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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40년, 박인상 회고록 ⑩[제4부] 무너진 신화, 빼앗긴 노조 [제1편] “또 붙자! 싸우면 우리가 이긴다!”
1969년 9월14일, 박정희 정권은 국회에서 삼선개헌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분단 상황과 경제 개발’을 장기집권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불과 나흘 뒤인 9월18일, 금속노조 조선공사지부의 파업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긴급조정권이 발동됐다. 이것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생산직과 사무직을 모두 포함해 10인 이상 사업체에 고용된 임금노동자의 숫자가 100만명을 갓 넘겼을 때의 일이었다. 회사가 번창하면 노동자는 늘어나게 돼 있다. 따라서 그들이 더 늘어나기 전에 ‘순한 양’으로 길들여야 했다.
한편에서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출범을 경축하는 ‘공포정치’가 막을 올렸고, 다른 한편에서는 조선공사 노동자들의 투쟁이 조합간부와 핵심조합원의 해고 및 구속으로 막을 내렸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후퇴’해야 했을까.
분명한 것은 이기기에는 우리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역량을 보존하는 대신 ‘산화’하는 길을 택했다. 그것이 당시 ‘가장 잘나가던 직장’에 다니던 조선공사 노동자들이 앞으로 노동자가 될 후배에게 줄 수 있는 전부가 아니었겠는가.



새해가 되자 회사는 얼굴을 바꿨다. 1968년 연말 임시공 전원 해고를 철회시키기 위한 조공지부의 파업과 단식투쟁 앞에 무릎을 꿇었던 회사였다. 그러나 남궁련 사장은 조합원들 앞에서 자신의 입으로 직접 발표한 노사 합의사항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헌신짝처럼 버려진 노사합의

노사 합의사항이었던 임시공 해고예고 철회, 3분기 상여금 지급, 김장값 지급, 임시공의 본공 전환, 임시공 퇴직금 지급 등 가운데 임시공 해고예고는 철회돼 임시공의 일자리는 지켜졌다. 상여금이나 김장값은 원래 지급해야 했던 것이라 이행이 됐지만 임시공 본공 전환과 임시공 퇴직금 지급은 지켜지지 않았다. 임시공 퇴직금 지급에 관한 것은 조공지부가 1년 이상 계속적으로 근로를 했기 때문에 퇴사 할 때는 퇴직금을 받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한 사항이었다.

임시공과 관련된 노사 합의를 이행하라는 지부의 요구와 항의에 회사는 “적자 때문에 도저히 그럴 상황이 아니다”라고만 할 뿐이었다.

또 연말로 만료 된 단체협약을 갱신해야 되는데 회사는 이것 저것을 트집 잡아 계속 거부했다. 조공지부 2기 집행부는 단체협약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해마다 단체협약을 맺었다. 새 단체협약을 맺지 못하더라도 회사가 일방적으로 해지 통보를 하지 않는 한 연장돼야 하지만 지난 연말 지부의 요구를 전부 수용했던 태도와는 분명하게 달랐다.

“밴소 들어갈 때 하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 카더만은 딱 그 꼬라지네.”
“또 한 번 조직의 쓴맛을 볼라꼬 그라나?”
현장의 조합원들은 ‘싸우면 이긴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조공지부의 단결력과 투쟁력은 지난 해 연말투쟁으로 한껏 올라 있었다. 조합원들은 언제든지 싸울 태세가 돼 있었다.

비타협적인 투쟁이냐?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냐?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보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조공지부 상근간부들은 ‘회사 앞잡이’라는 험한 소리가 나올까 싶어 조합원들과 차분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 매일노동뉴스


“여섯 번 싸워 여섯 번 다 이겼다!”

이런 현장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조심하자’는 의견이 나왔는데, 연말투쟁을 마치고 곧 바로 현장으로 돌아가 일을 하던 권오덕 전 조직부장의 판단이 그랬다. “조공지부가 계속 죽는다고 아우성을 치면서 격한 투쟁을 하면 ‘양치기 소년’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일리가 있었다. 당시 조선공사 임시공들의 월급이 평균 1만5천원(잔업, 특근수당 포함)이었다. 생계비에는 훨씬 못 미치는 돈이지만(1967년 한국은행이 조사한 가구당 생계비는 2만1천370원이다), 1968년 서울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면 ‘3년이 지난 숙련공의 경우 임금이 잔업수당과 특근수당을 합쳐 월 7천원선(국내 톱메이커의 방직공장)’으로 나온다. 또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남성 일용 노동자들의 일당이 250원이었다. 한달 내내 일을 한다고 해도 7천500원이다.

조선공사 임시공의 임금을 업종이나 성별이 다른 건설 일용 노동자들이나 여성 노동자들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당시 조선공사와 비교할 만한 성인 남성 노동자의 일자리가 거의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라 번듯한 공장에 다니는 것만 해도 행운이던 시절이었다. 어쨌든 숨을 고르면서 새 판을 짤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조공지부는 작년 이후 대규모 태업을 포함해 이미 여섯 차례 파업투쟁을 벌였다. 그렇다고 요즘 후배들 표현처럼 ‘현장의 피로도’가 누적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문제는 싸움을 거듭할수록 현장의 분위기는 올라가는데 세상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는데 있었다.

권오덕은 내게도 지부 상근간부를 그만두고 현장에서 일 하기를 권했다. 나는 그의 뜻은 충분히 이해하고 동감했지만 연말 투쟁으로 노사가 합의한 내용에 대해서는 마무리를 지어 놓고 현장으로 가야 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시간은 흘러 봄이 왔다. 지난해 연말 회사가 약속한 임시공의 본공 전환과 퇴직금 지급도 이행되지 않고, 단체협약도 갱신이 되지 않은 가운데 4월부터 임금협상에 들어가야 했다.

조공지부가 내건 요구조건은 △임금 56.87% 인상(3월1일부터 소급 지급) △노조 안에 따른 단체협약 개정△상반기 상여금 200% 지급 △임시공 퇴직금 지급 △위험수당 지급 △작업복 지급, 임시공 연월차휴가 지급, 안전장구 적기 지급 등 제협정 이행 △임시공의 본공 충원 △부당해고 및 부당전직 철회 쟁의기간을 유급으로 인정할 것 등이었다. 핵심적인 요구사항은 임금인상과 지난 연말 노사합의를 봤던 임시공의 처우개선에 관한 것이었다.

파업 찬성 99%, 그러나 가시지 않는 불안감

회사는 교섭을 차일피일 미뤘다.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지부의 요구를 묵살했다. 회사가 적자라면 무엇 때문에 적자인지, 얼마만큼의 적자가 나는지, 적자가 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 지부나 조합원들에게 설명이라도 해야 할 텐데, 이마저도 피했다.

수상했다. 회사가 혹시 노조를 잠재우거나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게 아닐까. 싫든 좋든 노와 사는 부대낄 수밖에 없는데 지난해 연말 이후 회사의 태도는 노조를 무시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급기야 6월19일 남궁련 사장은 차관 교섭을 한다고 해외출장을 갔다. 지부에게 돌아온 답은 “7월7일 돌아오니 그때까지 기다리라”라는 것뿐이었다. 조합원들과 지부 간부들은 분노를 넘어서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조공지부는 6월30일자로 쟁의발생신고서를 작성해 부산지방노동위원회에 제출했다. 7월7일 부산지방노동위원회로부터 적법 판정을 받았다. 30일의 냉각기간 동안 노동위원회에서 근로자위원은 임금인상 38%, 공익위원은 38%, 사용자위원은 25%를 제시했는데 회사는 사용자위원 안도 거부했다.

파업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파업 말고는 대안이 없지만 ‘마음대로 해 봐라’는 식의 회사 태도는 지부 간부들에게 연구의 대상이었다. 안효덕·부성수 선생 등 조공지부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던 영도의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저쪽의 전략을 살펴봐야 한다”며, “붙기만 하면 문제다”는 의견이 나왔다.

민영화된 이후 처음 벌어진 싸움에서는 회사측이 당했지만 이번에는 쉽게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게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국영기업과 민영기업은 다르다”, “저들의 작전을 알아야 된다”고 지부 상근 간부들은 노조 전체운영위원회에서 조심스레 의견을 펼쳤지만 현장의 분위기는 달랐다. 비상근 간부들은 “무슨 소리냐”, “연말에 약속한 것도 제대로 집행도 안 되고, 민영화됐기 때문에 언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데, 싸우자”며 분위기를 돋우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다 못해 터지기 직전이었던 현장 조합원들은 과연 7월16일 진행된 파업 찬반투표에서 99%가 찬성표를 던졌다.

비타협적인 투쟁이냐? 이보전진을 위한 일보후퇴냐?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보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경우가 있다. 교과서식 정답은 조합원의 뜻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노동조합 간부들이 주춤거리는 조합원들을 나서게 할 수도, 싸우려는 조합원들을 멈추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그때 조공지부 상근간부들은 ‘회사 앞잡이’라는 험한 소리가 나올까 싶어 조합원들과 차분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조합원들은 본공, 임시공 할 것 없이 파업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구호 외치고 노래를 부르다 보면 지칠 법도 한데 끄떡도 하지 않았다. ⓒ 매일노동뉴스

파업을 부르는 회사

8월1일, 파업 첫날이었다.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회사는 이날 아침에 20% 임금인상안을 내놓았다. 며칠 전 도크게이트가 파괴돼 긴급하게 수리를 해야 될 배가 생겼던 것이다.

현장 조합원들은 “그것 가지고는 매듭을 지을 수 없다”며, “더 밀고 나가라”고 요구했다. 사측의 제안은 부산지방노동위원회 사용자위원이 내놓은 25% 인상안보다 낮았다. 게다가 임시공 문제에 대해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합의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합원들의 절반이 임시공이다. 이건 숫제 회사가 파업을 원하고 있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기계 소리가 멈춘 조선소. 조합원들의 구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업기간 동안 매일 오전 11시께 규탄대회를 열었다. 조합원들과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교섭 일정이나 결과, 영도 경찰서나 기관들의 움직임, 지역 신문에 실린 우리 소식 등을 조합원들에게 전했다.

요즘에 비하면 파업 프로그램이 빈약했지만 내용과 형식은 비슷했다. 구호 외치고 노래 부르고. 그때 불렀던 노래 가운데 기억나는 건 <흔들리지 않게>다. 또 동요 몇 곡을 개사해서 불렀다. 농성은 주야 교대로 진행됐다. 500명씩 인원을 나눠, 낮에 농성을 했던 사람은 집에 가고, 밤새 농성장을 지켰던 조합원은 아침에 집에 들어갔다.

조합원들은 본공, 임시공 할 것 없이 파업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구호 외치고 노래를 부르다 보면 지칠 법도 한데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농땡이 부리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 날이 더우니까 규탄대회에 빠져 그늘 밑에 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부 간부나 감찰들이 가서 설득하면 뒷자리라도 앉아서 손을 흔들어 댔다.

지난해 연말 17일 동안 싸운 경험이 있기 때문에 조합원들은 느긋했다. “파업이 언제쯤 끝나겠냐”고 묻는 조합원들이 거의 없었다. ‘회사가 항복할 때까지’ 간다고 스스로들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8월4일, 부산시장의 주관으로 조정회의가 두 차례 열렸지만 회사는 20% 임금인상 말고는 아무런 안을 내놓지 않았다. 8월15일 서울에서 진행된 교섭에서도 성과가 없었다. <계속 이어짐>

박미경 객원기자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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