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탈출’이라는 주장을 하면 공장은 버려야 할 곳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장과 직장을 모두 버리고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노동조합이 주목해야 할 활동이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임금의 노예, 임금실리만을 추구하는 ‘공장귀신’이 아닌 ‘잠일술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이를 통해 삶의 시간적 재편, 건강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 가족과 사회관계 및 문화적 영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 가야 한다.
 
부러진 회초리, 가출하는 현장

기업으로 제각각 흩어진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하나의 노조로 만드는 것은 새로운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드는 것과 같다.
하나의 국가를 안정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고 지방토호세력들의 힘을 빼야 한다. 각 지방의 문화와 관습이 다르기 때문에 정치적 이념·행정제도·언어·법률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산별노조를 만들면서도 ‘지방의 관습을 해체하고 국가의 법률을 만드는 과정’을 거쳤다. 특히 산별노조의 규약은 격렬한 논쟁 끝에 어렵사리 만들어졌다.

과거에는 지방토호세력들이 각자 무역을 했다. 이제는 중앙정부가 생겼으니 중앙정부가 무역을 집중해서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기업의 노사 간에 했던 단체교섭을 대신해 중앙에서 한 번에 교섭을 하자는 중앙교섭이다. 각 사용자들이 모두 참석하기 어려우니 자기들끼리 사용자단체를 만들어 그 대표들이 교섭에 나오라는 것이다.

재정도 통합해 각 지방의 토호세력들이 걷던 세금을 중앙정부에서 직접 걷는다. 모든 사업장의 조합비는 금속노조 중앙에 직접 납부하고 각 사업장에서 필요한 예산을 거꾸로 중앙에서 내려 보낸다.

이렇게 중앙집권적인 틀을 갖추긴 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나름대로 재정이나 조직형태 등 하나의 집 모양을 갖추긴 했는데 문제는 울퉁불퉁한 곳에 지었다는 것이다.

교섭이라는 것은 노조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사용자라는 상대가 있다. 그동안 대공장 노조와 거래를 해 왔던 대공장 사용자들은 중앙정부와의 거래를 거부한다. 대공장 토호세력과 계속 거래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말을 듣지 않는 사용자들을 중앙정부가 힘으로 눌러야 한다. 중앙정부가 힘을 쓰려면 대공장의 노조간부들과 조합원들이 힘을 실어 줘야 한다. 금속노조가 현대나 기아의 사용자들이 산별중앙교섭에 참가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는데 현대나 기아의 노동자들이 싸우지 않는다면 효과가 없다.
 
“한날한시에 모든 사용자들을 모아 교섭을 하자는데 잘 따르지 않습니다. 사용자가 잘 따르지 않는 것은 둘째 치고 대공장의 집행부도 잘 따르지 않습니다. 총사령관이 총공격 명령을 내려도 큰 조직들이 날짜를 맞추지 못합니다. 그러면 총사령관이 날짜를 맞추지 못한 현장사령관에게 벌을 내려야 합니다. 벌을 내리기 위해 총사령관이 참모를 파견해 현장사령관을 응징하려고 하면, 기껏 중앙에서 내려온 참모들이 권총 정도 뽑아들고 협박하는데 대공장의 현장사령관은 대포와 미사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2008년 4월22일 금속노조의 단체교섭에 참가하는 교섭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교섭총괄 실무책임자는 이같이 하소연했다.

힘이 별로 없는 사용자들은 금속노조가 한날한시에 불러 모은 교섭자리에 참가한다. 그러나 재벌회사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대림그룹·두산그룹·삼호중공업 등 재벌그룹사의 사용자들은 요지부동이다. 2001년 산별노조를 만들어 산별중앙교섭에 참가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도 참가하지 않고 있다.


회사를 참가시키려면 해당 사업장의 조합원들이 그야말로 절박하게 산별중앙교섭 참가를 요구하며 회사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대공장 조합원들의 임금이나 단체협상은 산별중앙교섭이 아니라 결국은 사업장에서 노사 간 교섭을 통해 해결된다. 산별중앙교섭에 참가하라고 절박하게 싸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별노조니까 당연히 다 모여서 교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산별노조는 당연히 중앙집권적 원리에 따른다. 교섭도 전부 다 모아서 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그에 따른 획일적인 지침을 실천하도록 한다. 그러지 못하면 징계를 한다. 그런데 징계라는 것이 별로 힘을 발휘한 적이 없다.

노동조합은 애초에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징계를 통해 다스리는 원리를 가지고 있는 조직이 아니다. 대의와 원칙을 스스로 존중하면서 상호 지키려는 자주적인 약속과 자율적인 노력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2008년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T사의 경우 원청 대기업으로부터 신규로 납품계약을 따내지 못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경제위기로 가뜩이나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완성차 회사간부가 신규아이템을 주지 못하겠다는 협박을 하니까 부품사 사측에서는 노조에 압박을 넣었다. “금속노조를 탈퇴하면 어떻게든 신규 아이템을 딸 수 있으니 금속노조를 탈퇴하라”고 작업했다. 노조간부는 압박을 이기지 못해 금속노조 탈퇴 총회를 추진했고 금속노조는 이를 막으려 나섰다.

2009년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Y사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금속노조 중앙에서는 지침을 통해 ‘양보교섭은 절대 안 된다’ ‘희망퇴직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작은 부품사에서는 생존을 위해서는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사측이 압박을 해 댔다. 결국 조합간부들은 회사의 구조조정을 받아들였고 금속노조를 탈퇴했다.

헌법에 엄연히 노동3권이 보장돼 있는데 노조 때문에 납품을 끊었다면 그게 어디 완성차 대기업이 할 짓인가. 부품사의 사용자 또한 노조 때문에 납품을 받지 못한다고 핑계 대는 것도 석연치 않다. 이런 협박에 굴복하는 중소사업장의 간부들도 그리 자랑스러운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다. 이런 식이라면 노조활동은 아예 할 수 없다. 때문에 금속노조에서 이런 행위를 한 간부들을 징계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힘 없는 중소사업장의 문제를 채찍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게다가 기업의 경영이 극단적으로 악화된 상황에서 중소사업장의 생존을 위한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계속 이런 문제들은 생길 수밖에 없다.

산별노조 중앙은 ‘양보교섭은 절대 안 된다’고 하지만 수많은 현장에서 양보교섭이 벌어지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회초리로 해결하려고 한다면 결과는 뻔하다. 어린 자식이 잘못된 행동을 했을 경우 그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회초리로 다스리면 결국 아이는 삐뚤어진다. 아이는 급기야 가출을 선택한다.

2006년 금속노조는 산별노조라는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하면서 2년 후인 2009년 기업단위의 지부를 해체하고 지역단위의 지부로 조직을 개편하는 내용으로 규약을 바꿨다. 그러나 기아자동차의 일부 조합원들은 자체 조합원 투표를 통해 금속노조의 규약을 거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부 언론은 이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노노갈등이 일어나고 있고 산별노조에 대한 현장의 반란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이자 새로운 메시지로 등장한 산별노조에 대한 반발이 하나 둘씩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가 확산되면 ‘산별노조만이 희망이고 산별노조만이 살 길이다’는 얘기는 새로운 메시지가 아니라 ‘니들이나 그렇게 살아라!’라는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고리타분한 메시지가 될 수도 있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힘겹게 노조를 지켜 가는 중소사업장의 노동자들은 2009년 4월 쌍용자동차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규탄하는 집회에 참가한 후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래도 쌍용차는 대공장이니까 전국 동지들이 달려와서 집회라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중소사업장은 죽을 맛입니다. 중앙에서 내려오는 지침은 이걸 하면 된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양보교섭은 안 된다고 하고, 희망퇴직 받으면 안 된다고 하고, 구조조정 협상은 파업권이 없는 노사협의로 하지 말고 꼭 단체협약으로 진행하라고 합니다. 다 맞는 말이죠. 그런데 지키기 너무 힘들어요. 이것도 저것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1968년 3월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확산됐던 운동을 ‘68혁명’이라고 한다. 그 혁명의 핵심적인 구호 중 하나가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 고도 경제성장으로 잘나가던 시절, 그들이 요구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는 그 어떤 것에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금속노조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자본의 요구를 수용하지 말라는 내용의 지침을 내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다. 노동자를 억압하는 것은 노조가 아니다. 그러나 ‘금지’외에 ‘다른 길’을 보여 주지 못하는 상황에 억눌린 현장 조합원의 답답함을 들으면서 ‘68혁명’의 구호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사실 이런 문제는 단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 참여 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오랫동안 반복해 왔다.
노조를 만들면 노동조합 설립신고와 함께 사용자를 대상으로 교섭을 요구한다. 만약 교섭을 하지 못한다면 노동3권 중 자주적 단결권, 단체행동권은 있어도 단체교섭권은 없는 셈이다.

전체 노동조합운동이 공장을 넘어 사회로 나오기 위해서는 공장 안의 노사관계를 통한 교섭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사회적 교섭을 요구하게 돼 있다. 그것이 노정교섭이든 노사정교섭이든, 아니면 지역 차원의 사회적 교섭이든 어떤 형태로든 교섭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민주노총은 노사정교섭에서 뼈아픈 경험을 했다. 대부분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고 교섭을 아예 하지 말아야 할까? 매번 교섭 없이 투쟁만 하는 것을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교섭에 대한 반대와 찬성이라는 단선적 대립을 넘어서지 못했다.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 때문에 2005년 2월1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찬성파와 반대파 간 폭력사태로 무산되는 초유의 사태도 겪었다.

교섭은 한쪽의 의견이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고정된 협상이 아니다. 정부와 자본이 사회적 교섭을 원할 때는 그 목적이 있으며 노동조합 또한 마찬가지다. 상호의 목적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정권과 자본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교섭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난센스다. 힘이 있을 만하면 참가하고 힘이 없을 때는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웃기는 것이다. 힘이 없을 때도 교섭을 활용해 방어전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은 노정교섭이든 노사정교섭이든, 혹은 지역단위의 사회적 교섭이든 이를 정착시키고 활용하지 못했다. 사회적 교섭은 노동의 요구를 쟁점으로 만들어 지지를 넓히고, 그것을 통해 투쟁을 만들어 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 교섭=타협하기 위한 것’이라는 타협만을 추구하는 자세도 문제지만 거꾸로 일체의 사회적 교섭을 거부하는 것 또한 그에 못지않은 해악이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교섭을 활용하지 못하는 정치적 무능을 드러냈다. 동시에 총파업을 남발했지만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해 군사적 측면에서도 무능했다. 교섭도 투쟁도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 금지된 무능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한편에서는 임금동결이나 삭감은 절대 안 된다고 외친다. 그러나 경제위기로 인한 생산감축은 노동시간 단축으로 이어지고 잔업·특근에 의존하던 임금은 줄어들고 있다. 기업 차원의 임금을 넘어 정규직 임금인상분의 일부를 비정규직을 위해 사용하는 조치를 노동조합들이 우선적으로 실천하면서 비정규직을 위한 사회임금을 요구하자는 사회연대임금 제안이 나온다.

노동운동의 일각에서는 이 같은 제안에 대해서도 개량주의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것도 저것도 금지된 상태에서 노동자들의 실질임금과 협약임금은 깎이고 만다.
비정규직과 연대하는 투쟁을 하자고 해도 대공장 정규직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비정규직 기금을 모으자고 제안하면, 이번에는 시혜적인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결국 비정규직과 연대투쟁도 못하고 물질적 지원도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에서 시작된 주간연속 2교대제 논의도 마찬가지다. 심야노동시간을 줄이자는 목적으로 시작됐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노동시간이 줄어드니 임금이 줄어들게 된다. 생산도 줄어든다. 회사에서는 일정한 임금양보와 생산성 향상을 통해 생산량을 맞추자고 한다. 그런데도 노동조합운동의 일각에서는 실질임금삭감도 없고,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동강도 강화도 없고, 고용불안도 없는 이른바 ‘3무 원칙’을 들이댔다. 그것은 완전무결한 주간연속 2교대제를 꿈꾸는 것일 뿐이다.

‘3무 원칙에 근거한 교대제 쟁취’를 선언했을 때, 현장조합원이나 다른 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전혀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더 나아가 “정말 주간연속 2교대제를 할 생각이 있는지 헷갈린다”고 할 정도였다.

주간연속 2교대제는 심야노동을 없애는 것을 통해 노동시간을 단축하자는 것이다. 이를 전략적 목표로 두고 임금이나 생산성 관련협상에서 부분적 타협을 하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다.

현대차의 주간연속 2교대제는 수년이 지난 2009년 7월 현재까지도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한 상태다. 

경제위기가 도래하면서 2008년 말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일자리 나누기’도 마찬가지다. 10시간 하던 일을 5시간씩 쪼개 일하면 불가피하게 실질임금이 삭감된다. 임금을 최대한 보전하기 위해서는 기업주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지원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사회보장이 취약한 조건이기 때문에 ‘일자리 나누기’는 안 된다고 반대한다. 그러면 사회적 보장을 확대하기 위한 투쟁을 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오히려 ‘일자리 나누기’를 노조가 선도하면서 ‘사회적 임금’을 쟁점으로 만들어 나가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나 ‘국민생계 국가가 책임져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는 주장을 감안하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남는 것은 단 하나다. 어떤 양보도 할 수 없고 해고도 받아들일 수 없으니 장렬하게 투쟁하는 것! 하지만 투쟁이라는 것은 단지 물리적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투쟁의 명분과 정당성이 매우 중요하다. 설득과 명분을 확보하는 정치적 과정이 없다면 투쟁은 알몸뚱이로 버티기에 불과하다. 장렬한 투쟁은커녕 비참한 투쟁이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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