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타분한 메시지
 
노동조합이나 노동운동은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낡은 창(프레임)’에 푹 빠져 있다. 어떤 감동도 없는 뻔한 메시지를 반복하는 낡은 운동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오랫동안 활동을 해 온 한 현장노동자의 말이다.
 
“현장에서 나름대로 활동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투쟁·계급·변혁이라는 세 글자를 빼고 얘기하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누구도 제대로 얘기하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난 다음에 후렴처럼 반복하는 구절이 생겼다. 예전 같으면 ‘생존권을 박탈하는 구조조정 철회하라!’는 구호를 함께 외친 후 ‘철회하라’를 두 번 더 반복하고 그쳤지만, 최근에는 “생존권을 박탈하는 구조조정 철회하라! 철회하라! 철회하라!”를 외치고 난 다음에 “비정규직 철폐, 투쟁! 결사 투쟁!”과 같은 구호를 덧붙인다.  이와 관련해 현장의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강사가 말했다.
 
“요즘 집회를 하면 구호를 외칩니다. 구호 마지막에 덧붙여 ‘비정규직 철폐, 결사투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구호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결사투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죽음을 결의한 투쟁인데…….”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정규직 노조의 간부들이다. 그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한다? 죽음을 각오한 투쟁은 고사하고 일상적으로 작은 지원이라도 제대로 하는 간부나 활동가들이 몇이나 될까?
 
“교육을 받고 난 다음에 시청 앞에서 열린 집회에 갔는데 다들 비정규직 철폐, 결사투쟁을 외치더군요. 그런데 들은 얘기가 있어 차마 따라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관성적으로 결사투쟁을 외치고 있으니 의도가 선량하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거짓이고 위선일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상투적인 주장을 내세우니까 노동운동의 ‘진정성’을 믿기 어렵다.

새로운 메시지가 없는 운동은 매번 반복되는 집회의 형식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슷한 조끼를 입고, 머리띠를 매고, 무대 위에서는 직책 높은 간부들이나 운동가들이 목청을 높여 연설을 한다.

한국에서도 이런 종류의 집회문화는 이제 일반화됐다. 아파트 부녀회가 관청에 항의할 때도 머리띠와 현수막과 팔을 들어 구호를 외친다. 

한국 노동운동의 집회문화는 외국의 노동자들에게는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국의 노동조합들이 외국의 노동조합을 방문할 때나 혹은 그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집회에 사용되는 머리띠·조끼가 훌륭한 선물이 될 정도다. 1996~97년 한국 노동자들의 총파업에 강한 인상을 받은 이탈리아의 노동조합들은 한국의 머리띠를 모방해 종이로 만든 머리띠를 착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슷하게 반복되는 집회는 노동조합 안에서도 식상하고 뻔한 것으로 인식된다. 재미도 감동도 없다. 노동절 집회나 노동자대회에 전국의 조합원들이 모일 때면 집회에 참석하지 않고 주변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국민은 2008년 촛불집회에서 전혀 다른 모습의 시위문화를 보여 줬다. 그러나 노동조합운동은 아직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지 못하고 있다. 
 
엉뚱한 메시지
 
최근 수년간 민주노조운동이 보여 준 새로운 메시지는 없을까? 물론 있다. 문제는 전혀 엉뚱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수년 전부터 대공장 노동조합들의 입사비리에 연루된 사건, 납품관련 뇌물관련 사건을 비롯해 심지어 민주노총 임원까지 비리에 연루된 사건들이 잇따라 터졌다. 2009년에도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과 대공장 노조 일부 간부들이 사기도박 사건에 연루된 사건이 터져나왔다.

이때를 놓칠세라 보수언론들은 일련의 사건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급기야 과거 민주노총의 사무총장까지 지냈음에도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이라는 정반대의 길을 걸은 인물이 [민주노총 충격보고서]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사진>

책의 내용은 이미 알려진 사건을 정리한 수준에 불과했지만 보수언론과 보수적인 단체 및 인물들은 이 보고서를 최대한 선전하고 배포했다. 단순한 선전과 배포에 그치지 않고 민주노총 탈퇴를 종용하는 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은 “민주노총에 대한 파괴공작을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2009년 3월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으로 떠들썩한 가운데 대공장의 노조간부들이 사기도박에 연루된 사건이 또 터졌다. 당시 회의를 마치고 난 뒤 한 단체의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성폭력 사건이나 사기노름이나 사람 사는 곳에서는 언제든지 생길 수 있는 일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사건이 터졌을 때 어떻게 대응하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언제든지 생길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2005년 1월, 기아차 입사비리가 한참 언론에 오르내릴 때였다. 노동운동 안에서도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다. 입사비리에 대해 투명하게 밝히고 반성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솔직히 이 사회가 그런 것 아닙니까. 기아차에 입사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습니다. 그래서 돈을 싸 들고 와서 주는데 그런 유혹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사람이 어딨습니까? 그런데 이 사건을 가지고 노조를 매도하고 더 크게 만드는 것은 바로 정권과 자본 아닙니까? 이런 정권과 자본의 음모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자꾸 내부의 자성만 촉구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강경한 입장과 원칙을 주장하던 간부가 목소리를 높여 반론을 전개했다. ‘정권과 자본의 노조말살 음모’는 바로 ‘조직보존의 논리’다. 비슷한 주장이 잇따라 제기됐다.

문제는 이런 사건들이 있을 때 단순히 사과하고 반성하는 데 머물지 않고,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한편에서는 ‘자본과 정권의 노조말살을 위한 음모’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더 이상 치부를 파헤치고 싶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근본대책을 만들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이런 종류의 사건은 늘 반복된다.

2009년 초에 널리 알려진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은 사건 자체보다는 조직에 미칠 나쁜 영향을 생각해 덮으려고 했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 ‘조직보존’이라는 논리가 ‘약자의 보호’라는 정의와 진실을 압도한 것이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해당 노조의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부끄러움과 노조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반감을 동시에 느낀다. 민주노총 간부의 성폭력 사건이 터진 다음에는 민주노총의 이름이 적힌 조끼를 입고 다니기 창피하다고 하소연할 정도다.
 
혁신? 개나 줘 버려
 
“민주노총은 죽었다.”
“위기는 구조적이다.”
“암 덩어리가 퍼져 있어 곧 사망한다.”

민주노총을 비판하는 보수단체들의 토론회에서 나온 얘기가 아니다. 2009년 3월12일 민주노총 혁신토론회에서 나온 지적이다. 사실 민주노총 혁신에 관한 토론은 수없이 많았다. 그럼에도 혁신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또다시 안팎의 공격을 받기에 이르렀다.

“혁신? 개나 줘 버려!”
토론회 소식을 들은 현장 조합원이 내뱉은 말 속에는 혁신에 대한 어떤 기대도 담겨 있지 않았다. 민주노총 간부들조차 이제는 제3노총을 만들어야 한다고 자조할 정도다.
비리사건이 터질 때마다 노동조합들은 너도나도 윤리강령을 채택한다. 하지만 그것은 종이 위에 남을 뿐인 한순간의 말잔치다.

간선제인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가 직선제로 바뀌었고, 곧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일부 민주노총 산하 지역본부장들은 직선제를 통해 선출된다. 그러나 직선제를 통해 뭔가 개선됐다는 얘기보다는 직선제 과정에서 부정투표 시비와 같은 내부 갈등이 더 많이 쏟아져 나왔다. ‘직선제는 노동운동을 망하게 하는 지름길’ 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수박 겉핥기 수준의 진단이나 상투적인 혁신대책은 아무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지금의 민주노총은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자의 구심이 아니며, 정부나 자본이 두려워하는 적대자도 아니다. 오래 전부터 ‘뻥 파업’으로 조롱받아 왔으며 급기야 ‘말 펀치’도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민주노총은 정부·자본·보수언론이 합세해 때리면 때릴수록 그들에게 이득이 돌아가는 활용대상으로 전락했다.

이 사실을 뼈저리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끝없이 추락할 것이다. 근본적인 자기성찰, 자기부정을 각오해야 한다. 혁명적인 조치가 없다면 민주노총은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계속 이어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