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아(寵兒)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에게 특별한 사랑을 받는 사람”라는 뜻인데, 이 뜻대로라면 나는 확실히 ‘총아’였던 것 같다. 자랑이라기보다는 정말 고맙고 두려워서 하는 말이다. 40년 동안 노동운동을 하면서 많은 분들의 아낌과 키움을 받았다. 마치 꽃나무에 물을 주고 가꾸듯 그분들께서는 나를 보살펴 주셨다.
조선공사에서 해직된 뒤 한동안 실의에 빠진 나를, 친구 권오덕과 영도철공분회의 선배들이 다시 일어나게 해 줬다. ‘하방’이라는 말은 알지도 못했다. 그저 일할 수 있는 현장이 있다면, 노동조합을 함께할 동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는 마음이었다.
만일 그때 내가 본조 간부로 올라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나를 불러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총아에는 “시운을 타고 입신하여 출세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는 당시 노동운동을 주름잡던 노동조합 ‘오너들’의 총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던가.


우리가 잡힌 날은 하필이면 국군의 날이었다. 노동자를 ‘산업역군’이라고 비행기 태우던 시절이었으니, 어쩌면 파업한 우리를 ‘탈영병’쯤으로 여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를 포함한 조공지부 간부 11명은 폭행·기물파손·업무방해·폭언 등의 혐의로 구속돼 부산 대신동에 있던 부산교도소로 보내졌다.
 
 ‘조공 노동자 몇백 명이 들어온다더라’
 
솔직히 말해서, 노동조합을 시작할 때 내가 구속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쿠데타도 벌써 몇 년 전 일이었고, 노조활동을 하다 구속되는 사람을 보기도 힘들었다.
 
다만, 1968년부터 투쟁이 일상적인 일이 되면서 현장을 수시로 들락거리는 경찰이나 정보부 사람들을 보며 나도 잡혀갈 것 같다는 예감은 들었다. 그래도 연행 정도의 수준이었지 감옥살이까지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마음은 의외로 편했다. 진 싸움이니 열불이 안 날 수 없었고, 회사 손아귀에 놓일 현장의 동지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그만큼 나는 지난 2년 동안 쫓고 쫓기면서 달려왔던 것일까.
 
교도소에 들어온 첫날, 정말로 죄를 지은 사람은 발 뻗고 푹 잔다는 말이 있다. 죄 지으랴 도망 다니랴 가슴 졸이다 막상 구속이 되면 긴장이 풀려 곯아떨어진다는 것이다. 싱거운 소리지만, 이 말대로라면 나는 ‘유죄’였나 보다. 감방에 들어가자 비로소 쉴 수 있었으니.
 
내가 신세를 지게 된 방은 이른바 ‘범털방’이었다. ‘감방장’은 와세다대학 출신으로 사업을 했고 괴정동 동장을 지냈다고 했다. 물론 자기 이야기다. 죄목은 사기라고 했다. 다른 네 명도 비슷비슷한 ‘경제사범’인 것 같았다.
 
인사를 끝냈더니 나더러 ‘신고식’을 하란다. 신고식이라 해 봐야 감옥 들어오게 된 사연을 늘어놓는 것인데, 나는 있는 그대로 파업 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단한 무용담”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은 며칠 전부터 교도소 안에 ‘조공 노동자들 몇백 명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한다. 우리 싸움이 교도소 안에까지 알려진 것이다. 으쓱하기도 하고 원통하기도 한 심정이었다.
 
 “들어보께네 박 부장은 집행유예로 나가긋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내 사연을 다 들은 ‘감방장’이 “들어보께네 박 부장은 집행유예로 나가긋다”라며 마치 해몽을 하듯 재판 결과를 점쳤다는 사실이다. 과연, 온갖 법망을 넘나들며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의 예언답게 나는 1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는데, 그건 나중의 일이다.  
 
아무튼 ‘신참’인 나는 ‘감방장’이 잘 봐준 덕에 첫날부터 ‘박 부장’으로 불리면서 ‘강아지’까지 얻어 피웠다. 그때만 해도 교도행정에 사각지대가 남아 있어 돈 있으면 못 구하는 게 없었다.
 
하지만 신고식 때 봉변을 당한 동지들도 있었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구속되지 않은 조공지부 간부가 교도소에 근무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부탁해 부장급까지는 ‘범털방’에 들어가게 됐는데, 차장급들은 그만 ‘잡범’들만 있는 ‘개털방’에 배정 된 것이다.
 
교도관들도 우리에게 잘해 줬다. 면회는 거의 매일 있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지부 간부들과 열성 조합원들, 금속노조 본조 간부들에다 공화당의 예춘호 사무총장 같은 영도의 유지들까지 와서 안부를 묻고 영치금을 넣어 줬다. 교도관들의 눈에는 우리가 ‘범털’로 비쳐졌던 것일까.
 
검찰의 수사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우리에게 붙인 죄목 자체가 너무 단순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종일관 부당함을 주장했다.
 
검찰은 우리를 형법으로 엮으려 했는데, 우리는 쟁의기간  중에는 현행범 이외에 구속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노동법을 들어 우리가 구속될 이유도 없고, 또 노동법을 위반한 게 없기 때문에 무죄라고 주장했다.

설사 검찰의 주장대로 우리가 유죄라 하더라도 ‘감방장’의 ‘예언’대로 실형을 살 만한 죄목은 아니었다. 그러니 검찰의 수사가 끝나고 재판을 받으면 늦어도 석 달이면 석방이 될 텐데, 문제는 검찰도 수사를 빨리 종결하지 않고, 재판부도 공판 일정을 연기하는 등 질질 끄는 것이었다.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미뤄’ 조지고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꼬투리를 잡을 게 없었던지, ‘간첩 사건’까지 꺼냈다. 파업기간 중 영도경찰서 형사들이 우리를 찾아와 대남방송에서 ‘조선공사 허재업 동지가 열렬히 싸우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알려준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아침 집회에서 발언한 내용이 그날 바로 대남방송에서 자세히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괜한 의심을 받기 싫어 파업농성장 앞에 “반공방첩”이라는 팻말까지 붙여 놓았다. ‘이웃집 손님, 수상하면 신고하자’던 포스터가 골목마다 붙어 있던 때다.
 
검찰은 “부산 출신 대남공작원을 검거했는데 조선공사 파업 현장에서 조합원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했다.
 
검찰은 새삼 우리 지부 간부들과 관련이 있는지 집중적으로 캐물었지만, 캐봐야 나올 게 없다는 사실은 저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진짜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미뤄 조진다’는 게 맞구나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사실, ‘반공’이라는 광기가 억누르던 시대에 물불 안 가리고 싸우던 조공지부가 ‘빨갱이’로 몰리지 않고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허재업 지부장 덕분이었다.
 
허 지부장은 국방경비대 소년병으로 군에 들어가 동란 중에는 무공훈장까지 받았고 대위까지 올랐다. 회사든 정권이든 사상 문제로 노동조합에 시비를 걸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리는 감을 잡았다. 정부측은 재판을 최대한 지연시켜 1심 만료기간인 6개월을 다 채워 우리를 내보내겠다는 속셈이었다.

긴급조정 발동해 놓고 조정안도 나오지 않아…
 
사실 정부로서도 곤혹스러운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우선 우리의 파업이 적법했던지라 파업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을 수가 없었다. 1968년 연말의 파업 때라면 문제를 삼을 수도 있었다. 우리는 쟁의신고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냉각기간도 거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무슨 생각이었던지 그냥 넘어갔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으니 굳게 단결한 조공지부 앞에 회사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69년이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3선 개헌 공작을 완료한 박정희 정권이 본격적으로 대한민국에 총동원령을 내리려던 시점이었다. 법적 절차와 요건을 모두 갖춘 파업, 게다가 ‘6전6승’의 신화를 쓰고 있던 조선공사 노동자들이었다. 이대로 놔 두면 회사가 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그 여파가 한창 숫자가 불어나고 있던 노동자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긴급조정권 발동은 그래서 나온 것이었다.
 
사상 최초의 긴급조정권 발동이라고 떠들어 댔지만 중앙노동위원회의 긴급조정안은 나오지 않았다. 긴급조정이란 말뿐이었고, 실제로는 파업만 중단시킨 꼴이 됐다. 실제로 회사는 중노위에 출석해서는 어떤 중재안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막무가내로 버텼다.
 
‘태산명동 서일필’(태산을 울리고 요동하게 하더니 겨우 쥐 한 마리 잡았다는 뜻)이라고, 검경은 쟁의기간 중에 발생한 크고 작은 마찰을 핑계로 지부 간부들을 구속했고 회사는 즉각 해고로 화답했다.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시나리오를 보는 듯했다. 이제 남은 일은 노조를 길들이는 것이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은 그래서 필요했던 것이다.
 
빼앗긴 노조, 뿔뿔이 흩어진 동지들
 
이 모든 사태의 추이를 몸으로 겪으며 정부와 회사의 의도를 알게 된 우리는 조공지부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를 접었다. 복직을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노조가 회사와 싸워 줘야 하는데, 그것을 기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팽종출 지부장직무대행은 구속된 간부들의 뜻도 묻지 않고 쟁의 를 취하해 버렸다. 긴급조정안도 나오지 않은 채 조정기간이 끝났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파업을 계속해도 되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팽 직무대행은 기계부 출신으로 비상근 부지부장이었다. 우리처럼 ‘강성’은 아니었지만 집행부의 일원으로서 할 일은 했던 분이었다. 회사가 지부 간부들과 핵심 조합원들을 해고시킬 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집행부 구성원 가운데 하나였고, 우리가 구속되자 면회도 자주 왔다. 그래서 허 지부장이 믿고 직무대행으로 지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팽 직무대행은 자신의 길을 갔다. 쟁의 취하 뒤에 신속하게 지부장 선거가 이어졌다.
 
그런데 금속노조 본조는 구속된 간부들이 석방이 되면 절차를 밟을 요량이었던지 선거가 끝나고도 두 달 가량 지부장 인준을 미뤘다. 급기야 팽 지부장은 이찬혁 한국노총 위원장까지 동원해 김병용 위원장을 설득한 끝에 인준을 받았고, 이로써 조공지부의 변신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우리는 왜 복직투쟁을 벌이지 못했던가. 그리고 왜 조공지부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던가.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나약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복직투쟁을 시작하게 되면 후임 지부 집행부와 갈등이 불가피했다. 경우에 따라 갈등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이어질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또한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사는 문제가 절실했다. 요즘처럼 은행 대출이 쉬운 때도 아니었고, 설사 대출을 받으려 해도 영도 산동네 판잣집으로는 담보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용카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우리는 석방이 되면 복직투쟁을 벌이고 그것을 불씨로 삼아 조합원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회사와 다시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 볼 때 최대한 재판을 끌어 우리를 조공지부 집행부와 현장으로부터 격리시켜 놓으려 한 정부와 회사가 우리보다 한 수 위였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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