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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40년, 박인상 회고록 (14)[제5부] 노동자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제2편] “인상아, 이래 끝낼 수는 없다 아이가!”
노동자가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총아(寵兒)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라는 뜻인데, 이 뜻대로라면 나는 확실히 ‘총아’였던 것 같다. 자랑이라기보다는 정말 고맙고 두려워서 하는 말이다. 40년 동안 노동운동을 하면서 많은 분들의 아낌과 키움을 받았다. 마치 꽃나무에 물을 주고 가꾸듯 그분들께서는 나를 보살펴 주셨다.

조선공사에서 해직된 뒤 한동안 실의에 빠진 나를, 친구 권오덕과 영도철공분회의 선배들이 다시 일어나게 해 줬다. ‘하방’이라는 말은 알지도 못했다. 그저 일할 수 있는 현장이 있다면, 노동조합을 함께할 동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는 마음이었다.

만일 그때 내가 본조 간부로 올라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나를 불러 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총아에는 “시운을 타고 입신하여 출세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는 당시 노동운동을 주름잡던 노동조합 ‘오너들’의 총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던가.
우리가 구속되자 가족들이 나섰다. 특히 부인들이 적극적이었다. 주동자는 내 아내였다.

노조는 남편이, 가족대책위는 아내가

구속된 간부의 부인들로 구성된 가족대책위원회는 서울로 올라가 당시 소공동 한국노총회관 2층에 있던 금속노조 본조 사무실로 몰려갔다. 금속노조에는 비상이 걸렸다. 부인들 11명이 안 그래도 시끄러운 경상도 사투리로 ‘사태를 빨리 해결하라’고 소리 지르며 사무실에 주저앉아 있으니…. 금속노조 이헌구 사무국장이 뒷날 말하기를, 내 아내가 “조합원들이 감방에 들어가 있는데 사무국장이라는 양반이 집에 가서 잘 수 있느냐”며 자신을 딱 붙잡고 늘어졌다고 한다. 부창부수랄까.

그때만 해도 금속노조의 규모가 참 작았다. 조합원수는 2만6천명으로 한국노총 16개 산별 가운데 여덟 번째였다. 본조에는 김병용 위원장, 이 사무국장, 사무를 보는 직원 한 명 등 3명만 상근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의 여관비와 밥값이 없어 그 돈을 마련하느라 쩔쩔맸다고 한다.

가족들은 한국노총 김성훈 조직국장이 “최대한 노력할 테니 일단은 댁으로 돌아가 계시라”고 설득한 끝에 이틀 만에 돌아갔다. 부인들의 내조 덕분인지 한국노총도 뒷짐을 지고 있지는 않았다. 우리를 위해 변호사를 구하고 비용을 댔다.

금속노조는 산하 조직으로부터 성금을 걷어 구속된 지부 간부 11명의 집에 쌀 한가마니씩 보내 줬다. 구속자 대부분이 영도 봉래산 산꼭대기 밑에 자리한 봉래동에 살았는데, 이 사무국장이 혼자 산동네 판잣집으로 쌀을 짊어 나를 수가 없어 지게꾼까지 불렀다고 한다.

국제금속노련과 국제금속노련 일본가맹노조협의회에서도 도움을 줬다. 조공지부 간부들의 구속에 항의하는 서한을 우리 정부에 보냈고, 돈도 2천달러를 보냈다. 이 일은 한국노총의 조선원 국제부장이 담당했다.

1966년 5월18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영도 봉래동에 20만원을 주고 살림집을 구했다. 요즘으로 치면 1천500만원가량 되는 돈이다. 아내는 결혼을 한 뒤에도 조선공사 기획실에 계속 근무하다 임신하면서 퇴직했다. 이듬해 큰아이(영하, 딸)를 얻었고, 내가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 둘째(청, 아들)를, 이어 셋째(운, 아들)를 봤다. ⓒ 매일노동뉴스
‘일등신부감’을 만나다


이쯤 해서 내 아내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내 아내 김성자는 1944년생으로 고향은 함경북도 북청이다. 1·4 후퇴 때 온 가족이 피난을 내려와 부산 영도가 제2의 고향이 됐다. 5남1녀의 맏이인 아내는 부산 훈성여자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조선공사 기획실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했다. 훈성여상은 뒤에 계성여상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돌아가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가 다녔다는 그 학교다.

나는 허재업 지부장과 박정부 수석부지부장 덕분에 아내를 알게 됐다. 허 지부장은 가끔 기획실에 들를 기회가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아내를 눈여겨봤다고 한다. 허 지부장이 먼저 “박 부장, 좋은 처녀가 있다”고 운을 띄웠고, 박 수석부지부장이 슬쩍 보고 와서는 “야, 진짜 괜찮다, 결혼해라”고 바람을 넣었다. 박정부 선배는 며칠 뒤부터는 아예 “해라, 해라” 하고 주문까지 외우고 다녔다.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결혼이란 게 나만 결심한다고 되는 일인가. 게다가 한창 물이 오르기 시작한 노동조합 일은 또 어떻게 하나. 그때는 선배들이 괜히 나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훗날 내가 노동조합운동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얻게 된 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선배들은 내가 한눈팔지 않고 옳은 길로 갈 수 있게끔 유도한 것이었다.

노동조합운동을 하다 보면 많은 유혹이 있다. 가장 큰 게 출세이고, 두 번째가 돈 그리고 세 번째가 여자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하는 이와 일찌감치 가정을 꾸린 나는 행운아였다. 마누라 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아내는 활달하고 명랑했으며, 외모도 빠지지 않았다. 거기에 금상첨화로 허재업 집행부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조합원이었다. 친구 권오덕도 이 소식을 듣더니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조선소에서 진수식을 하면 대개 선주의 아내나 딸이 선박을 선대(船臺)에 고정시켜 놓은 밧줄을 조그만 손도끼로 끊는 영광을 차지한다. 내 아내는 회사 대표로 뽑혀 이 역할을 맡을 정도로 회사에서는 알아주는 재원(才媛)이었다. 사진은 1966년 1월 진수식에서 아내의 모습. ⓒ 매일노동뉴스
“자네, 통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그때만 해도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여직원들은 조합원이라도 조합비만 냈지 노동조합 활동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하고 싶어도 못했을 것이다. 청년부장을 맡고 있던 나조차 여성 조합원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매사에 적극적이었던 내 아내는 조합원으로 있을 때 노조와 회사 싸움에 자신이 나서지 못한 것을 내심 억울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편을 돕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투쟁을 한 것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남편을 도우려 했던 것인지, 아무튼 내 아내는 세 살 먹은 딸 영하를 이웃집에 맡겨 놓고는 둘째를 임신한 몸으로 가족들의 지원투쟁을 이끌었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아내는 검찰 조사까지 받았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가족들이 아우성을 치는 현장에는 언제나 내 아내가 맨 앞에서 목청을 높이니까 검찰이 겁을 한번 주려고 불렀던 것 같다.

결국 선배들 뜻에 따라 데이트 신청을 했다. 웬걸, 순순히 받아 준다. 또 마누라 자랑이지만, 사실 내 아내는 ‘일등신부감’이었기에 콧대가 높아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여상을 나왔으니 당시로는 고학력이었고, 조선공사에 근무하고 있었으니 요즘으로 치면 대기업 정규직 사원이었다. 조선소에서 진수식을 하면 대개 선주의 아내나 딸이 선박을 선대(船臺)에 고정시켜 놓은 밧줄을 조그만 손도끼로 끊는 영광을 차지한다. 내 아내는 회사 대표로 뽑혀 이 역할을 맡을 정도로 회사에서는 알아주는 재원(才媛)이었다.

만나는 횟수가 거듭되자 서로 마음에 두고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게 확인되기 시작했다. 첫사랑이었다. 처가가 될 집에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러 간 날, 장인어른이 되실 분께서는 ‘내 딸 고생 안 시킬 자신 있느냐’는 다짐은 제쳐 놓고, ‘통일 문제’를 화두로 끄집어내셨다. 장인어른은 함남고보 출신으로 박학다식하셨다. 마침 영도의 선배들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는지라 그동안 보고 배운 것들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장인어른은 ‘합격’ 판정을 내려 주셨다. 노동조합운동을 한다는 사위 녀석의 사람됨과 사상(?)을 우회적으로 검증하신 것이었다.

1966년 5월18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영도 봉래동에 20만원을 주고 살림집을 구했다. 요즘으로 치면 1천500만원가량 되는 돈이다. 아내는 결혼을 한 뒤에도 조선공사 기획실에 계속 근무하다 임신하면서 퇴직했다. 이듬해 큰아이(영하, 딸)를 얻었고, 내가 옥살이를 하고 있을 때 둘째(청, 아들)를, 이어 셋째(운, 아들)를 봤다.

둘째를 가졌을 때 나는 아내가 임신한 줄도 몰랐다. 아내는 날마다 면회를 왔지만 복대로 배를 감아 아이 가진 태를 내지 않았다. 한동안 면회를 오지 않기에 궁금하고 걱정도 되고 그러던 차에 어머님과 장모님이 함께 오셔서 “아들 낳았다”고 해서 알게 됐다. 어린 딸 데리고 아들을 배 안에서 키우면서 쫓아다녔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면서도 감옥에 있는 내가 걱정할까 봐 내색 한번 하지 않았으니, 이 대목에서는 정말 아내에게 고맙고 장하다는 소리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잡아 가둘 땐 언제고, 3년 만에 무죄라니…

1970년 3월14일. 1심 판결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은 허재업 지부장만 빼고 나머지 10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나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는데, 고등법원에 항소를 해서 몇 달 뒤 무죄를 선고받았다.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됐는데, 그러기까지 3년이 걸렸다.

석방된 지부 간부들 가운데 그래도 내가 살림형편이 덜 급했다. 고향에 계신 형님이 아내와 아이들을 돌봐 주신 덕분이다. 나는 석방되자마자 허 지부장 옥바라지를 했다. 허 지부장은 고등법원이 있는 대구로 이감이 됐다. 처음에는 거의 매일 지부장 사모님을 모시고 대구로 갔는데 얼마 되지 않아 코피까지 났다. 옥살이만큼 옥바라지가 힘들다는 건 그때 알았다.

허 지부장은 그해 7월 보석으로 풀려났다. 허 지부장이 석방되던 날, 이제는 해고돼 조선공사에 아무런 끈도 없는 조공지부 전직 간부들과 함께 대구로 마중을 갔다. 감옥에 혼자 남았던 허 지부장은 동지들이 면회를 오지 않는다고 버럭 소리를 지를 때가 많았다.

우리 딴에는 골려 준다고 “인자, 속이 씨~언합니꺼?”라고 운을 뗐더니 허 지부장은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껄껄 웃었다. 사나이들의 털털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우리는 조공지부와 그렇게 작별을 했다.

“아이고 더버라. 무신 날이 이래 푹푹 찌노?”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안 덥게 생겼소? 잘몬한 것도 없는 우리가 조선공사에서 쫓기나가꼬 이기 머 하는 짓입니꺼. 지부 하는 거 보께네 딱 돌겠심미더. 우리가 깜빵 갔다가 나왔시몬 빈말이라도 ‘복직해야 되는데 우짜노’ 이래야 되는 거 아임미꺼?”

“고마해라. 이선(二線)을 지대로 몬 세우고 덜커덕 구속이 돼 삐린 우리가 잘몬한 거 아이가.”
“그란데, 요가 무신 조선공사 제2노조도 아이고. 이 사무실에 사장은 허재업이고, 사무국장은 박인상이가?”

나는 석방이 된 뒤 사업을 한답시고 사무실을 차렸다.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한 동지들은 시내에 나올 일이 있을 때마다 사무실을 찾았다. 내가 차린 사무실은 고려은단주식회사 부산총판이었다. 먹고살기가 막연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인상아, 이래 끝낼 수는 없다 아이가!”

노동조합운동을 하다 교도소까지 다녀왔으니 취직이 될 리는 만무했고, 식구들은 먹여 살려야 했으니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아내의 조카가 약방에서 일을 했는데 고려은단을 소개시켜 줬고, 사업자금 60만원은 둘째 형수께서 빌려 주셨다.

‘총판’이라고는 했지만 실은 도매상이었다. 서울 본사에서 은단을 받아 부산의 소매상들에게 넘기는 일이었다. 그때 버스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일본말로 ‘기아바이’라고 했는데, 은단 소매상들의 대부분이 기아바이였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돈은 안 됐다. 기아바이들은 외상으로 은단을 가져가서는 물건 값을 갚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외상으로는 줄 수 없다”고 하기도 그렇고, 난감했다. 여기에 사무실이 제2의 조공지부 사무실이 됐으니 담뱃값이며 밥값이 만만치 않았다. 이러다 사업자금 다 까먹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을 무렵, 권오덕이 사무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왔다.

권오덕 역시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고 지인에게서 사업자금 5만원을 융통해 자갈치시장에서 생선장사를 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장사가 궤도에 오르면 부인에게 맡겨 놓고 자신은 노동운동을 계속할 요량이었는데, 본전만 까먹게 돼 철수하고는 남은 돈을 돌려줬다는 것이다. 우리 둘 다 돈 버는 재주가 없었다.

“야 인상아, 우리가 조선공사에서 나왔다고 주저앉아가 되긋나? 젊은놈덜이 뜻도 다 몬 패 보고 이래 끝낼 수는 없다 아이가!”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느 공장에서 우리를 받아 줄 것인가…. 대책이 서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에게 권오덕이 마치 길이 여기에 있다는 듯 힘주어 말했다.

“철공소가 있다 아이가!”
<계속 이어짐>

박미경 객원기자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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