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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40년, 박인상 회고록 ⑪[제4부] 무너진 신화, 빼앗긴 노조 [제2편] 이것은 ‘복수전’인가, ‘말살전’인가
8월19일 오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회사는 직장폐쇄 조치를 취해 버렸다. 이번에는 회사도 만만치 않았다.

직장폐쇄, 막가는 회사

하지만 닫힌 정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고 돌아설 조합원들이 아니다.
파업 농성을 하기 위해 회사로 들어가려던 조합원 수백 명이 순식간에 회사 앞 대로를 점령하고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돈 없으면 물러가라!”
“실권 없는 경영주는 물러가라!”

조합원들은 구호를 외쳐 댔다. 대로 앞을 지나가야 하는 버스와 차들로 순식간에 교통이 마비됐다. 경찰기동대가 출동했다. 곧이어 놀란 가족들이 몰려왔다. 그러지 않아도 7월분 임금이 나오지 않아 애를 태웠던 가족들이었다. 속 타는 가슴에 불을 댕긴 것이다.

“밀린 7월분 임금, 2천600만원을 즉각 지불하라!”
“체불 노임에 5천여 가족의 명줄이 달려 있다!”

가족들, 주로 조합원의 부인들이다. 400여명이 길가에 있는 물건들을 이용해 바리케이드를 쳤다. 밀고 들어오려는 경찰과 이를 막으려는 조합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부인들이 앞장을 섰다. 옷핀으로 경찰들을 콕콕 찔러 댔다. 뒤에는 조합원들이 떡 버티고 서서는 물러날 틈을 보이지 않았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경찰과, 화가 난 조합원과 가족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경찰기동대는 페퍼포그를 쏠 준비를 했다.

“아이고. 고만합시다. 조합원도 아이고, 아줌마, 아덜꺼지 있는데 내 차마 페퍼포그 쏘라는 맹령은 몬 내리것십니더.”
영도 경찰서장이 먼저 운을 뗐다.

“그라몬 우리도 옆으로 살째기 비키 줄끼께네. 차는 댕기구로 해 주소. 시민덜한테 불팬을 끼치가 되것십니꺼.”
조합원들도 한발 물러섰다.

밀고 들어오려는 경찰과 이를 막으려는 조합원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부인들이 앞장을 섰다. 옷핀으로 경찰들을 콕콕 찔러 댔다. 뒤에는 조합원들이 떡 버티고 서서는 물러날 틈을 보이지 않았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경찰과, 화가 난 조합원과 가족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 매일노동뉴스


굳게 잠긴 정문 자물통을 망치로 부수다

경찰과 휴전은 했지만 회사 정문은 여전히 닫힌 채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철야농성으로 회사 안에 있던 나는 노조사무실로 뛰어올라가 부산지방노동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회사가 정문 등 출입구 폐쇄 조치를 할 때는 노동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확인한 결과 노동위원회의 승인 없이 회사가 출입구를 봉쇄한 것이었다. 망치로 굳게 잠긴 정문의 자물통을 부숴버렸다.

이 뒤로도 회사는 한 번 더 정문을 막았지만 우리가 또 부숴버리자 포기를 했는지 출입을 막지는 못했다. 대신 회사는 ‘주거 침입, 폭행, 기물 파손’ 혐의로 지부 간부들을 고소했다. 자물통을 부순 나도 당연히 포함됐다.

다음날 쟁의대책위원들 전원(183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쟁의대책위원회는 파업투쟁 기간 동안 부서와 과 단위로 조합원을 통솔하는 책임자들로 주로 직장이나 반장, 현장에서 그만한 권위가 있는 선배 노동자들로 구성됐다.

단식농성 하룻밤 만에 쟁의대책위원들 가운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한 분이 실신했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데다 파업기간 동안 무리했던 탓이었다. 직장폐쇄로 긴급하게 단식농성에 들어갔지만,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의견이 쟁의대책위원들 사이에서 나왔다.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책임지는 쟁의대책위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단식농성을 하게 되면 현장을 챙기기 어렵다.

지난해 연말 파업 때와는 달리 회사 관리자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부장들이 나서 부서원인 조합원들에게 파업 대오를 이탈하라고 회유와 협박을 해댔다.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쟁의대책위원들이다. 단식농성을 접고 쟁의대책위원 전원이 철야농성을 하기로 결정했다.

“물 한 방울도 줄 수 없다”

회사는 직장폐쇄라는 강수를 뒀지만 우리에게도 우군에 생겼다. 회사가 정문을 봉쇄하면서 갑자기 일어난 가두 연좌농성 당시 가족들이 결합한 이후 가족들은 응원군이 됐다. 특히 윤세정 조합원의 어머님이 적극적으로 나서 조합원 가족들을 결집시켰다.

가족들이 회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문 밖에서 파업 농성을 지켜 줬다. 나이 많은 조합원의 어머니, 어린아이를 업고 나온 조합원의 부인들 수십 명이 조선공사 정문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파업 투쟁을 알리고 지역사회의 온정적인 여론을 끌어낼 수 있었다.

한번은 지부와 상의 없이 조합원 가족 몇 명과 조합원들이 본관 1층에 자리한 서무과에 들어가서는 ‘빨리 해결해라’고 항의를 했다. 본관이 회사 정문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순식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조합원과 가족들은 회사의 답이라도 듣고 돌아가겠다며 서무과에 주저앉았다. 사실상 농성이 시작된 셈이다. 서무과가 아수라장이 되자 회사는 조합원과 가족들을 빨리 내쫓기 위해 본관 건물에 단수 조치를 해 버렸다.

속이 타고 목이 타던 한 조합원의 부인이 “물을 달라”고 하자 한 관리자가 “6개월 동안 농성을 해 봐라”면서 “물 한 방을 안 준다”고 폭언을 하고는 그 부인의 뺨을 때렸다. 그 자리에 있던 조합원들은 폭발했다. 관리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다 관리자 세 사람을 숙직실에 가뒀다. 이 소식을 접한 영도경찰서의 경찰이 출동을 해서는 농성을 해산시키고 조합원 1명을 연행해 가려 하자 흥분한 조합원들은 경찰을 몸으로 막았다. 다행히 영도경찰서에서 이 사건을 문제 삼지 않아 연행된 조합원은 없었다.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인데도 영도경찰서는 우리들에게 법과 원칙을 들이밀지 않았다. 특히 가족들이 있어 그랬던 것 같다.

“조합원 여러분 중에 태권도 유단자 있으면 퍼뜩 나와 보소.”
“태권도 유단자는 뭐 때매 찾노? 남궁련이한테 이단 옆차기라도 할끼가?”
조합원들이 웅성댔다.

“그기 아이라예. 부산시에서 중재를 해서 조정회의를 한다 카는데, 이 노무 손들이 장소를 영도경찰서로 정해 놓고는 우리 지부장이 꼭 나와야 된다 안 캅니꺼.”
8월29일이었다. 부산시가 다시 자리를 마련했다. 지부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교섭에 응하기 위해 채비를 했다.

“경찰서? 호랭이 아가리로 들어온나는 말이가 뭐꼬?”
“안 잡아간다꼬 약속을 하기는 하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예.”
“하모, 하모.”

조합원 중에 태권도 유단자 30명을 차출했다. 힘 좋은 조합원들은 허재업 지부장을 가운데 세우고는 영도경찰서로 향했다. 경찰서에서는 차를 제공한다고 했지만 우리는 필요 없다고 했다. 이 역시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허재업 지부장과, 조합원 30여명, 조합 간부 몇 명은 노래를 부르며 영도경찰서까지 행진을 했다. 시와 경찰이 공식적으로 허가한 가두시위가 된 셈이다.


회사는 직장폐쇄라는 강수를 뒀지만 우리에게도 우군에 생겼다. 회사가 정문을 봉쇄하면서 갑자기 일어난 가두 연좌농성 당시 가족들이 결합한 이후 가족들은 응원군이 됐다. ⓒ 매일노동뉴스

조합원 1천900명에 1천원씩


우리는 위풍당당하게 들어갔지만 소득은 없었다. 부산시의 중재안은 ‘회사는 직장폐쇄 철회, 체불된 임금 지급, 노조는 파업 철회, 그리고 조업 재개 이후 10일 이내에 교섭을 한다’는 것이었는데.

회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6개월이 걸려도 체불 노임은 지급할 수 없다”는 막말을 퍼붓고는 퇴장해 버렸다. 회사는 1968년 연말 투쟁의 복수극을 벌이듯 우리가 완전히 항복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회사가 부산시의 중재안도 받아들이지 않은 데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각개격파 작전이었다. 기술직 사원이 중심이 된 조합원 300여명이 조공지부를 탈퇴한다는 것이다. 우리 조공지부 2기 집행부의 중심은 현장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크게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지만 회사의 작전은 어느 정도 성공한 듯했다. 현장 노동자 50여명이 지부를 탈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틀 뒤 “탈퇴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며 다시 돌아왔다. 기름밥 동료들의 눈총이 따가웠던 탓이다.

당시 국방부장관의 사촌형이라는 사람이 관리실장으로 있었는데 조합원들을 회유하고 협박하는 데 열성이었다. 이 양반은 철야농성하고 있는 나를 찾아오기도 했다. “조선공사에서 손 떼고 제주도로 가라. 제주도에 가면 장사를 할 수 있게 먹고살 수 있게 해 주겠다.” 내가 못하겠다고 하자 “그럼 당신 형무소 간다”고 협박했다. 어디를 가도 좋다고 응수해 줬다. 나 이외에 지부 간부들, 조합원들도 이런 식으로 회유와 협박을 받았음에 틀림없는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월급이 나오지 않으니까 파업 대오에서 이탈하는 농성자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형편이 딱한 조합원들은 날품이라도 팔기 위해 농성에서 빠졌다. 적극적인 조합원들은 ‘누구는 다른 데 가서 일한다’며 문제를 제기했지만, 지부는 ‘아직 문제가 되지는 않으니까 몰래 일하는 건 놔 두자’고 설득했다.

당시 현장 노동자들은 월급을 말일에 받았는데 7월30일과 8월30일이 지났으니 두 달치 월급이 체불된 것이다. 집에 쌀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해결책이 있어야 했다.

우리 지부가 갖고 있던 투쟁기금이 370만원 정도 됐는데, 조합원 1천900여명에게 1천원씩 지급했다. 허재업 지부장은 조합비 관리면에서는 정말 철저했다. “조합비는 조합원의 피”라는 말을 종종 하면서 한 푼이라도 아꼈다. 조공지부 2기 집행부는 거의 해마다 단체협상과 임금인상 투쟁을 벌였기 때문에 투쟁기금을 모아 놓을 형편은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370만원이라는 돈이 남아 있어서 어쨌든 조합원들에게 약간이라도 지급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금속노조 본조를 비롯해 부산 지역의 노조들이 성금을 모아 밀가루를 지원해 줬다.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권오덕 전 조직부장이 활약을 해 줬기 때문이다. 1968년 연말 투쟁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갔던 권오덕은 3월부터 금속노조 본조 법규부장으로 파견을 나가 있었다.

본조에 있으면서 걱정이 된 권오덕은 연일 “조선공사는 각성하라”는 성명서를 내면서 금속노조 본조 차원에서 지원할 길을 강구했던 것이다. <계속 이어짐>

박미경 객원기자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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