꼴이 한심했던지 답답해하던 참이었다. 젊은 우리들이 조선공사에서 쫓겨나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는 얘기를 권오덕으로부터 들은 그들은 “철공분회 좀 키워 보라”며 일하기를 권유했다.

권오덕의 구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금속노조가 명색이 산별노조인데 기업이나 지역에 따라 어떤 곳은 잘되고 어떤 곳은 잘 안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일할 현장이 필요했다. 조선공사에서 쫓겨난 우리로서는 다른 대공장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작은 규모의 공장이나 지역지부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이런 판단으로 권오덕은 김상원·이정태씨와 상의해 자신은 철공분회 부분회장을 맡기로 하고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노동운동을 하던 선배가 사장이 돼 해고된 후배에게 노동운동 현장을 마련해 준다는 것은 요즘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일 것이다. 당시 철공분회 분회장은 최용구라는 분으로 선박수리공이었다. 노동조합을 잘 아는 분은 아니었다.

“하자!”
서둘러 사업을 정리했다. 외상값 안 갚고 애를 먹이던 ‘기아바이’들을 불러 모아 “장사도 정직하게 해야 한다”며 짐짓 일장연설을 하고는 고려은단 부산총판을 접었다. 연설 한 마디와 외상값을 상계(?)한 셈이다.

사업자금을 도와준 형수님과 친지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노동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마당에 외상값 수금하러 다닐 시간이 어디 있나. 차라리 그 시간에 조합원 1명을 더 조직하는 게 나았다. 돈 버는 재주가 없어 본전만 까먹고 있는 줄 뻔히 알고 있던 형수님께서도 반대하지 않으셨다. 아내 역시 내 선택을 지지했다.

심사숙고하지는 않았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내 나이 이제 겨우 서른하나. 노동자들이 단결했을 때 솟구쳐 오르는 힘을 보고 싶었다. 단결의 맛, 승리의 기쁨을 느껴 보고 싶었다.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금속노조 직할 영도철공분회 사무장

1970년 가을, 다시 노동자가 됐다. 나의 직장은 초기 철공분회를 조직하다 사장이 된 이정태씨가 운영하는 대평철공소였다. 노동자가 15명 정도였고, 주로 선박의 엔진을 수리하는 일을 했다. 조선공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사업장이었지만 기가 죽을 우리가 아니었다. 영도의 철공소는 50여곳으로 노동자들은 모두 400명쯤 됐던 것 같다. 철공분회에는 30여곳의 철공소에서 일하는 200여명의 조합원들이 가입해 있었다. 철공분회를 조직했던 선배들이 노동자가 5명 이상 있는 사업장은 거의 대부분 조직을 해 놓았고, 조직이 없던 철공소는 사장이 집안 식구 두세 명을 데리고 일하는 영세사업장이었다.

초창기 영도 철공분회를 조직했던 선배들은 어려서부터 철공소에서 일을 배워 기술이 조금 생기면 다른 철공소로 옮기고, 월급을 더 준다고 하면 또 옮기곤 했다. 영도의 철공소 사정을 손바닥처럼 훤하게 알고 있었기에 인간관계만으로도 노동조합 조직이 가능했던 것이다. 미약하지만 단체협약도 있었다. 하지만 노동조합 활동은 거의 없었다. 나는 대평철공소 노동자로서 금속노조 직할 영도철공분회에 파견된 사무장이 됐다. 부분회장인 권오덕도 마찬가지였다.

월급은 철공분회에서 받기로 했는데, 사실 첫해에는 월급을 받지 못했다. 그만큼 노조 사정이 어려웠다. 노조 사업비 대기도 빠듯했다. 이정태 사장이 활동비에 보태 쓰라고 다달이 얼마씩 도와줬다. 이 글을 읽는 후배들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라고 놀릴지도 모르겠다.

‘낙하산’을 반기는 조합원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영도의 철공소들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조합원을 조직하는 첫걸음이다. 철공분회 조합원들은 이미 우리를 알고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현대자동차노동조합 간부를 하다 해고돼 하청업체 노조에 ‘낙하산’을 타고 들어온 셈인데도, 조합원들은 우리를 타박하거나 경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기며 기대를 하는 눈치였다. 요컨대 ‘저 사람들이 들어오면 조합의 체계가 바로잡히겠구나’ 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기왕에 조직은 있었지만 사업장마다 노동자들이 다 조직돼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10명이 있는 철공소라면 그 가운데 한두 명만 조합원이었다. 우리는 기존에 조합원이었던 노동자를 현장 책임자로 세우고 그를 통해 나머지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가입시켰다.

노동자들은 선선히 조합에 들어왔다. 얘기를 들어 보니, 노동조합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는데 아무도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아 그냥 있었다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조합원이 늘어났다.

어떻게 보면 당시 금속노조가 작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10인 이상 사업체에 근무하는 임금노동자가 100만명이 채 되지 않고, 대공장이라고 해 봤자 서너 곳에 불과할 때다. 이럴 때 금속노조 조합원이 2만6천명이었다면, 상당히 많은 숫자의 중소 규모 사업장이 조직돼 있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어떤가. 한국노총, 민주노총 그리고 양대 노총에 속하지 않은 노조들까지 포함해도 금속부문 전체 조합원은 30만명 수준이다.
규모는 40년 전과 비교해 10배 이상 늘었지만 문제는 내용이다. 30만명에서 LG·하이닉스·현대차·기아차·GM대우·현대중공업 등과 같은 대기업 노동조합을 빼면 남는 숫자가 얼마나 될까.

이 점이 선배인 나로서는 안타깝다. 물론 상황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내가 활동하던 당시 노동통제의 양상은 무지막지했을지언정 지금에 비하면 어설펐고, 중소기업이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짓눌리지도 않았다.

또 내게는 이정태 사장 같은 후원자도 있었다.
지금은 양대 노총의 세력이 만만치 않아 노동자 사이의 연대가 가능하고, 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 같은 우군도 있다. 전술적인 고민도 필요하겠지만, 우선 노동조합운동의 기초에 대한 성찰이 함께 이뤄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년 만에 조합원이 두 배로

현장을 돌며 실태를 파악하고, 조합원을 조직하다 보면 전근대적인 사장님들도 만나게 된다. 철공소에 가서 노동자들과 대화라도 나눌라치면 “이 새끼들 뭐 하러 왔노?”라는 상소리가 바로 튀어나왔다.

우리가 하루에도 두세 번씩 철공소를 돌며 사장을 상대로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한편에서는 설득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몰아세우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청계피복의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분신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는 그 비참한 소식을 나중에 알았다. 노동조합운동의 전국적 연계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그런 상황이 그로 하여금 분신이라는 극한적인 투쟁을 하도록 내몰았는지도 모른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사실 우리는 현장을 크게 개선하지는 못했다. 첫째·셋째 일요일만 유급휴일로 돼 있던 것을 모든 일요일을 유급휴일로 바로잡고, 해고예고수당 항목을 넣는 정도에서 단체협약을 갱신했다.

하지만 우리는 조합원의 문제제기가 들어오면 곧바로 달려갔다. 해고수당·퇴직금을 대신 받아주는 게 우리의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였다.

한번은 해고예고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철공소 사장을 찾아가 따졌더니 “노조는 빨갱이 아니냐”고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우리가 사사건건 따지고 물고 늘어지자 심지어는 나와 권오덕을 ‘스카웃’한 장본인들인 철공소 사장님들도 “야, 너무 세게 하는 것 아이가?”라며 한마디씩 했다.

이렇게 노력한 끝에 1년 만에 철공분회는 자리를 잡았다. 처음 우리가 갔을 때는 200명 수준이던 조합원이 1년 후에는 500명에 육박했다. 조합비 납부율도 거의 100%에 달했다. 일괄공제를 하는 곳도 있고, 현장 책임자가 월급날 조합비를 걷어 분회에 가져오는 곳도 있었다.

나중에는 완강하던 사장님들도 설득이 됐다. 이 과정에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월급이 밀린 철공소에 쳐들어갔더니 사장이 하청대금을 못 받아 사정이 어렵다고 거꾸로 우리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 사연이 하도 딱해서 전후 사실관계를 다 확인해 보고는 그 금액만큼 돈을 빌려다 줬다. 물론 그 사장은 하청대금을 받아 빚을 갚았고, 나중에는 철공분회 활동에 적극 협력했다. 물론 이정태 사장 같은 분들이 철공분회에 적대적이었던 다른 사장들을 설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노동조합 간부가 회사에서 돈을 받는 불미스러운 일은 요즘도 가끔 있다. 그런데 이건 돈을 받은 게 아니라 회사에 돈을 빌려 줬으니 역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이 그렇게 각박하지는 않았다. 영도의 철공분회, 그것은 어쩌면 자본주의라는 사막 한 귀퉁이에 남아 있던 작은 오아시스가 아니었을까. <계속 이어짐>

박미경 객원기자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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