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탈출’이라는 주장을 하면 공장은 버려야 할 곳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장과 직장을 모두 버리고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노동조합이 주목해야 할 활동이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임금의 노예, 임금실리만을 추구하는 ‘공장귀신’이 아닌 ‘잠일술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이를 통해 삶의 시간적 재편, 건강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 가족과 사회관계 및 문화적 영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 가야 한다.
 
획일적 대응과 권력 경쟁

80년대의 군사독재정권은 노동현장에서 어용노조를 비판하고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한 모든 활동을 좌경용공으로 몰아갔다. 폭력적인 정권은 정보기관을 동원해 노동운동가를 색출하고 감시·탄압했다.

노동운동은 드러나지 않도록 비공개활동을 해야 했다.
철저한 비밀유지를 위한 조직구조는 공개적이고 수평적인 토론을 어렵게 했다. 따라서 선배로부터 후배로 이어지는 강력한 규율, 효과적인 중앙집권적 조직으로 대응했다.

당시만 해도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세계 사회주의운동의 경험, 특히 러시아의 레닌주의적인 전위당 활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전위당 노선은 민주적 원리를 변형한 민주집중제로 받아들여졌다. 민주집중제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있지만, 일반적인 민주적 원리에 비춰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강조함으로써 민주적인 결정과 다수의견으로 결정된 결과에 대한 집행을 중심에 두는 방식이다.

획일적 지배에 다양성을 무기로 대응하는 방식도 있다. 그러나 비밀유지와 같은 시대적 필요에 의해 권력에 맞선 다양성보다는 집중성을 중시했다. 아직도 민주집중제는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에서 중요한 원리로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는 ‘국가를 장악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전통적인 패러다임이 작용하고 있다. 권력의 해체와 권력을 견제하는 다양하고 분산된 힘을 만드는 과정보다는 대체권력을 만들기 위해 권력을 최대한 집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모든 관계는 철저히 권력적일 수밖에 없다. 흔히 지적되는 노동조합이나 노동운동 내부의 권력관계는 정파의 문제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현장조직이든 전국적인 정파조직이든 결국은 노동조합 권력이나 진보정당의 중앙권력을 누가 가질 것인가를 둘러싼 ‘권력경쟁’을 목표로 한다. 운동의 확산을 통한 다양한 주체, 다양한 운동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정파 간 갈등에 대한 지적이 높을수록 서로 간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다른 점을 존중하자는 ‘구동존이(求同存異)’를 외치고 ‘차이를 넘어선 통 큰 단결’을 외쳐야 한다.

정파 간의 갈등은 중앙집권적인 권력 집중을 지향하는 한 해소되지 않는 문제다. 작은 차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다른 조직과 비교해 내가 속한 조직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된다. 차이는 다양성을 통한 ‘새로운 창조의 힘’이 아니라 ‘같지 않음’이었고 ‘불편함’이었다. 내가 왜 권력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보다 강조해야 하는 ‘경쟁을 위한 수단’이 돼 버렸다.

80년대에는 정권과 자본의 획일적 지배와 탄압에 맞선 중앙집중적 대응이 효율적으로 보였다. 노동자 내부에 분열과 갈등을 막고 일사불란하게 행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치명적인 결함을 드러내고 있다. 초기와는 달리 노조나 노동운동 내부의 권력경쟁이 커지면서 내부의 분할은 불가피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차이를 통합하는 새로운 원리가 정착되지 않는다면 경쟁은 격화되고 ‘풍부한 하나’가 아니라 분열과 갈등으로 간다.

중앙집권적 사고방식에서 내부의 차이는 ‘풍부한 다양성’이 아니라 ‘불편한 다름’을 의미한다. ‘다름’은 ‘다양성’을 통한 힘의 확대가 아닌 ‘공격’과 ‘비판’을 통해 제거되거나 약화돼야 할 대상일 뿐이다.

획일적 대응체계는 약간의 균열이 발생하면 취약성을 드러내면서 무너진다. 대공장 현장조직들의 상당수가 노사관계에서 은밀한 거래를 통해 사측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다.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를 보면 현장조직의 활동가들은 스스로 회사에 대해 자주적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조합원보다 높다. 반면에 조합원들은 현장조직이 회사로부터 독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비율이 훨씬 높다.(2005.12 [지엠대우 노사관계 및 노조활동연구])

민주노조를 자처하는 대공장 노동조합에서 일상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대의원들은 대부분 현장조직 출신이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사측의 지원을 받아 당선됐다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민주노조가 점차 과거의 민주성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자본에 맞서 힘을 효율적으로 집중시키려는 획일적인 체계는 한편으로는 80년대 노동운동이 주목한 레닌주의적인 전위당 이론과 중앙집권주의에 의해 강화됐다. 북한 사회주의의 정치원리도 이와 다르지 않다. 때문에 80년대에 북한식 운동논리를 배운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인식했다.

운동의 이론보다도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앞서 지적한 공장자체의 남성성, 수직성, 권력성이다. 군사독재체제에서 군사적인 전투적 대응체계는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장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인간관계, 공장문화의 영향은 군사독재가 끝났음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운동의 낡은 이론도 획일적이다. 운동의 공간인 공장 또한 획일적인 토양을 제공해 왔으며 이 양자가 결합함으로써 운동은 낡은 사고와 행동, 낡은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구동존이(求同存異)’나 ‘차이를 넘어선 통 큰 단결’과 같은 구호나 주장은 새로운 메시지가 될 수 없다. 
 
공장 안에서도 필요한 새로운 메시지

작업장에서 ‘노동의 유연화’ 문제는 오래된 쟁점이다. ‘유연성’이라는 얘기는 ‘경직성’과 반대되는 것이다. 단어만 보더라도 유연성이 훨씬 더 좋은 이미지로 다가온다. 경제에서도 시장의 변동에 대응하지 못하는 경직성과 시장변동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유연성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는 뻔한 것이다. 스포츠에서도 경직성보다는 유연성이 훨씬 더 좋은 것이다. 만약 노조가 유연성을 경직성으로 맞선다면 이길 수 있을까?

2009년 들어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노사가 ‘생산물량의 이동’에 합의했다. 이미 하나의 생산라인에서 하나의 차종을 만들어 내는 시대는 갔다. 하나의 생산라인에서 여러 개의 차종을 만드는 혼류생산이 일반적인 것이 되고 있기 때문에 생산물량의 이동을 넘어 노동자의 공장 간 이동인 전환배치도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기존의 노동조합이 가진 전략으로는 결코 이러한 변화를 막지 못한다. 같은 공장에서 이쪽 라인의 노동자는 일거리가 없어 휴업까지 하고 임금도 줄어든 반면 저쪽 라인에서는 잔업·특근까지 하는 현실은 노동자 내부의 통일과 연대를 어렵게 한다. 

‘유연성(flexibility)’은 ‘불안정성(insecurity)’과 다르다. 유연성이라는 것은 불안정한 상황에서 결코 나올 수 없다. 체력이 약한 운동선수에게서 유연성이 나올 수 없다. 체력이 떨어지면 비틀거릴 뿐이다.

대공장에서 ‘고용불안감’ 때문에 ‘있을 때 벌자’는 심리로 잔업·특근을 해서 임금을 늘리는 방식은 ‘안정성’을 한 치도 높이지 못했다. 거꾸로 불안정성만 높였다. 결국 경제위기가 오니까 정시근무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 잔업·특근이 사라져 임금은 줄어든 노동시간보다 훨씬 더 많이 줄었다. 잔업·특근까지 한다는 것은 일종의 개인에 의한 ‘일자리 독점’이었다. 경제위기로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일자리 나누기’를 상상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일자리 독점’이라는 관행 속에서 ‘나누기’란 결코 자연스러운 발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유연안정성(flexicurity)’을 전략적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 고용을 위해서는 ‘자르지 않는’ 안정성을 높이면서 ‘나누는’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임금과 관련해서도  ‘고정임금’이라는 안정성 위에서 ‘잔업·특근 수당’이나 ‘성과금’을 포함한 총액임금의 유연성을 가지는 것이다.

공장 안에서의 새로운 발상과 새로운 메시지는 곧 사회 전체의 대안을 만들어 가는 기초다. ‘총고용 보장’을 위한 ‘사회적 일자리 나누기’와 경제위기로 인한 임금하락을 보완하는 사회적 임금(사회복지)이 안정성을 높여 주기 때문이다.
 
주둥이 좌파와 베블렌 효과

“그러니까 주둥이 좌파라고 하는 겁니다.”
2009년 1월 노동조합이 경제위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토론하는 자리에 초청받은 오랜 경험을 가진 진보적 단체의 꽤 유명한 분이 했던 말이다.

입으로는 굉장히 급진적인 주장을 하지만 실제 행동은 너무나 보수적인 행동을 하는 운동권들을 비꼬는 얘기였다. ‘함께 살자’고 하면서 바로 곁에서 비정규직이 해고되는 상황을 모른 척한다는 비판이다.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다. 누구도 정규직 대공장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의 해고에 맞서 파업을 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면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정규직의 임금인상분 일부를 비정규직의 고용안정기금으로 낼 테니 자르지 말라는 선언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여지없이 반론이 쏟아졌다.
 
“비정규직 해고는 자본이 하는 것인데 자본이 책임져야지 왜, 정규직이 책임지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정규직 책임론에 빠지는 길이고 고통분담론에 빠지는 반노동자적인 생각입니다.”

반론의 요지는 너무나 많이 들어온 것이다. ‘절대 노동자가 양보할 수 없다’는 주장은 대공장 노동자와 회사의 단순한 관계만 생각하면 조합원의 이익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전혀 달라진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노동자로서 자본에 맞서는 전쟁을 한다고 치자. 노동자 군대의 한쪽은 군량미가 넉넉하고 다른 한쪽은 굶어 죽는 상황이다. 정규직의 경우 아직은 고용불안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비정규직은 잘려 나가는 상황인 것이다. 전쟁을 하려는데 적의 심리전 부대가 이쪽을 향해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야! 니들 2군은 굶고 있는데 1군은 잘 먹고 잘산다며?”
이 소문을 들은 군사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무슨 소리야! 그것은 적들의 농간에 불과해”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모두 똘똘 뭉쳐 자본진영을 향해 돌격할까?


우리가 확인한 현실은 반대다. ‘일부만의 일어서기’와 ‘1등보다 미운 10등의 법칙’이 작용한다. 때문에 전투를 하기 전에 내부에 분란이 일어난다. 전쟁은 노동진영과 자본진영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진영 안에서도 정규직 부대를 비판한다. 결국 자본과 비정규직이 함께 정규직을 공격하는 상황으로 돌변한다.


이주노동자들과 일자리 나누기를 한 대구 삼우정밀의 사례를 보자. 통상임금의 80%만 받고 석 달간 2주 휴업을 통해 이주노동자의 일자리를 지킨 것은 임금을 양보한 것이고 고통분담론을 인정한 반노동자적인 행위였을까?  

비정규직을 외면하면서 자신들의 임금삭감은 아니더라도 임금인상분의 일부를 비정규직의 고용기금으로 내자는 것에도 반대하는 대공장 노동자들이 훨씬 계급적 원칙을 지키는 투사들일까? 

삼우정밀 노동자들은 2007년부터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받아들여 하나로 뭉쳤다. 아직까지 비정규직과 하나의 조직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대공장 노동조합과 비교할 때 어디가 모범적인 노조일까?

말이 좋아 ‘비타협적 투쟁’이고 ‘양보교섭 결사반대’지 결국 노동운동이 정규직의 ‘기득권 지키기’를 통해 정규직 이기심만 부추겨 온 것은 아닌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노동자계급이 단결해 자본주의에 저항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생각이라고 하면 순순히 인정하기 어렵지만 일단 따지지 말고 그렇다 치자.

베블렌이라는 학자는 정반대의 주장을 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노동자들 또한 더 많은 부를 가진 자본가들의 사치와 낭비를 따라  하려는 욕망 때문에 저항과 혁명으로 가지 않는다고 했다.

부자들의 비싸고 좋은 소비를 따라가지만 행복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기장에서 일어서기’와 비슷하다.

한국의 노동운동에서도 일부 이론가들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빌려 스스로 정통임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정규직의 임금집착과 이기심만을 부추겨 ‘베블렌 효과’를 확대해 왔다.

그래서 ‘주둥이 좌파’라는 극단적 비아냥이 나온다. ‘전투적 실리주의’라고 하는 얘기도 자신들의 실리를 위해서만 전투적일 뿐인 노조를 비판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정통 계승자인 것처럼 주장하지만 실제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굳어 버린 교조주의야말로 노동운동의 새로운 메시지를 창조하는 걸림돌이라고 하면 과도한 것인가!

만약 삼우정밀과 같은 행동을 대공장 노동조합이 했다면 ‘계급의 배신자’라는 운동권 일부의 비난은 있을지 몰라도 다수의 노동자들로부터 칭찬받았을 것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배부른 귀조노조’라는 비난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이다.

또 다른 비판도 있다.
“만약에 정규직이 임금인상분의 일부를 고용기금으로 내놓는 방식을 선택하면, 비정규직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서 투쟁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2008년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던 포항 진방스틸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지 못하는 해고자나 정상적인 월급을 받지 못하는 해고되지 않은 조합원, 정상적 임금을 받는 노동자 모두가 임금을 나눠 일정액 이상의 생계비를 받아 갈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버틸 수 있으니 투쟁하지 말고 계속 나누면서 버티자고 생각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똘똘 뭉쳤다.  

경제위기 시대는 ‘줄이기’ ‘나누기’ ‘채우기’를 요구한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위해 나누자는 것은 문제의 근본해결책이 아니다. 정규직이 노력해 임금인상분의 일부를 내놓는 식으로 해결될 것은 없다. 그것은 단지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분열시킨 적군의 심리전을 넘어서는 출발일 뿐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하나가 돼 ‘함께 살기’를 위한 노동자군대를 만드는 첫 진군신호다. ‘나눔’은 공장 밖에서 채우기 위한 첫걸음이요,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메시지다.  <계속 이어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