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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탈출 (6)
  • 조건준 금속노조 정책국장
  • 승인 2009.08.21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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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탈출’이라는 주장을 하면 공장은 버려야 할 곳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장과 직장을 모두 버리고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노동조합이 주목해야 할 활동이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임금의 노예, 임금실리만을 추구하는 ‘공장귀신’이 아닌 ‘잠일술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이를 통해 삶의 시간적 재편, 건강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 가족과 사회관계 및 문화적 영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 가야 한다.


베블렌 효과(Veblen effect)의 반복

“계속 돈을 퍼부어라!”
불행하게도 자본주의를 인정하든 아니면 부정하든 진보적인 사람들의 상당수가 ‘다시 경기장에서 일어서기’에 동의한다.

“내수를 살리기 위해…….”
“노동자·서민의 생계를 위해…….”

진보진영의 경우 기업을 위해, 부자를 위해 정책을 펴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노동자와 서민을 위해 경제를 살리자고 강조한다. 재벌대기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소기업을 살리는 방식으로 돈을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벌 중심, 부자 중심의 경제가 아니라 노동자와 서민, 중소기업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국은 돈을 퍼붓자는 말이다. ‘일부만 일어서기’가 아니라 ‘모두 일어서기’를 주장하는 셈이다. ‘모두가 함께 앉아서 구경하기’가 결코 아니다.

보수적인 자본과 정부는 물론이고 상당수의 진보적인 사람들까지 찬성하는 ‘모두 다시 일어서기’라는 낡은 레퍼토리는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니라 최신유행곡이다.

이런 발상으로는 ‘일자리 나누기’와 같은 시도가 성공할 수 없다. 일단 잘라내고 난 다음에 기업이 좋아지고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채용하자는 주장만 난무한다. 당장 어려운 시기에는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하지 말고 우선 ‘희망근로’와 같은 만들기 쉽고 돈도 많이 들지 않는 일자리를 창출해 땜질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는 낡은 패러다임, 낡은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경제위기라는 일시적 현상으로 인해 감옥에서 수용능력이 안되니까 잠깐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가(정리해고·희망퇴직) 세월이 지나면 다시 불러들이겠다는 것이다. 공장감옥에서 살아온 노동자는 결국은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처럼 ‘공장감옥’으로 돌아가는 것을 꿈꿀 뿐이다.
시장에는 넘치는 수요가 있어야 하고, 공장에서는 그 수요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생산하는 그런 모습이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상식을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이윤을 남길 수 있다면 어디든지 투자해 끝없이 부풀리려는 자본은 ‘파이 늘리기’를 쉴 새 없이 반복한다. 자본의 욕망은 그들만의 욕망이 아닌 모든 인류의 욕망으로 변했다. 베블렌이라는 미국의 사회학자가 1899년에 쓴 [유한계급론]이라는 책에서 말한,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사치를 일삼고 가난한 사람들도 그들대로 부유한 사람들을 모방하려는 이른바 ‘베블렌 효과’가 반복된다.

행복이란 욕망을 얼마나 채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줄임으로써 만족감을 키우는 것인가? 이 문제만 해도 여러 가지 철학과 사상적 논쟁이 될 것이다.
‘절대적 욕망의 줄이기’가 곧 ‘경기장에서 앉기’라고 할 수만은 없다. 줄일 것은 줄이고 늘릴 것은 늘리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생산력을 높여 준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더 많은 휴식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하고 있다. 문제는 과학기술의 발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생산력이 높아져 더 많은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적은 자원을 요구하고 친환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생산력이 높아진 만큼 노동시간을 줄이고 더 많은 여가를 만들 수 있다. 생산을 위한 관계 속에 묶이기보다 삶을 즐기기 위한 관계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양적 팽창을 위해 무한질주를 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경고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왔다. 환경파괴에 대한 경고, 식량위기에 대한 경고가 대표적이다.
인류사적 차원이나 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 자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혼자 앉기

자본은 위험할수록 더 높은 이익을 가져다준다며 고위험 투자를 해 왔다. 더 빨리 생산해야 한다며 노동강도와 노동시간을 늘리는 유연성을 추구했다. 세계 곳곳에 공장을 지으면서 더 많이 투자하고 더 많이 생산했다.

노동은 달랐던가? 주야 맞교대를 참으면서 주말까지 빼앗기면서 특근을 했고 이는 근골격계 질환을 포함한 건강권의 악화를 가져왔다. 위험한 노동을 하고 과로사가 터지고 산업재해로 사람이 죽어도 별로 놀라지 않는다. 언제 잘릴지 모르니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생산활동에 임한다.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했음에도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장시간의 노동을 견디고 있다.

노동과 자본이 “더 위험하게, 더 빨리, 더 많이 생산하자”는 구호에 함께 매몰된 것이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이러한 패러다임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대표적인 제조업의 하나인 세계 자동차산업의 경우 생산능력은 9천400만대인데 이 가운데 3천400만대인 36%가 과잉설비라고 한다.(2009. 1. 12비즈니스위크)

이 사실 하나만 놓고 본다면 세계 자동차산업의 넘치는 설비를 줄여야 한다. 어떻게 줄일 것인가? 누구부터 줄일 것인가?

자본주의라는 세상의 답은 “시장이라는 재판관에게 맡기자”는 것,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르자는 것이다. 경쟁력이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은 재판관의 자격이 애초에 없다. 과잉생산이라는 행위는 바로 시장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이 만든 무한경쟁의 결과가 과잉생산이다. 시장은 재판관이 아니라 공범 또는 주범이다.

ⓒ 매일노동뉴스
세계 자동차산업의 과잉생산을 해소하기 위해 각 국가가 신사적협정을 맺어 합리적인 기준을 근거로 쓸모없는 공장을 일정 비율씩 줄이는 것을 기대하기도 힘든 세상이다.
물질적 소유를 줄이고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자발적 간소화(voluntary simplicity)’ 방식도 있다. 슬로우시티 운동도 ‘더 빠르게’라는 세계화의 구호와 정반대의 방식이다.

한국사회에서도 심심찮게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귀농’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런 운동은 ‘경기장에서 일어서기’와 정반대로 ‘경기장에서 앉기’다. 경기장에 들어선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경기관람’을 포기하고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혼자서 앉기’나 혹은 아예 경기장을 떠나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실제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삶으로부터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탈출을 꿈꾼다.

“대부분이 체제나 시스템을 바꾸기보다는 적응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니까 기러기 아빠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한국에서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가족을 해외에 두고 교육을 시킨다. 자식 하나 잘 키워서 성공시키겠다는 생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방법이다. 물론 기러기 아빠의 경우 자기가 그 비용을 벌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상당수가 한국에서 희망을 갖기 어렵기 때문에 언젠가는 돈 좀 벌어서 필리핀이나 어디로 떠나서 편하게 노후를 살겠다는 꿈을 꾼다. 해외만이 아니라 언젠가는 시골에 집을 짓고 살겠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 2008년 10월, 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간부 인터뷰

자발적 간소화 운동이나 귀농과 같은 ‘혼자 앉기’는 보는 사람에 따라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일 수도 있고, 대안적 삶을 향한 ‘적극적인 탈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특정한 사람들의 선택이며, 사회의 부분적 현상에 머물고 있다.

모두가 불행한 ‘경기장에서 일어서기’와 부분적인 현상에 그치는 ‘경기장에서 혼자 앉기’를 넘어설 방법은 없을까? ‘경기장에서 모두 함께 앉기’를 가능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일시적으로 모두가 앉도록 만드는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파국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 1991년 소련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승리’라고 했다. 그러나 불과 20년도 안 돼 자본주의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더 이상 자본주의적 방식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대공황이 온다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날 것이다.

단순히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넘어 ‘복합위기’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다. 환경의 재앙과 식량의 위기가 같이 오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위기가 한꺼번에 닥친다면 단순히 ‘자본주의의 위기’에 따른 새로운 경제구조를 뛰어넘어 ‘문명사적 전환’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대공황이나 문명사적 위기와 같은 파국이 올 것을 기다리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어떻게 하면 ‘경기장에서 모두 함께 앉기’를 할 수 있을까?

줄이고, 나누고, 채우기

경제위기에 맞서는 생존의 방식은 일상적으로 ‘줄이고, 나누고, 채우는’것이다.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활동과 실천을 하지 않는 노동조합에게 ‘세상을 바꾸는’ 뭔가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100년 만에 올까 말까 한 초유의 사태’라고 하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줄이기’는 불가피하다. 생산이 줄고, 소비도 줄고, 그에 따르는 자본의 이윤도 줄어든다. 노동자 또한 생산의 축소, 임금의 축소를 경험한다.

각국의 정부들은 앞장서 ‘늘리기’를 하고 있다. 막대한 자금을 퍼부어 소비를 늘리고, 투자도 늘리려고 한다. 공적자금을 퍼붓는 대신에 공장 폐쇄와 자산 매각을 비롯한 줄이기를 동반한다.

한편에서는 각국 정부의 막대한 자금 퍼붓기가 파국적인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늘리기’의 무모함에 대한 지적이다.
‘줄이기’라고 해서 무조건 줄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법도가 있다.

줄이기를 하면서 한쪽만 줄이고 다른 한쪽은 줄이지 않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고 합리적이지도 못하다. ‘고통분담’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가진 자들에게는 세금을 감면해 주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조치가 없다면 그것은 고통분담이 아니다.

위기에 처한 기업이 구조조정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주주나 채권단의 책임을 묻는 데는 인색하고 노동자를 해고하고 임금삭감을 하는 것만 앞세우는 것은 합리적인 조치가 아닌 가진 자를 위한 구조조정이고 고통전담이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경우 대주주나 채권단이 채무조정을 한다. 담보가 확실한 은행들은 파산이라는 최악의 경우에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 설비와 땅을 팔아 보충한다. 반면에 노동자에게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해고를 통해 일자리를 빼앗고, 후생복지 중단과 임금삭감을 통해 돈도 빼앗는다. 이것은 합리적인 줄이기가 아니다.

무엇을 줄일 것인가? 거품을 줄이고, 투기를 줄이고, 과잉생산을 줄이는 것은 피할 수 없고 해야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줄여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생산이 줄어든다고 해서 고용을 줄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데도 기업은 노동강도를 높여 생산성을 올리려고 한다. 노동강도를 높이면 열 사람이 생산하던 것을 다섯 사람이 생산한다. 나머지 다섯은 남으니 잘라내자고 한다. 개별기업의 생산성은 높아질지 모르지만 사회 전체는 실업대란에 빠진다. 사회 불안은 물론이고 경제 전체가 취약해진다.

‘줄이기’는 반드시 ‘나누기’를 요구한다. 100만원을 가진 기업에서 100명이 1만원씩 받았을 경우 기업의 자금이 50만원으로 줄었다면 100명이 5천원씩 받는 방식으로 나눠야 한다. ‘일자리 나누기’를 비롯한 분배가 중요하다. 부자들은 가진 돈을 노동자와 서민에게 나눠야 한다. 곳간을 열어야 한다.

1만원에서 5천원으로 줄어든 살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채워야 한다. 채움은 공장 안에서 해결하기 힘들다. 공장 밖에서 채워야 한다. 줄인 만큼 채우기가 필요하다.
공장 밖에서 채우기는 늘리기와 줄이기가 동시에 진행돼야 한다.

사회 전체와 국가 차원에서 늘려야 할 것이 적지 않다. 부자에 대한 세금, 투기자본에 대한 규제, 사치성 소비재에 대한 세금, 친환경적·고효율의 산업생산, 소비와 투기를 조장하는 일자리를 대신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양질의 일자리, 노동자와 민중에 대한 지원, 노동시간 단축을 대신하는 여가의 확대 등이다.

어려운 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하면서 왜 노동자와 민중의 어려워진 살림을 지원하기 위한 혁신적인 조치들은 취하지 않는 것인가! 실업기금을 조금 늘리고, 빈곤층에 대한 부분 정책을 내놓는 것은 면피용일 뿐이고 생색내기일 뿐이다.

노동자와 서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공장 밖에서 채우기’는 곧 줄이기다. 비용절감을 하는데 왜 기업의 비용만 줄이는 것인가? 노동자 개개인도 비용을 줄여야 한다. ‘허리띠 졸라매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교육비는 여전히 많이 들고 집값은 또 오르는데 임금만 줄어든다면 삶은 위험에 처한다. 노동자들의 생계비를 줄이기 위한 혁신적인 조치들이 필요하다. 무상교육·무상의료·무상주거를 향한 노력이 절실하다.

경제위기 시대를 맞아 정부의 정책을 보면 뒤죽박죽이다. 한편에서 실업대란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뼈를 깎으라’며 정리해고를 한다. 문제가 되는 대운하 사업과 같은 ‘삽질경제’ ‘토목개발’은 줄여야 할 부분을 늘리는 잘못된 정책이다.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어 주식시장, 금융산업, 부동산 시장을 지원하는 것도 줄여야 할 것을 늘리는 엇박자 정책이다.

자료사진 ⓒ 매일노동뉴스

경제위기 시대의 해법은 개별기업 노동자들의 저항과 투쟁을 넘어 사회적 규범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줄이고, 나누고, 채우기’를 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구조조정 반대’를 외치는 것은 ‘구조조정=정리해고’라는 현실이 있기 때문에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회사가 어려운데, 경제가 어려운데 하며 옛날 그대로 가자고 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구조조정 반대’는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사고방식이다. 자본이 던진 프레임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맴도는 저항에 불과하다. 노동운동이 희망을 보여 주고자 한다면 사회 전체를 향해 새로운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계속 이어짐>

조건준 금속노조 정책국장  labortoday@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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