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안전 활동을 오래한 노조는 산업재해가 발생했을 때 홈페이지를 통해 조합원들에게 보고하는 양식이 있어요. 유사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원인과 재발방지 대책을 살펴볼 수 있죠. 금속노조 지회사례 중 좋은 사례를 한번 찾아보세요. 다음 시간까지 숙제입니다.”

지난 14일 오전 충남 아산에 있는 자동차 부품업체 대림프라코의 회의실. 금속노조 충남지부 노동안전보건 활동가 10여명이 모여 ‘산업재해 사고조사 방법’을 주제로 교육을 받고 있었다. 금속노조 소규모 사업장의 노동안전보건 담당자들은 한 달에 한 번씩 활동가 양성교육을 받고 있다. 지난해 금속 노사의 산별협약으로 100인 이하 사업장에 월 16시간의 노동안전(노안) 활동시간을 확보해 가능한 일이다. 강의는 원진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김신범 산업위생실장이 맡고 있다. 올해 들어 여섯 번째 교육이 진행된 이날 <매일노동뉴스>가 교육 현장을 들여다봤다.

‘명탐정’으로 변신한 노안활동가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이날 수업은 지난 시간에 이어 ‘사고조사 방법’에 대한 교육으로 진행됐다. 김신범 실장이 숙제 점검에 나섰다. 계단에서 노동자가 굴러 떨어진 사고 사례를 보고 ‘로직트리(논리나무)’를 만들어오는 숙제다. 로직트리는 사고의 결과(사망 또는 부상)를 맨 위에 놓고, 조사를 통해 발견한 사실들을 배열해 사고의 근본 원인을 찾아가는 조사 기법이다.

“숙제 해 오신 분 손들어 보세요.”
3명의 노안담당자들이 손을 들었다. ‘모범생’ 혹은 ‘천재’로 불리는 김형철(33) 티센크루프동양엘리베이터지회 노동안전보건부장은 전날 연구소 홈페이지에 숙제를 올려 모두를 감탄시켰다. 역시 ‘모범생’답다.
숙제 점검이 끝나고 3개 조로 나뉘었다. 이번엔 좀 더 복잡한 사고를 통해 원인을 역추적해야 한다.

“자동차부품 제조공장에서 발생한 협착사고입니다. 사고와 관련된 사실을 기록할 때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주관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잊지 마세요.”
로직트리 기법을 통해 궁극적으로 시스템의 문제를 발견하고, 정보가 불충분할 경우 재조사를 해야한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제공하는 중대재해속보 자료를 활용하는데 사고가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선생님, 수업 받다가 정신과 치료 받는 사람도 있나요?”
신언구(39) 엠시트지회 노안부장이 우스갯소리로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배운 내용을 토대로 실제 사고사례를 조사해봤으면 좋겠다”고 의욕을 드러냈다.

 


한 달에 한번 교육 ‘아쉬워요’

김선화(36) 대림프라코지회 노안부장은 수업에 참가한 유일한 여성 간부였다. 사업장의 노안활동은 주로 남성노동자가 맡는다는 편견을 깼다. 김 부장의 수업 참여는 이번이 두 번째. 지회가 지난 5월 금속노조에 가입한 신규 사업장이기 때문이다.

김 부장은 “여러 사람의 생각이 서로 달라 하나로 의견을 모으기 쉽지 않았다”면서도 “한 달에 수업이 한 번뿐인 것이 너무 아쉽다”고 말했다.
“처음엔 떠밀려서 했죠. 학교 다닐 때도 안하던 숙제를 하려니 힘들기도 하고. 머리는 아픈데 하면 할수록 재밌는 것 같아요.”

김학성(29) 다스지회 노안부장의 말이다. 그는 “혼자 하려면 힘들지만 함께 할 수 있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막내’인 권혁근(27) 신라정밀지회 노안부장은 개인 시간을 쪼개 교육에 참가하고 있다. 신라정밀은 아직 단협을 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노안활동가들의 고민은 따로 있다. 다음달 금속노조 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의 임기가 계속될지, 교육이 계속 진행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김신범 실장은 “교육에 참여한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충남지부의 1기 사고조사위원으로 임명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상록(39) 한국분말야금지회 노안부장은 “내년이든 후년이든 교육을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노동현장에서 안전보건 영역은 후순위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소규모 사업장은 더 그렇다. 대기업 노조들은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사고가 발생했을 때 대응하는 경험과 노하우를 갖춰가고 있지만 소규모 사업장은 역량이 빠듯하다. 그래서 금속노조가 100인 이하 지회들이 자체적으로 안전보건 활동을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도입한 것이 ‘100인 이하 사업장 노안활동가 양성 사업’이다.
김성근(41·사진) 금속노조 충남지부 노동안전보건부장은 “충남지역은 100인 이하 사업장뿐만 아니라 교육을 받길 원하는 지회 간부들에게도 문을 열어두고 있다”고 말했다.
충남지부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노안활동가들이 전국 지부 가운데 처음으로 사고 조사 방법론을 배우고 제조업 사업장에 맞는 ‘디자인 시스템’ 개발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 시스템은 공정을 디자인하는 단계부터 가능한 덜 위험한 공정을 선택한다거나, 덜 위험한 화학물질을 선택해 사전에 위험을 감소시키는 것을 말한다.
“처음엔 사고 조사처럼 다른 지역에서 하지 않는 분야를 새롭게 시도한다는 자체가 어려울 것 같았어요. 그런데 활동가들이 실습하는 것을 보면서 정말 열의에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됐죠.”
그는 열정이 넘치는 활동가들을 보면서 “얼마 안 돼 선수가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김 부장은 요즘 노안활동가들의 교육과 활동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이어나갈지 고민이 많다.
“이제 활동가들의 능력을 알았으니 교육을 계속 이어간다면 활동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듭니다. 충남지부부터 노안담당자들의 활동이 활성화돼서 다른 지부로 전파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조현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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