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탈출’이라는 주장을 하면 공장은 버려야 할 곳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장과 직장을 모두 버리고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 아니다. 노동조합이 주목해야 할 활동이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임금의 노예, 임금실리만을 추구하는 ‘공장귀신’이 아닌 ‘잠일술 인생’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과 이를 통해 삶의 시간적 재편, 건강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 가족과 사회관계 및 문화적 영역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 가야 한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노동조합이 공장을 벗어나  +α를 만들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나누며 소통하는 것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걸림돌이 있다. +α를 만드는 것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정당이 할 일이라는 비판이다.

‘양날개론’이라는 유명한 얘기가 있었다. 노동조합만으로는 노동운동이 성공할 수 없고,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이라는 두 개의 날개로 날아가야 한다는 논리다.

‘양날개론’은 사실 노조는 경제투쟁을 하고 정당은 정치투쟁을 하자는 일종의 역할 분담론이다. 말이 좋아 역할 분담이지 한쪽은 경제투쟁으로 가고 다른 쪽은 정치투쟁으로 가면 과연 제대로 날 수 있을까? 
 
진보정당의 누구도 노동조합은 공장에서 생산라인이나 잘 챙기면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누구도 노조는 사업장의 개별 자본과 싸우는 일만 열심히 하라고 하지 않는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것이 국회의원을 배출하고 의정활동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의미가 없다. 유수한 노동운동가가 국회의원이 되는 과정은 있었지만, 노동조합이 ‘공장감옥’을 넘어 새로운 운동을 개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몇몇 사람들만 정치무대에 데뷔하는 것에 그쳤다. 결국 노동조합은 선거 때가 되면 진보정당에 표를 찍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다. 노동자는 표 찍는 기계일 뿐 정치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은 경제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정치의 핵심이 경제라는 얘기다. 경제위기 시대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반대로 경제의 핵심은 정치다. 노동자·서민이 경제위기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 어떤 정치적 결정이 이뤄지는가는 중요하다.

기업 구조조정에서 사람을 잘라내는 것을 핵심으로 “뼈를 잘라내는 구조조정을 하면 공적자금 준다”며 해고를 독촉하는 정책은, 있는 일자리도 지키지 못하면서 실업대란을 부추기는 사기다. 실질적인 일자리 나누기, 노동시간 단축을 추진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노조는 사업장에서 노동조건에 대한 투쟁을 하는 경제투쟁을 담당하고, 정당은 국회에서 정치투쟁을 담당하라는 것은 두 날개가 서로 다른 쪽으로 가라는 얘기다. 그러면 추락한다.

이는 노동조합운동 전체를 ‘공장으로부터의 탈출’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들은 그냥 감옥에 남아 있어라. 우리가 감옥 밖에서 필요한 것을 대신해 주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유명 트로트가수가 불렀던 노래 그대로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이다.
그동안 민주노조운동을 해 왔고, 민주노총의 조직적 힘을 바탕으로 국회의원까지 했던 진보적 정치인들이 지금에 와서 “민주노총은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지 못하니 시효가 끝났다”고 비판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노조 안에서 자랐거나 그 힘으로 정치에 진출한 사람들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비판하기 이전에 스스로의 회개와 성찰이 없다면 그 또한 책임회피용 발언에 불과하다.

2009년 4월29일 재보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후보단일화를 추진했다. 후보단일화의 방법은 바로 민주노총의 조합원 투표를 통해 어떤 후보가 통합 단일후보로 적합한지를 판가름하자는 것이었다. 양측의 세부적인 쟁점들 때문에 두 후보가 모두 등록하는 상황까지 이르러 민주노총 조합원 투표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단일화에는 성공했다.

울산 북구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현대차 노동자들의 압박 등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억눌려 사는 노동자 입장에서 진보정당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상당한 자신감을 안겨 주는 일이다. 

하지만 진보정당이 선거에서 표를 기대하는 것만큼 일상적으로 민주노조운동이 공장을 넘어 지역과 사회로 나오도록 하는 데 얼마나 노력을 기울여 왔던가? 단순한 선거 동원부대나 표 찍는 역할만 반복한다면 노동자들은 진보정당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진보정당이 진정으로 전체 노동자·민중의 정당이 되고자 한다면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일터를 뛰어넘어 지역과 삶터에서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 노동자 의원 단 몇 명이라도 있었다면, 우리는 이 거대한 총파업을 승리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96~97년 정리해고에 맞선 총파업 투쟁이 끝난 후, 정리해고가 도입되자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운동 지도부들은 정치세력화를 해야 한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 이후 진보정당에도 국회의원들이 탄생했다. 이제는 뭐라고 할까?
“아직 국회의원 쪽수가 적어 한계가 있으니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어 주십시오.”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가 10명이나 당선된 뒤 들었던 얘기다. 국회의원 많을수록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진보정당의 진정한 힘은 국회의원이 몇 명인가가 아니다. 일터만이 아니라 삶터에서 주체로 서는 노동자·민중이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 있다.

진보적인 정당의 역할은 입법이나 의정활동보다 노동자와 민중이 표를 찍은 유권자에 머물지 않고 사회운동의 실질적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일어서기?
 
세계적 경제위기는 경제의 ‘투기화’와 ‘타짜화’에 따른 거품경제 때문이다. 거품경제의 근본에는 과잉생산이라고 하는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자본의 무한경쟁으로 ‘높은 위험을 무릅쓰고, 더 빠르고, 더 많이’ 생산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진 것이다.

중국과 아시아에서 생산된 물건들은 대거 미국시장에 수출된다. 미국은 온갖 이름의 파생상품을 만들어 싼 이자로 대출을 해 주고, 빚잔치를 통해 수많은 물건을 소비해 왔다.
그런 가운데 거품이 사그라졌고 미국이라는 거대한 노름판이 무너졌다. 수많은 투자은행들이 적자로 돌아섰다. 무너지는 은행들을 구하기 위해 미국 정부는 엄청난 공적자금을 쏟아 부었다.

금융권만이 아니라 제조업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GM의 이익이 곧 미국의 이익’이라던 세계 최대 자동차회사인 GM도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수많은 공장들이 쓸모없는 흉물로 전락해 폐쇄조치를 기다리고 있다.
 
경제위기 시대의 생존법은 ‘줄이기’다. 1929년의 대공황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인류가 만들어 온 수많은 것들을 모두 부수고, 과잉생산 능력 자체를 파괴한 다음에야 해결됐다. 전쟁을 통해 파괴하는 과정은 다른 한편에서 군수물자를 대규모로 생산하는 과정이었다. 전쟁 이후 파괴된 모든 것을 새로 생산함으로써 다시 자본주의 경제를 회복했다.

경제위기 국면에서는 소비가 줄어든다. 그러니 생산도 줄어든다. 이윤도 줄어들기 때문에 비용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임금도 줄고 고용도 줄어든다.

“더 위험하게 투자하고,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빠르게 만들자”를 내세웠던 세계적 기업들은 이제 과거의 방식으로 버틸 수 없게 됐다.

그런데 세계 각국은 ‘늘리기’를 하고 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소비를 늘리기 위해, 투자를 늘리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다. 그 결과에 대한 예측은 엇갈린다.
 

2009년 4월2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G20 금융정상회의 전후 미국, 한국 증시에서 주가가 오르고 정부와 시장 쪽에서 끊임없이 ‘경기 하강이 바닥을 치고 있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월스트리트의 대형 상업은행들은 예상과 달리 놀라운 실적이라며 흑자발표를 했다.

그러나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 크루그먼 교수는 “회복이 아니라 천천히 악화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업률이 경기회복을 느끼는 중요한 표시인데, 2001년 경기 후퇴기에도 산업생산과 국내총생산(GDP)이 소폭 증가세로 돌아서자 경기 후퇴가 종료됐다고 선언했지만 이후 1년 반 동안 계속 실업이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는 “경기 후퇴가 9월에 끝난다고 해도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지만, 실업률은 내년 말까지 상승세를 지속할 것이며, 2011년까지 경기 회복을 체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금융권의 부실해결이 가장 중요한데 미국 정부와 월가가 사기극을 하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했다. 로이터통신은 한 투자분석기관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현재의 경제상황이 계속될 경우 2010년 1분기까지 미국의 4대 은행에 속하는 웰스파고의 총 손실이 무려 1천200억달러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웰스파고는 2009년 1분기에 30억달러의 순이익을 올렸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또 다른 유명한 경제학자인 루비니 교수는 “웰스파고는 시가평가제를 무력화시켜 부실을 숨기고 손실을 축소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는 “위기에 대한 대응력을 평가하는 정부의 ‘스트레스 테스트’는 ‘사기 테스트’”라고 비난했다.

2009년 4월20일 한국의 언론들은 일제히 떠도는 돈이 800조원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부메랑을 우려했다. 주가가 단기간에 오르고 강남지역 재건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이 오름세를 보이면서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렸다는 것이다.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09년 2월 말 기준 단기 부동자금 규모는 784조7천억원이며 3월 말에는 800조원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주식과 부동산시장이 과열 조짐을 보이는 것도 떠돌아 다니는 돈 때문이라고 한다. 주가는 3월2일 1천18.81에서 4월17일에는 1천329로 30% 뛰었다. 서울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 가격은 5천만원에서 2억원까지 올라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던 2006년의 90~95% 수준을 회복했다.

그런데도 실물경기는 회복되지 않고 있다. 이런 식으로 실질적인 경기회복은 안 되는데 주식과 부동산 가격만 오르면 완전히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빠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4월16일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회에서 “800조원은 분명 과잉유동성”이라고 말했다. 금융감독원장도 “(과잉 유동성이) 부메랑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엄청난 돈이 떠돌면서 집값과 주식 값만 오르는 것이 아니다. 2009년 4월 한 유통업체의 발표를 보면 식료품 값도 급등하고 있다.

각국 정부에 의한 엄청난 자금 퍼붓기는 과거의 경제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수술 없이 또다시 잘못을 반복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모두가 ‘운동장에서 일어서기’를 했다면 이제는 모두 ‘앉아서 구경하기’로 갈 수는 없는 것일까?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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