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9월14일, 박정희 정권은 국회에서 삼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분단 상황과 경제 개발’을 장기집권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불과 나흘 뒤인 9월18일, 금속노조 조선공사지부의 파업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긴급조정권이 발동됐다. 이것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생산직과 사무직을 모두 포함해 10인 이상 사업체에 고용된 임금노동자의 숫자가 100만명을 갓 넘겼을 때의 일이었다. 회사가 번창하면 노동자는 늘어나게 돼 있다. 따라서 그들이 더 늘어나기 전에 ‘순한 양’으로 길들여야 했다.
한편에서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출범을 경축하는 ‘공포정치’가 막을 올렸고, 다른 한편에서는 조선공사 노동자들의 투쟁이 조합간부와 핵심조합원의 해고 및 구속으로 막을 내렸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후퇴’해야 했을까.
분명한 것은 이기기에는 우리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역량을 보존하는 대신 ‘산화’하는 길을 택했다. 그것이 당시 ‘가장 잘나가던 직장’에 다니던 조선공사 노동자들이 앞으로 노동자가 될 후배에게 줄 수 있는 전부가 아니었겠는가.

 
 
 
“봐라. 인상아 이기 뭔 소리고?”
“함 보입시더. 긴!급!조!정!권?”
 
보사부장관 명의의 긴급조정권이었다. ‘노조는 쟁의행위를 중지하고 중앙노동위원회의 조정에 임하라’는 내용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발동된 긴급조정권이니 아무리 노동법을 달달 외우는 젊은 나인들 알 수가 없었다.
 
 “다 자폭해 삐리자!”
 
엎친데 겹친 격이었다. 전날인 1969년 9월17일 회사는 지부 간부 16명을 해고한다는 공고를 붙였다. ‘올 것이 왔구나’ 하면서 담담하게 받아들였지만 우리가 밀리고 있는 건 분명했기 때문에 내심 답답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파업을 중지하라는 긴급조정권까지…. 

뒷날 들은 얘기지만 남궁련 사장은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노조 때문에 경영이 어렵다, 관에서 나서 줘야 된다, 지금처럼 노조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하면 회사가 힘들다’고 말했다고 한다.

긴급조정권이 발동된 9월18일, 조공지부에는 비상이 걸렸다. 허재업 지부장과 박정부 상임부지부장은 급히 183인의 투쟁대책위원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대책위원들도 어안이 벙벙할 뿐 대책이 있을 리 없다.

우리는 밀리고 있었지만 파업을 접을 생각은 없었다. 회사의 태도가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밀리면 한동안 후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힘들지만 버텨 나가고 있던 터였다. 183인의 투쟁대책위원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와, 돌겠네. 이것덜이 뭐라고 적어 놓은 기고? 보사부장관이 노동쟁의조정법 제40조에 의거하여 긴급조정권이 발동됐다. 즉각 조업에 복귀하고 중앙노동위원회 조정에 참석해라. 이기 뭔 소리고?”
“보사부가 먼데 파업을 하라, 머라 카노? 합법적으로 파업하능 거 아이가?”
 
“대책을 세아야지, 이라고 있어가꼬 될끼 아이다.”
“대책이 있나? 긴급조정권이 발똥됐다는데 고만해야지. 우짤끼고?”
“미친나? 파업해도 끄떡도 안 하는데 파업 종치고 협상 들어가서 우리가 얻을 끼 뭐 있노?”
   
“그라몬 우짤낀데?”
“XX, 다 자폭해 삐리자!”
“구속되는 것만 남았다고 봐야 안 되것십니꺼?”
 
밤을 새워 토론한 결과,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기로 했다. 긴급조정권을 거부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조합원들이 조업에 복귀하지 않으면 무단결근이고, 불법파업이 되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접한 조합원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울부짖었다. 사기충천해서 시작했던 파업이었다. 회사의 교섭 기피, 온갖 탄압에도 지켜왔던 파업이었다. 정부에서 보내 온 공문 한 장에 의해 이렇게 허망하게 끝을 내야 하다니…. 파업을 끝내는 순간 현장의 시곗바늘은 거꾸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

다음날 아침 회사는 직장폐쇄를 철회했고, 조합원들은 일터로 복귀했다. 회사의 한 간부가 출근하는 임시공들에게 “일하러 오지 마라”고 해서 회사 관리자들과 조합원들 사이에 작은 몸싸움이 있었다. 소동으로 그치고 말았지만, 임시공들의 험난한 앞날은 충분히 예상됐다. 

중앙노동위원회에는 박정부 수석부지부장과 내가 가기로 했고, 권오덕은 서울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9월23일, 서울로 향했다. 기차에 올라 나란히 앉았지만 박정부 수석부지부장과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박정부 수석부지부장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서울에 가 봤자 헛걸음할 것 같다. 인자 끝난 거라꼬 봐야 된다.”
“구속되는 것만 남았다고 봐야 안 되것십니꺼?”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다음날 24일 중앙노동위원회가 주재한 긴급조정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우위를 점한 회사는 큰소리를 쳤다. 회사는 아무런 안을 내놓지 않았다. 조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중재에 회부됐다. 조정에 실패하면 중앙노동위는 긴급조정이 발동된 날로부터 30일 내에 중재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 날 종로통에 있던 중앙노동위원회에 정부 관계자들이 다 출동을 한 것처럼 양복쟁이들이 어슬렁거렸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우리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경찰청 치안본부의 누구라고 하면서 조합원들이 경찰서에 연행됐다는 소식을 전해 줬다.
 
“형무소 가더라도 노조는 재건시켜 놓고 가자”
 
우리가 서울에 올라가 있던 사이 현장에서 조합원끼리 싸움판이 벌어진 것이다. 파업 기간 동안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조합원들은 그 울분을 달랠 길이 없었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9월 이후 소극적으로 행동했던 조합원들에게 “이 새끼들, 사꾸라 아냐?” “우리 싸울 때 뭐했노?” 이런 불만을 털어놓게 됐고, 결국은 현장 곳곳에서 크고 작은 싸움이 일어났다.
 
조합원 80여명이 영도경찰서에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긴급조정이 실패로 돌아간 마당에 서울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밤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새벽녘에 도착해 영도경찰서를 갔더니 조합원 3명이 연행돼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지부 간부들은 다 형무소 가야 된다. 노조는 재건시켜 놓고 가자.”
추석 연휴가 끝난 뒤 지부 간부, 핵심 조합원들 20여명이 국제시장 안에 자리한 한 여관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추석 연휴가 지나자 조공지부 간부들을 잡기 위해 경찰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복잡한 국제시장을 택했다.

여관으로 모이기 전 나와 권오덕, 그리고 지부 간부 박상옥이 허재업 지부장을 만났다.
허 지부장은 “지인이 검찰의 고위간부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며 “서울로 가서 조공 문제를 담판 지어 보겠다”고 말했다. 우려가 적지 않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울로 가시라”고 답했다.

우리는 허 지부장을 할아버지로 변장시켰다. 파업으로 턱수염이 많이 자랐는데, 안경을 쓰게 하고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히니 영락없는 시골 영감님이 됐다.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면 잡힐 것 같아 구포역까지 가서 기차를 태웠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영도경찰서 형사들이 조공 지부 간부들을 검거하기 위해 부산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 허 지부장은 부산역 다음 역인 구포역에서 같은 기차에 탔는데 영도경찰서 형사들은 변장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우리는 여관방에 앉아서 ‘직무대행체제로 가느냐? 새로운 집행부를 꾸려야 하느냐?’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곧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형사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는데, 여관방으로 들어온 형사들은 우리 얼굴이나 행색을 보는 게 아니라 방석을 들춰 보고 옷장을 뒤졌다. 도박을 단속하러 나온 중부경찰서 형사들이었다.
 
무너진 신화
 
십년감수한 우리는 형사들이 나간 뒤 여관에서 나와 줄행랑을 쳤다. 조만간 다시 모이기로 하고는 헤어졌다. 권오덕과 쟁의차장 김정중, 나. 세 명은 마땅히 피신할 만한 곳이 없어 서면 쪽으로 나와 한 여관에 묵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피신을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세 사람의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도 하루 이틀 버틸 돈밖에 되지 않았다.
본조에 있으면서 다른 노조의 간부들을 알게 된 권오덕이 다음날 아침 부산 지역에 있는 노조 두 곳에 전화를 걸었다.

두 노조의 사무국장들이 다 선선히 돈을 갖다 주겠다고 해서 한시름 놓고 기다렸다.
웬걸,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도청이 됐는지, 형사들이 부산지역 노조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다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한 간부를 미행한 것 같았다. 어쨌든 꼼짝없이 끌려나와 영도경찰서로 갔다. 박정부 수석부지장도 이미 들어와 있었고, 지부 간부들 대부분이 잡혀 와 있었다.

유치장에 있는데 다음날인가 갑자기 영도경찰서가 떠들썩했다. 서울에 갔던 허 지부장이 들어온 것이다. “경찰들이 하도 부산을 떨길래 거물이 들어오는 줄 알았습니더” 하면서 지부 간부들이 농담을 던지니, 허 지부장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검찰 고위 간부를 만나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했던 허 지부장은 금속노조 김병용 위원장의 도움을 받아 피신을 하고 있었는데, 김 위원장 뒤를 밟던 형사들에게 잡혔다.

조선공사 노동조합의 1969년 파업투쟁으로 구속이 돼 법정에 섰던 사람은 조합원의 가족 2명을 포함해 27명이다. 이틀 뒤 우리는 검찰로 송치됐고 법정에 설 날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10월11일, 노두홍 부지부장이 쟁의를 취하해 버린 것이다. 투쟁을 이어 갈 사람을 물색하기도 전에 덜컥 구속이 돼 버렸으니, 회사측의 공작에 의해 당연히 나올 수 있는 결과였다.

이틀 뒤 금속노조는 “쟁의를 취하한 것은 무효”라고 통고했다. 그런데 허 지부장이 직무대리로 지명한 팽종출씨가 같은달 25일 다시 쟁의를 취하했고, 우리와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로써 우리의 파업 투쟁은 끝이 났다. 파업 기간이 길어지면서 해고나 구속은 각오했지만, 조공지부가 통째로 날아갈 줄이야. 본공과 임시공을 하나로 묶어 여섯 번 싸워 여섯 번 모두 이겼던 조공지부의 신화는 이렇게 무너졌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 집행부가 민영화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회사의 전략을 파악하고 그것을 조합원들과 공유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 냈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 못했다.

우리는 갇혀 있으면서 조합원들 생각을 많이 했다. ‘기’가 펄펄 살아 웬만한 일에는 주눅 들지 않았던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감옥에서 나온 뒤 알게 된 사실이지만, 파업이 끝나고 강성 조합원들 가운데 스스로 현장을 떠난 이들이 꽤 됐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기나긴 침묵의 시간 속으로 빠져 들었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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