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탈출’이라는 주장을 하면 공장은 버려야 할 곳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장과 직장을 모두 버리고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노동조합이 주목해야 할 활동이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임금의 노예, 임금실리만을 추구하는 ‘공장귀신’이 아닌 ‘잠일술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이를 통해 삶의 시간적 재편, 건강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 가족과 사회관계 및 문화적 영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 가야 한다.
 
굴곡 위의 새집

외환위기로 인해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을 겪은 뒤 새집을 짓자는 의견이 잇따랐다.
“경제가 망한 상황에서는 기업별 수준에서 아무리 해 봤자 당해 낼 수 없다. 그러니 기업을 넘어 산별노조라는 크고 튼튼한 집을 짓자.”
 
민주노총도 살 길은 산별노조라고 했다. 모든 산업에서 산별노조를 만들자고 했다. 민주노총 자료에 따르면 2008년 12월 말 현재 조합원의 66.3%가 산별노조 조합원이다.
기업별 노동조합은 해당 기업의 종업원만이 조합원이다. 산업별 노동조합은 해당 산업의 모든 노동자들, 심지어 실업자와 취업준비자도 모두 조합원이 될 수 있다.


기업별 노조는 기업이라고 하는 공장, 즉 현장이 유일한 조직기반이다. 그러나 산업별 노동조합에서 기업, 즉 공장은 부분이 될 수밖에 없다. 산별노조는 공장의 힘 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장을 넘어 공장 사이의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업별 노조라는 단독주택을 버리고 새 아파트로 이사한 만큼 산별노조는 새로운 메시지가 될 것인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같이 원래부터 모든 교직원을 하나의 노조로 조직한 경우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고 할 수 없다. 산별노조로 전환한 대표적인 사례인 금속노조는 어떨까?
산별노조라는 새집을 짓긴 지었는데 이 집이 자리하는 위치는 평평한 땅이 아니다. 굴곡치고는 너무나 심한 굴곡 위에 지어진 집이다.

아래의 금속노조 조직현황표를 보면 지회수에서 불과 0.85%밖에 차지하지 않는 1만명 초과 사업장이 조합원수에서는 24.49%를 차지하고 있다. 100인 이하 지회의 경우 지회수에서는 40%가 넘지만 조합원수는 2.7%에 불과하다. 큰 기업단위 각 공장을 지회로 쪼개 비교한 것이다.
현대차지부의 경우 조사 당시 4만4천988명, 기아차는 3만90명, 지엠대우차는 9천739명에 달했다.


엄청난 규모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산별노조라는 새집이 현대차 같은 4만5천미터의 높은 산도 있고, 10미터 이하의 계곡도 있고, 다시 기아차 같은 3천미터의 높은 산이 있고, 50미터 이하의 계곡도 있는 너무 울퉁불퉁한 땅 위에 지어졌다는 뜻이다.

조합원의 숫자만이 아니라 임금을 비교해도 마찬가지 현실이다. 금속노조의 2008년 [요구안 해설자료]를 보면 기업 간 임금격차는 최고 4배 이상까지 벌어진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현대차의 경우 유사한 정규직 평균 대비 비정규직 기본급은 60%, 평균임금은 47% 수준이며 기아차의 경우 입사 5년차 비교시 평균임금의 58.5% 수준이다.   

임금만이 아니라 노동조건의 차이도 심각하다. 한국사회가 ‘승자독식’ 사회로 양극화돼 있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재벌을 중심으로 수직 하청계열화된 상황이 그대로 금속노조에도 반영되고 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하나의 산업에서 풀어야 할 문제는 사회 전체의 문제해결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울퉁불퉁한 땅 위에 지어진 산별노조를 이대로 그냥 둔다면 그 기초가 튼튼하지 못해 무너질 것이 뻔하다. 평탄작업이 필요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불가능한 평탄작업

4만5천미터 산과 10미터 이하의 계곡을 세워 놓고 단칼에 중간을 베어 내 평탄작업을 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천지개벽을 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봉우리를 깎아 계곡을 채우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임금이 높은 곳이나 노동조건이 좋은 곳의 임금을 깎고 노동조건을 후퇴시켜 하향평준화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 ‘양보교섭 결사반대’를 굳이 외치지 않더라도 이미 회사가 물밑작업을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산별노조가 되면 대기업의 임금을 깎아 비정규직과 중소사업장에 준다.”

산별노조 전환에 반대하는 사측에서 떠든 이 논리는 과거의 일이라 치자. 임금인상분의 일부를 비정규직을 위해 쓰자고 해도 반대하는 판국에 대공장 조합원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아래부터 끌어올리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아래로부터 끌어올리지? 몇 명이 되든 조합원으로 조직된 비정규직이나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이 꿈틀거리면 노동조합을 아예 인정하지 않는다. 끝까지 싸운다고 해도 장기투쟁을 감수해야 한다.
단칼에 잘라 평준화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위에서 깎아 아래를 채우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아래에서 치고 올라가려고 해도 조직된 군사가 없다.

평탄작업은 이런 단순한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고참인 대공장은 보급로를 챙기고, 신참인 비정규직이나 신규영세사업장은 공격로를 챙기는 각자의 역할이 다양하게 어울려야 한다.

내부의 임금격차는 안에서 해결할 수 없다. 기업의 규모와 지불능력에 따라 격차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기업들의 규모나 이익수준을 평준화하려면 산업 전체를 뜯어고쳐야 한다.

높은 봉우리를 깎을 수도 없다. 최대한 잘해야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나마 맏형의 역할을 하면서 비정규직이나 중소사업장 노동자에게 몫이 더 돌아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준으로는 턱도 없다.
해법은 공장 밖에서 +α를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고참이자 맏형인 대공장이 최소한의 역할로 나눔을 시작해야 하고, 그러한 보급을 받으면서 신참을 모아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가려면 전략을 바꿔야 한다. 울퉁불퉁한 ‘중층적이고 다양화된 조합원 구성’과 획일적인 ‘중앙집권적 산별’이라는 조직형태와 운영원리는 어울리지 않는다.  
2006년 현대·기아·지엠대우·쌍용차 등 대공장이 금속노조에 가입했을 때만 해도 ‘15만 최대산별노조니까 뭔가 큰일을 낼 것’이라는 꿈을 꿨다.

하지만 그 이후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중앙집권적이고 획일적인, 한날한시에 한자리에서 노사 모두가 앉아 한 번에 교섭을 끝내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거꾸로 경총 관계자들이 말한다.

“서구 유럽처럼 작업장에서 교섭 안 하고 한 번에 정리된다면 산별노조를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하잖습니까?”
차라리 조롱에 가깝다.

‘한날한시 15만 총파업’을 주장했지만 제대로 된 적이 없다. 중소사업장은 호롱불만 쬐어도 금방 끓고, 대공장은 장작불을 한참 태워도 끓을까 말까한 무쇠 가마솥이다. 그런데도 임금투쟁 일정을 ‘어거지’로 맞추려 하니 잘될 리가 없다.

“무슨 소리냐, 지도부가 무능하고 투쟁의지가 없어 그런 것이다.”  “무능한 지도부에게 면죄부를 줘서는 안 된다!” 
전략을 바꿔야 할 판에 느닷없이 지도부를 바꾸는 쪽으로 몰고 간다. 그럼 지도부가 바뀌면 해결되나? 이런 권력 중심적이고 정파적인 발상이야말로 새로운 메시지와 새로운 가능성을 가로막는 고질병이다.

지도부가 바뀌면 분명 달라지는 것이 있다. 하지만 거기서 거기다. 대공장 노조에서 지도부가 바뀌었다고 해서 비정규직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한 집행부를 여태 본 적이 없다. 새로운 전략과 비전을 가진 지도부가 필요하다.  
 
호박에 그은 줄, 씻기기 시작하나

해가 어디서 떠오르는가를 물었다. 사람들이 답한다.
“해는 산 위에서 떠오른다.”
“아니다. 바다에서 떠오른다.”
“무슨 소리야! 내가 평생 동안 보면서 살아 왔는데 숲에서 떠오른다 말이야!”

산에 사는 사람은 산에서 해가 떠오른다. 섬이나 바닷가의 사람들에게는 바다에서 떠오르고, 밀림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숲에서 떠오른다. 따로 살다 한집에 모여 산다고 해서 갑자기 생각이 같아지지는 않는다.

상당수의 대공장 노동자들에게 노조는 ‘도구’일 뿐이다. 임금이나 고충처리를 하는 ‘자판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혹독한 노동조건에 놓인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와 비정규직에게 노조는 또 다르게 다가온다.

“쟤들은 노동조합을 계급혁명의 실험장으로 생각하는 것 아냐?”
일부 노동운동가들과 밀착해 투쟁하는 사업장을 경험한 간부의 말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이론은 많다. 그만큼 논란도 적지 않다. 노조에 대한 주장을 종합한다면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다.  

‘실리주의적 노조’ ‘배부른 귀족노조’는 삼각형의 위 꼭짓점인 ①에 있다. ‘전투적 실리노조’라는 표현은 ③인 것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는 ①에 가깝다는 얘기다. 2009년 4월 보궐선거로 당선된 민주노총 지도부가 기자회견을 통해 선언한 ‘사회연대노총’은 ②쪽으로 가까워지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혁명적 이론을 가진 활동가들이 ‘혁명을 실험하고 있다’고 하는 사업장의 노동조합은 ③에 가까울 것이다.

다수의 국민이 생각하는 노조 전체에 대한 이미지는 뭘까? 아마도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①에 가깝지 않을까? 
그러면 산별노조는? 참으로 많은 갈래의 답이 나올 수밖에 없다. ‘산별노조란 이런 것’이라고 아무리 교육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노동조합은 이렇게 가야 한다고 이론적 토론을 통해 해결되지도 않는다.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최소한 산별노조를 만들자고 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 98년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을 경험하면서 ‘이제는 기업별로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이제 때가 왔다. 정말로 보여 줘야 할 시점에 때마침 경제위기로 인한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

“산별노조, 당신의 힘을 보여 주세요!”
그러나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산별노조의 상황을 감안하면 힘과 능력을 보여 주기보다 오히려 그것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날까 두려울 지경이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기업별 노조를 해산하고 산별노조라는 새집으로 들어와 포장은 얼추 했다. 그런데 비가 쏟아진다.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이라는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호박에 그은 줄이 빗줄기에 씻겨 결국 호박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려는 순간이 아닌가!<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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