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탈출’이라는 주장을 하면 공장은 버려야 할 곳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장과 직장을 모두 버리고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노동조합이 주목해야 할 활동이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임금의 노예, 임금실리만을 추구하는 ‘공장귀신’이 아닌 ‘잠일술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이를 통해 삶의 시간적 재편, 건강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 가족과 사회관계 및 문화적 영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 가야 한다.
 
공장의 남성성, 수직성, 권력성
 
학교·공장·병원·감옥을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공장의 감시체계는 수백 년 전부터 감옥의 감시체계에 비유됐다.

1791년 영국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말한 ‘판옵티콘’은 학교·공장·병원·감옥 등에서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감시하는 체계를 말한다. 판옵티콘은 창문과 빛의 원리를 이용해 건물의 독방 안에 감금된 사람의 윤곽이 정확하게 빛 속에 떠오르는 모습을 중앙탑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감시체계다.

생산현장에서도 이러한 감시체계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출근할 때 자동인식 카드를 사용하면 출근시간이 기록된다. 감시카메라로 생산현장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카메라 설치를 둘러싸고 크고 작은 마찰이 있었다. 감시카메라는 너무나 분명하게 ‘감시당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특히 생산품에 바코드를 부착하고 생산품이 이동하는 것을 자동 인식하는 중앙컴퓨터로 연결 시스템을 갖추면 누가 언제 그것을 생산했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을 설치하려는 회사에 맞서 투쟁을 벌인 사례가 꽤 있다.

단순히 감시체계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학교·군대·공장·감옥은 너무나 많은 유사성을 가진다. 같은 시간에 시작되는 하루는 정확히 시간표대로 돌아간다. 규율을 어기면 그에 따라 처벌받는 것은 학교나 공장이나 같다. 같은 공간에서 집단적인 흐름을 따라 움직인다. 같은 식판을 들고 같은 메뉴의 식사를 한다.

관계 또한 수직적이다. 학교의 고학년·저학년의 위계질서, 군대의 계급질서, 공장의 관리체계에 따른 직급으로 구성된 수직적 질서 속에서 살아야 한다. 수직적 관계는 권력 관계다. 권력 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경쟁을 해야 한다.

남성들의 삶은 대부분 ‘학교→군대→공장’이라는 유사한 과정을 거친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국사회의 중년 이상 세대들은 어릴 때부터 등교하면서 국기에 대한 맹세와 조회를 거친 뒤 수업을 받았다. 군대에서도 아침 점호부터 시작한다. 공장에서도 아침 조회부터 일과를 시작한다.

자동차산업과 조선산업을 비롯해 민주노조운동의 핵심을 차지해 온 제조업 대공장 노동조합은 바로 이런 전형적인 구조 위에 서 있다. 대부분 남성으로 꽉 채워져 있다. 노조체계도 ‘위원장→대의원→조합원’으로 이어지는 명확한 조직질서로 구성돼 있다. 투쟁을 할 때는 군사적 전투체계로 재편된다.

공장은 밖의 세계와도 정확히 역할을 구분한다. 가장으로서 생계책임을 지는 남성이 권력 중심에 있고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여성은 주변부에 있다. 최근 사회적 변화가 빠르게 진행된다고는 하지만 아직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성평등’이란 것은 너무나 낯설다.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갖는 것을 그들 개인의 잘못이라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몇 차례의 성평등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갑자기 생각이 바뀔 리 없기 때문이다.

군대의 상급자 명령, 공장의 업무지침, 노조의 투쟁지침은 위계적인 명령이다. 위로부터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사람들은 수평적 소통보다는 조직의 지침이 익숙하다. 세상의 변화가 어떻든 간에 공장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밖의 세상변화는 가장 늦게 찾아온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권력소유자에서 피해자로 바뀐다. ‘현금인출기’ 역할만 하게 되고 아내와 자식으로부터는 “가장 대화가 안 되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현금인출기는 고장이 나거나 수명이 다하면 용도 폐기된다. 퇴직으로 더 이상 봉급(임금)을 가져다줄 수 없고 그렇다고 일에 붙잡혀 소통을 배우지도 못한 인생의 끝자락에 찾아오는 ‘황혼이혼’은 ‘고장 난 현금인출기의 폐기처분’에 다름 아니다.  
 
촛불과 깃발의 거리감
 
2002년 미군의 장갑차에 두 여중생이 깔려 죽은 사건으로 인해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이때부터 인터넷을 통한 소통이 오프라인의 시위로 이어졌다. 기존의 집회나 시위방식과는 다른 ‘촛불집회’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6년 후,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문제로 불붙은 촛불시위는 유례 없이 장기적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시위로 번졌다.
촛불의 출발이 된 온라인 공간에 대해 ‘쌍방향 소통’이라는 칭송과 자본에 의해 장악된 또 다른 상업적이고 일방적 지배공간이라는 지적이 엇갈린다.

또한 자발적인 소통을 통한 수평적인 거리의 만남이라는 긍정적인 주장도 있고, 이른바 ‘노빠’들에 의한 숨은 조직적 움직임과 ‘PD수첩’과 같은 언론의 부추김이 만들어 낸 보이지 않는 조직된 동원이라는 비판도 있다.   
 

촛불시위를 찬양하거나 한계를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다. 80년대 운동과 공장에 뿌리를 둔 노조의 문화들이 촛불과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려는 것이다.

2008년 6월10일 전국금속노조의 조합원들은 현대·기아차그룹과 경총건물 앞에서 집회를 마치고 난 다음에 조끼를 벗고 ‘MB OUT!’과 같은 글씨가 새겨진 여러 가지 색깔의 셔츠로 갈아입고 촛불집회에 합류했다. 노조 깃발을 대신해 촛불집회 분위기에 맞도록 깃발도 바꿨다. 새벽을 향해 가는 시간, 몇몇 참가자들이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던 중 논쟁이 시작됐다.
 
“아니 나는 왜 조끼도 다 벗고 이런 셔츠로 갈아입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 우리가 조끼를 입고 노조 깃발을 들어야 노동조합이 참가한 것을 알 수 있는 것 아냐? 우리가 시민 흉내를 내야 하나?”
 
울산에서 올라온 현장 조합원의 의문이 제기되자 그동안 촛불에 참가해 온 다른 조합원들은 왜 노조의 깃발을 바꾸고 조끼를 벗었는지 과정을 설명했다.

논쟁은 온라인과 시위현장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오마이뉴스에는 ‘깃발들, 촛불 앞에서 착해지세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랐다. 글쓴이가 주장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투쟁의 핵심은 촛불이다. 즉 ‘드러내 훤히 밝힘’이다. ‘시위’는 말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다.
이전에는 어떠했나. 사회 곳곳에서 삶의 위기에 직면한 이들의 크고 작은 싸움이 계속 일어나고 있다. 폭력진압은 늘 있어 왔다. 하지만 전경차에 의해 겹겹이 둘러싸여 가려졌고, 언론도 외면해 국민 대다수가 알지 못했다. 노동자 단체도 붉은 머리띠와 투쟁조끼, 검은 깃발의 구태의연한 시위용 드레스코드를 탈피하지 못했다. 고공투쟁·삭발·단식농성 등 투쟁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안타깝게도 대중과는 멀어졌다.
이번 촛불집회는 상호간에 막혔던 언로를 뚫어줬고 가려졌던 존재를 훤히 밝혀줬다. 저마다 촛불을 손에 쥔 시민은 가장 먼저 자신의 삶을 성찰했다. 옆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생명보다 돈의 논리가 우세한 세상살이의 피폐함을 인식했다. 촛불은 한 개인의 삶을 외부를 향해 열어 밝혀 줬다. 생각하는 법, 말하는 법, 행동하는 법을 깨우친 시민들이 늘어갔다.
촛불은 이러한 ‘자각’의 물꼬를 터 줬다는 점에서 가장 정치적이고 숭고하다. 이 도도한 촛불의 흐름을 저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깃발이라도 내려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깃발이 정치적이기 때문에 내리라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정치적이기 위해 ‘가치와 지향’을 담은 매력적인 깃발을 상상하자고 얘기했다. 깃발이 불편한 게 아니라, 존재를 가리고 스스로 은폐하는 게 못마땅한 거다. 깃발로 표방되는 진보세력이 유연한 신체로 거듭나기를, 시대에 뒤처진 말들과 의복을 벗고 가면놀이를 즐기길 바랐다. 존재를 가리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
 
처음부터 깃발은 존재를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노조의 깃발은 누군가의 존재를 가리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깃발은 개인들이 켜 든 촛불과 달리 노조라는 집단을 표시한다. 공장이라는 공간에서 조직된 집단을 깃발을 통해 표현한다. 깃발이 집단을 표시하기 때문에 노조에 속한 조합원 개인을 가리고 있기보다는 집단화된 개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노조가 깃발과 조끼로 자신을 표현하는 순간, 그것은 한편에서 집단을 드러내는 것이자 동시에 다른 집단과 구분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공장을 둘러싼 담을 넘어 거리에 섰지만 깃발과 조끼가 조합원이 아닌 시민들과 담을 쌓고 있다고 한다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조끼를 벗고 깃발을 바꿔 거리에 나섰기 때문에  모든 벽이 무너졌다고 할 수는 없다. 비록 촛불시민들과 같은 티셔츠를 입었다고 해도 노동조합은 여전히 거리에서 만난 공장 밖의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끼를 입고, 노조 깃발을 들고 촛불에 합류하는 것은 결코 노동자의 계급성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조끼와 깃발은 노조를 상징한다. 노조는 다수 노동자와 시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집단이 아니다. 노조가 자기들만을 위한 ‘이기적 집단’으로 낙인찍혀 있는 한 다시 촛불이 타오른다고 해도 시민들은 “깃발을 내려라”고 외칠 것이다. 

노조는 공장의 담이 아닌 조끼와 깃발로도 담을 쌓고 있다. 노조는 공장의 담을 넘어 소통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자신의 성 안에 똬리를 틀고 앉아 공장 내부와 외부의 소통을 막는 벽일 뿐이다.

촛불은 유모차의 아이, 초등학생에서 대학생까지, 아줌마·아저씨·노인을 불문하고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참여한 사람들이 어울린 흐름이었다.

공장이라는 높은 성, 여기에 결합된 낡고 경직된 사고방식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공장은 고립된 ‘그들만의 성’이고 노조는 ‘조직된 그들만을 위한 이익집단’일 뿐이다. 

촛불만이 세상을 바꾸는 희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약이다. 그렇다고 노동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유일하거나 혹은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노조는 거리의 시민과 함께하는 것 이전에 자신의 공장을 넘어 다른 공장으로 흐르는 것조차 힘겨워한다. 같은 공장 안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류된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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